“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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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이창배 발행인]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가?” » 2024 사순절 넘어 부활절까지…
2024 부활절에 돌아보는 두 왕국 스토리…
2024 사순절 넘어 부활절까지… 올해 맞이하는 사순절과 부활절은 분명 새로운 미래를 향한 청사진을, 교회가 도전해 나갈 좌표를 찍는 전환점이자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때가 다다른 것이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가?” 그 십자가를 지심처럼 오늘날 교회는 AI 인공지능 시대 전개에 대해 “정복할 것인가? 정복당할 것인가?” 이 세대와 다음 세대를 위한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게 됐음을 알자….
그날은 잠재적인 폭발성으로 인해 예루살렘에는 묘한 김장감이 가득했다. 무언가 폭발물에 섬뜩한 불꽃이 일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릴만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그분이 오신다. 그분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예루살렘 성 백성들도 왠지 들뜬 기분으로 구름떼같이 그분이 입성할 성문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 모두는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이었는지,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을 이심전심 알고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유대 땅을 뒤집어 놓은 단 한 사람, 발이 닿은 곳곳에서 기적을 행하고, 귀신 들린 자를 자유롭게 하며,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혈루병을 앓던 여인을 치료하고, 베데스다 못 가에서 38년 동안 병 고침 받기를 기다리던 환자를 단번에 고치신 분, 이미 죽은 자를 일으키며, 수만 명에게 먹을 양식을 나눠주며,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잠잠케 만드시는 분, 물 위를 평지 걷듯 걸어 오시는 분, 빈 배에 물고기가 가득 차도록 명령하시는 분이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오르고 있단 소문은 금세 온통 예루살렘 성을 벌집 쑤시듯 소동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그렇듯 그의 발이 닿는 곳마다 수천 명의 무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가 던지는 급진적인 가르침은 유대교 종교 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기다리며, 그의 이름 나사렛 예수를 부르며, 이 나라 전체를 이끌어 주길 바라고, 로마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방인으로 세워진 헤롯 왕가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길 바랐다.
그리도 바라고, 바라던 대로 드디어 그분이 이제 가장 거룩한 도시, 위대한 성전의 장소, 유대교의 중심지이자 유대인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향해 오르고 있다. 그분이 만약 무언가를 할 것이라면, 무엇을 이끌 것이라면, 자신을 무엇으로 선포할 것이라면, 어떤 모양의 왕관을 쓸 것이라면, 이제 그것은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 분위기라면 헤롯의 군대가 막을 수 없고, 로마 총독부의 군대가 이를 저지할 수 없으리라. 이제 그분이신 나사렛 예수를 따르며, 실제 그와 가장 가까운 제자들은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자기 가족과 친구들과 가까운 친지들에게 이 소식을 공유했다.
나사렛 예수가 왕이 되시는 역사적인 순간이 이제 이뤄지려 한다. 얼마나 기가 막힌 순간이었을까?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그날이 이른 것이다.
그분이 항상 자신이 하는 모든 일, 가르치는 모든 것, 그가 목표로 삼은 모든 것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해 왔던 그 순간이 눈앞에 다가섰다. 선지자 스가랴가 예언한 그대로 나사렛 예수는 어린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문에 나타났다.
그때 들렸는가? 그 환호의 소리를, “호산나, 호산나” 누가 뭐인 것도 없이, 사람들은 뛰쳐나가 자기 옷을 벗어 길을 덮었고, 수많은 사람이 흔들어대는 종려나무 가지의 소린 한차례 광풍이 지나가듯 환호의 외침과 뒤섞이며 장관을 이뤘다. 그토록 갈망했던 유대왕국의 재건을, 다윗 왕가의 화려한 부활을 눈물겹게 바라고 소망했던 그 순간이 다가온다.
그야말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목이 터지라 고함쳤다. 그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사렛 예수여” 이 얼마 만이던가. 목이 터지라 외치다 죽어도 여한이 없을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알았을까? 그렇게 바랐던 소원, 그들 모두의 소원과 정반대라는 사실을?
그 첫 번째 증거가 나귀였다.
그분은 왜 건장하며, 용맹스럽게 치장한 전투용 말을 타지 않고 나귀를 타셨을까. 미쳐 자기 생각에 빠진 수많은 사람은 그런 생각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 더 이상 왜 눈치를 채지 못했나 묻지 말자. 착각은 자유일 테니.
