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 상공에서 묵상하는 역설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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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칼럼=Dr. Elijah Kim] 대서양 상공에서 묵상하는 역설의 믿음 »
부제: 고난주간에 묵상하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묵상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 들이게 하는 역설의 믿음
고난주간에 저와 필리핀에 있는 아내와 아들이 영국으로 와서 딸과 사위와 손자를 만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항공사는 어떠한 이유 설명도 없이 비행기를 취소하였고 저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루 늦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아내와 아들은 하루 먼저 도착한 셈이 됩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저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순전히 저의 기억에 의지하여 글을 거의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런던 히드로에 도착하여 짐을 찾는데 저의 짐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짐을 찾아 딸을 만나고 저는 이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미국과 시차가 맞지 않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를 켜서 비행기 위에서 쓰면서 남겨진 지금의 결론 부분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영국 시각은 새벽 3시를 넘어갑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보스톤에서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글을 씁니다. 함께 타는 탑승객을 들러 보니 나이가 비교적 지긋이 드신 분들이 주위에 가득합니다. 어떤 이는 항공사 영상을 보고, 어떤 이는 잠을 자고, 또 어떤 이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자주 보는 모습이지만 한국 항공기를 탈때와는 분위기 가 조금 다름을 느낍니다. 책을 보는 이들이 비교적 많습니다.
지금 우리는 책이 사라져가고 갈수록 인쇄물을 읽기 보다는 모바일이나 컴퓨터로 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에게 수많은 발명품들이 나왔지만 가장 놀라운 문명의 이기는 전기의 개발이고, 이 전기로 인해 너무나 많은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TV, 냉장고, 초고층을 단숨에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 이제는 전기차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전기 없이 사는 사회는 생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큰 줄기의 문명의 이기가 발전되고 나면 인간의 삶의 질을 상당히 높여주는 작은 종류의 발명품이나 편리한 도구들이 잇따라 생산되곤 합니다. 예컨대 집안을 환하게 밝혀 주는 전등이며, 온 도시를 환하게 밝혀 줌으로 하루 낮 만을 사용하던 현대인에게 밤도 낮과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조국을 방문할 때마다 가장 실감났던 것은 “잠들지 않는 도시 서울”이었습니다. 서울과 수도권을 모세혈관처럼 끊임없이 나르는 전철, 전쟁의 폐허 이후 중화학 공업 육성에서 이제는 반도체 중심 수출 산업형 국가로 도약한 데에는 밤낮없이 돌아가는 반도체 공장을 돌릴 수 있도록 제공되는 전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엄청난 전력이 소모되는 이러한 공장을 이토록 저렴한 가격에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나라는 결코 몇 손가락 안에 들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로 인해 인류의 삶을 가장 놀랍게 변화시킨 것은 컴퓨터 혁명입니다. 그리고 갈수록 지능화되고 용량이 극대화되고 이전에는 구하기 어려운 컴퓨터를 각 개인이나 가정이 가질 수 있는 개인 컴퓨터(PC, Personal Computer) 시대를 열더니 인류는 삶은 로케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에는 타자기는 박물관에서 구경하는 것 인줄 알았습니다. 그런 타자기가 워드프로세서로 나왔을 때 목회 초년생이었던 저는 워드프로세서를 얻고 그 기쁨에 제가 썼던 시를 옮겨 보기도 하고, 너무 신기해서 에세이를 처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워드프로세서가 PC의 보급으로 286, 386, 486, 586으로 계속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 어느 날 저 같은 사람에게는 잘 알 수 없었던, 그저 메켄토시 컴퓨터를 설립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스티스 잡스가 나타나, 집에 있는 컴퓨터, 들고 다니는 컴퓨터를 손 안에 든 컴퓨터라 할 수 있는 아이폰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해 1월 1일 저는 40일 금식을 하던 해입니다. 그러니 그 해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바일 폰의 등장이 일어난지 어느새 17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전철을 타도, 사람들은 모바일에 집중합니다. 은행 거래도 모바일로 진행합니다. 바쁜 현대인은 쇼핑도 모바일로 결제합니다. 많은 의사 소통은 전화 통화보다는 문자로 합니다. 특히 한국인에게 카톡은 삶의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일본을 갈 때마다 전철에서 문고판 책을 들고 늘 책을 읽던 일본인들이 떠 오릅니다. 이제 손에 책을 들고 읽는 이들을 찾기 힘든데 아직도 저렇게 책을 들고 책을 읽는 모습이 이제는 낯설기만 합니다.