아무튼 유대인들에게 당나귀는 천한 동물이다. 아니 쉽게 표현하자면 평화의 동물이다. 절대로 정복을 연상시키는 그런 동물은 아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알렉산더 대왕처럼 정복의 왕이 되길 원했다면, 로마의 시저처럼 전쟁의 왕이 되길 원했다면, 유대 땅을 통치할 다윗의 왕국을 무력으로 일으키시길 원했다면, 절대로 당나귀를 타지 않았어야 했다. 대신에 전투용 병마를 타고 위풍당당 행진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번째의 증거가 종려나무 가지이다.
성경에는 그들이 나사렛 예수가 타신 나귀의 앞에 겉옷을 벗어 깔며, 종려 가지를 깔았다고 한다. 여기에는 평범하지 않은 단순한 예의 이상의 의도가 담겼다. 즉, 종려나무 가지는 유대 국가주의, 유대인의 자부심, 유대인의 승리를 상징하는 심볼이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만들어진 동전에는 종려나무 그림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반적으로 국가주의를 상징한다고 여겨졌다. 그 때문에 유대인 동전에 있는 종려나무는 유대 국가주의를 나타내고, 로마 동전에 있는 종려나무는 로마 국가주의를 나타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종려나무 가지를 펼치면서, 열렬히 환영하고, 환호하며, 그분을 유대인들의 정치적, 군사적 해방자로 받들기를 원했던 예루살렘 백성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엿보게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로마로부터, 헤롯 왕가로부터 회복할 자로, 메시아로, 유대의 왕이 되기를 원했다. 순수 유대 혈통으로 다시 회복되는 다윗 왕국의 재현을 바랐지만, 이날 나사렛 예수,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나라는 자기 피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해 죄 사함으로 구원하게 될 거룩한 나라요, 새 예루살렘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왕국이었다.
세 번째 증거는 “호산나!”라는 히브리어 표현에 있다.
이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또는 “지금 구원하소서!”를 의미했다. 이어서 즉각적으로 세워질 다윗 왕국의 복원을 열망하는 외침이었다. 사실적으로 면밀히 따져보자면 공생애 기간 사람들을 치유하고, 먹이고, 죽은 사람을 일으키기를 쉴 사이 없이 하셨다. 그럴만한 능력을, 그런 힘을 지닌 이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모르면 몰라도 그런 엄청난 기적과 천지와 땅과 바다를 다스리는 엄청난 힘과 능력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하게 바라왔던 왕의 조건이다.
로마 군대를 물리치고, 이방 세력을 쫓아내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힘을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의 호산나 외침 “우리를 구원하소서”는 공허한 메아리였다. 오직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는 길 만이 “온 세계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 모두를 구원시킬 단 한 가지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날에 두 개의 왕국 즉, 눈에 보이는 왕국과 눈에 보이지 않는 왕국이 존재했다. 사람의 그토록 간절히 바라고 열망했던 유대 왕국과 우주적인 하나님의 왕국이다. 그런데 이 두 왕국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이 두 왕국은 국가와 정치와 환경이 바뀌어도 여전히 존재하는 실재이다. 이 사이에서 실상 우리의 갈등도 여전히 존재해 왔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모양과 형태와 존재적 양태는 달라졌다지만, 지난해 11월부터 세상에 본격 등장한 AI 인공지능은 모든 인간의 영역에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을 지니게 될 세상 왕국의 최종 모형이다. 이 놀라운 첨단 과학 문명의 집약체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에 대해선 예측불허다. 그래서 두렵기까지 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그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이다. 우리는 이 나라의 시민권자라는 자각과 긍지를 잃어선 안 된다는 지점서 그 절체절명의 갈림길에 섰음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 때문에 올해 맞이하는 사순절과 부활절은 분명 새로운 미래를 향한 청사진을, 교회가 도전해 나갈 좌표를 찍는 전환점이자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때가 다다른 것이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가?” 그 십자가를 지심처럼 오늘날 교회는 AI 인공지능 시대 전개에 대해 “정복할 것인가? 정복당할 것인가?” 이 세대와 다음 세대를 위한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게 됐음을 알자.
글 이창배 목사/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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