모바일을 통한 영상이든, 노트북을 통한 영상이든, 책을 읽고 묵상하는 현대인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이해하고 청각적으로 듣는 것에 익숙한 우리들의 뇌는 이제 사고작용마저 단편적 물음에 무엇이든 답을 얻을 수 있는 검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전기를 통해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고, 전기차로 타거나 전철을 타거나 전기 버스를 타고 다니며, 책을 읽고 공부하고 물음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검색만 하면 답이 나오는 이 시대에 우리 인류에게 책은 무엇이고, 사고작용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겨울에도 따뜻한 히터가 방을 따뜻하게 하고 어디를 가도 이제는 추위 때문에 얼어 죽었다는 뉴스는 접하기가 어렵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속에 자연이 주는 불편함(?)을 모두 인류는 편안함과 안락함으로 바꾸어 버렸지만 가장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와 맛을 만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땀을 흘려야만 얻었던 추수의 기쁨은 얻지 못한 채 집 앞에만 나가면 농산물과 과일 그리고 해산물을 바로 구할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지내며 생존해야 했던 김치 장독대는 이제 김치 냉장고가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산모가 죽는 일도 이제는 거의 없게 되었고,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질병도 하나 하나 정복함으로 인간의 기본 수명이 너무나도 길어졌고 가장 뛰어난 의료체계는 인간의 기대 수명조차 수치를 높여 주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장수 국가가 되었습니다. 참로로 매우 작은 도시 국가를 빼면 우리나라는 기대 수명은 일본 그리스 스위스 다음 세번째입니다. 만약 홍콩, 마카오를 치면 그 다음 스위스 그리고 일본 다음으로 5위가 되며 수명 83.53세로 1위하고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UN에서는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 장수국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한국의 뛰어난 의료체계 때문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은 100세 시대라고 너도 나도 말합니다. 생로병사에서 늙고, 병드는 부분까지 정복하니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인류는 몰입하고 있습니다. 줄기세포 복제 및 자신의 몸을 냉동화해 인류의 과학이 죽음을 정복하는 날 부활시켜 달라고 한 미국인 상당히 많습니다.
갈수록 더 편안해지고, 쉬워지고, 풍족해지고 누리는 이 시대에 우리는 행복할까요? 어찌 보면 가장 빠른 속도로 최빈국에서 많은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선진국이 된 한국이 유독 사람들의 표정이 어둡고 밝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우울증이 가장 많고 자살율이 가장 높으며, 청소년들은 공부 기계가 되어 대학을 가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늦은 밤까지 학원을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 독서실 들에서 공부를 합니다. 한국 사회에 올 때마다 늘 듣던 말 “헬 조선”은 한국 사회 전체를 보면 그 말이 그리 틀리지도 않습니다. 너무나도 편안하고 안락한 지금의 문명의 이기와 발전은 이룬 한국 사회에 “행복한 삶” “인생은 참으로 살만하다”는 자족감과 행복감, 그리고 삶의 자존감과 여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캠핑카를 사서 주말마다 자연과 바다를 찾아가는 것이 삶에 찌든 현대인들을 위로하는 것일까요? 과로한 업무로 인해 회식 그리고 2차 회식 그리고 노래방과 향락 산업에 빠져 그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오직 삶을 고상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일까요?
저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제 이 정도 살면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달려가는 한국 사회를 보며 드는 생각은 바로 “역설”입니다.
역설은 부정적으로도 될 수 있고, 긍정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초가삼간에 살아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유유자적 하며 삶을 자족하는 이가 있습니다. 최첨단 시설 편의시설이 다 들어 있는 단지에 인류가 가장 꿈꾸는 모든 문명의 이기를 다 집약해 놓은 모든 것을 다 실현하는 강남 부자 아파트에 사는 이도 있습니다. 최첨단 보안 시설에, 미리 대기하는 엘리베이터, 사물 인터넷, 최첨단 가전제품과 인간 친화형 청소 로봇과 모든 편의 시설이 아파트 안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면 테니스장, 뮤직스튜디오, 수영장, 주차장 등이 있고 1층으로 가면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피트니스 센터와 세탁소와 편의점과 수퍼와 약국이 갖추어진 온갖 가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리한 모든 것이 다 있는 최고급 아파트에 사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일까요?
역설입니다. 안락함이나, 물질의 풍요로움이나, 지위와 명예가 순간의 편의는 제공할지 언정 행복을 주지는 않습니다.
저는 20대 초반 이 역설에 대하여 깊게 고민하고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역설을 신앙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풀어 내면서 삶의 의미와 인생의 가치를 이끌어낸 철학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입니다. 너무나 그의 철학과 사상을 좋아했던 저는 코펜하겐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흔적을 찾으러 부단히 찾아다녔습니다. 그 도시에 키에르케고르 거리도 있고, 키에르케고르 박물관도 있지만 많은 덴마크인들이 키에르케고르를 정확하게 어떤 인물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받은 충격도 있었고 조금은 실망감이 들었습니다.
저의 청년 시절 “역설”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 준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습니다. 그는 신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학을 공부하는 저에게는 그 어떤 신학자도 생각하지 못한 삶과 인생 그리고 죽음과 절망이라는 심각한 주제 가운데 인간을 구원 시켜 주는 유일한 통로 “믿음”에 대하여 “역설”의 논리로 신학적 난제를 풀어 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책을 단숨에 읽어 나간 저는 한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번 계속해서 마치 새로 읽는 사람처럼 읽고 읽으며 정독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철학자가 기독교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믿음”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이것이 주는 “역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도출하지 않아도 이렇게 심원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어서 탐닉할 수 있음에 철학을 너무나 좋아했던 저에게는 일종의 가장 중요한 해결 방법을 찾은 것 같은 한 청년의 고민을 일거에 인간의 존재의미를 결정짓게 만드는 창구가 되었습니다. 만물을 설명하는 철학체계에서 헤겔의 이신론적 이성주의와 궤를 달리하는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이 인간의 합리성을 초월한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저는 마치 궤를 달리하는 헤겔이나, 피히테나, 칸트에도 깊게 탐닉했기에 결코 키에르게고르는 이신론을 뛰어넘는 즉 이성을 뛰어넘는 믿음의 역설 즉 인생이 결코 답할 수 없는 어떤 세계에 하나님만이 주시는 초월적 진리를 주셨다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맹신이나, 미신이나, 광신이 아니어도,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유럽인에게는 저 멀리 자연 법칙만 만들어 놓고 일체 인생사를 관여하지 않으신 초월적 신처럼 보이는 유럽 신학계와 철학계에 지금도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또한 우리가 드리는 질문에 답을 주고 계시다는 놀라운 깨달음의 세계이기도 했습니다. 20대 청년이 그리고 신학도였던 저는 신학에서 답을 찾지 않고 철학에서 신학이 주지 않는 답을 찾은 실마리와 해결점을 보았을 때에 희열과 감흥은 지금 생각해도 전율처럼 온 몸을 감싸 안는 듯 합니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Johannes Climacus )는 “모든 사고의 가장 큰 역설은 사고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이 열정은 모든 사고, 심지어 개인이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것에 참여하는 한 개인의 사고 속에 근본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습관은 우리의 감성을 무디게 만들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고 말합니다. 참으로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문제를 보지 못하거나, 문제를 보아도 무디어진 판단력과 지성은 인간과 인류의 근원적 문제는 간과하지 못한 채 지엽적 문제에 천착하게 만듭니다. 이점이 바로 싸구려 인간과 고상한 인간의 차이점입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지위가 있고, 많은 학식이 있어서 고상한 인간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가지고 있어도 삶의 의미를 찾고 누림에 있어서 자신 가진 것 이상의 깊은 의미와 존재 이유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비극적 인간이 싸구려 인간이며 이것이 또한 부정적 의미에서의 역설이기도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자아 개념이 무엇이며 이 자아개념이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음에 대한 광대한 사고의 장을 열어 줍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알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인간의 장엄한 영원성을 발견하게 되며 이러한 영원한 삶에 어떻게 인간이 부합하며 살아 가는지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른 “역설의 신앙”이라는 설명으로 자신의 철학을 책속에서 설파했습니다. 서양 철학에서는 기독교적 기반에 살고 있으면서 기독교적 논제를 철저히 배격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예컨데 신론 보다는 이신론으로, 인간론 보다는 존재론으로, 그리고 영원성보다는 실존주의로 기독교적 개념이나 가치가 철저히 배제되고 무시당한 것이 대세였습니다. 그래서 서양 철학사에서는 언제나 소크라테스와 인간 사고의 맥락을 역설로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리스텔레스의 자연신론으로 가는 합리적 추론이 더 서양철학에선 사용되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없는 인간의 사상체계는 모래 위의 성처럼 아무리 논제를 제기하고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의미론을 담아 내어도 삶의 존재 의미를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문명권에 있던 서양 철학은 언제나 반기독교적 지성이 오히려 지성의 꽃으로 추앙 받는 분위기가 매우 강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과 삶과 자연과 우주의 기반이 되는 하나님(신) 위에 질문을 던진다면 클리마쿠스 같은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와 인간 사고의 맥락에서 역설을 설명합니다.
클리마쿠스(Climacus)와 같은 철학자는 모든 사고의 기초에는 인간이 자신의 합리성 밖의 무언가를 이해하고 초월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내재된 믿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나 기독교와 같은 어떤 것들은 인간의 생각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현실을 잊게 만듭니다. 한국 철학자들이나 동양철학자들이 서양의 문명과 사상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초월성과 내재성입니다.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저로서는 조직신학이 주는 신학적 개념보다도 바로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서양인의 뼈 속에 새겨 있고 구조화된 사고체계가 직관적이고 인격적 관계를 선호하는 동양인과 근원적으로 다름을 보고 저는 수많은 절망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한 절망감을 극복하려고 40여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여전히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는 동양적 직관을 가진 동양인과 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수많은 서양인들의 차이를 보며 인류가 걸어 오면서 살아온 수천년의 삶의 궤적과 사고구조는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님을 봅니다.
저 멀리 계시는 하나님 즉 초월성, 자연 법칙과 원리 그리고 이성과 판단 그리고 직관과 사고의 내면에 작동하는 내재성은 비단 철학적 용어만이 아닙니다. 조직신학 전체가 이러한 구조 안에서 신론, 삼위일체론, 기독론, 구원론, 은총론, 구속론, 심지어는 성령론이 있습니다. 물론 이외의 더 많은 것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 철학자 가운데 키에르케고르는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 속에서 역설의 방법을 통해 믿음의 길을 발견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영원성과 하나님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존재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설파합니다. 역설은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것이고, 마음이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계이기도 합니다.
역설의 총아는 오직 “믿음(신앙)”입니다.
오랫동안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침몰되어 있었고 심지어 모든 신학적 기조와 설명이 소크라테스적 방식을 따르거나 한 술 더 떠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신론의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신학의 최고 신학자로 불리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읽다 보면 기독교적 개념을 빼면 완전히 철학 교과서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서양 철학 가운데 가장 그리스 고전 주의 철학의 주제를 총망라하고 이 가운데 이성을 우위에 둔 해결 방법을 제시한 헤겔주의는 독일 신학계에 쓰나미가 되어 성경을 부인하는 이신주의 신학과 리츨의 자연주의 신학을 가져 옴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경을 조각 조각 내 인간의 작품으로 만들어 버린 문서설, 저등비평, 문학비평 그리고 고등비평을 불러와 전 유럽의 기독교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스스로 와해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헤겔주의와 칸트주의가 풍미하던 이 시기에 이런 이신론적 이성주의를 반대하고 오직 역설과 믿음을 강조한 키에르케고르는 주류 철학계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독일을 중심으로 신학계에는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인간관계 그리고 이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무던히도 헤겔주의 철학 체계가 아닌 자신의 역설을 통한 믿음의 논리로 풀어나가려 했던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인간의 합리성을 초월한다고 믿었습니다. 서양 철학 뿐 아니라 기독교의 사변 신학 체계에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기저가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진리는 자아실현, 즉 훌륭한 교사가 개인이 깨닫고 다시 떠오르도록 도울 수 있는 인간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변학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임에 있어서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신학자보다 더 신학자같은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 대한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선포자로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것에 중심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자신의 아들을 온전히 순종함으로 드리기까지의 과정처럼 그리스도를 받아 들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선포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의 개념을 강조합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진실은 영원하며 진리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는 영생은 온 인류에게 주신 신비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제가 청년 시절 번개에 맞은 것처럼 받았던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아브라함의 역설, 즉 아들 이삭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수많은 질문에 스스로 답하면서 종국에는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도리어 제물을 준비해 주셨던 역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역설이 그냥 역설이 아니라 “두려움과 떨림”으로 순종하는 믿음의 역설입니다. 이를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아브라함 역설의 일부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중단”이라는 개념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의 아들 이삭을 기꺼이 희생하려는 것은 더 높은 목적(목적론적)을 위해 윤리적인 것을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행하는 절대적 순종의 행위는 전통적인 도덕성과 이성의 차원을 뛰어 넘으며, 하나님의 명령이 도덕법과 모순되는 것처럼 일시적으로 보여지지만 사실은 지고지순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역설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명령의 의로움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윤리적 규범을 기꺼이 위반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역설은 기독교 자체의 핵심이며, “절대적 역설” 또는 “성육신”이라는 개념으로 구현됩니다. 즉 절대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이성적인 이해를 거스르는 근본적인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성과 논리를 초월하는 부조리로의 열정적인 도약이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도약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헌신입니다.
신학의 역설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탐구는 개인이 인간 이성의 한계에 직면하고 믿음(신앙)을 윤리와 논리를 초월하는 매우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헌신으로 받아들이는 매개가 되도록 도전합니다. 그의 작품은 참된 신앙에는 신의 역설적인 본질과 존재의 신비를 포용하고, 하나님과 신앙에 관한 일부 진리가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포함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은 신앙과 이성 사이의 긴장을 강조하며,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는 논리적 설명을 거부하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하는 절대적 순종이 요구되는 100%의 믿음을 요청한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의 절대적 믿음에 대한 순종에는 역설이 있었지만 이 역설을 믿음으로만 푼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고 신비이시고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가장 풀기 어려우나 가장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자 또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잉태되셨고 죄를 짓지 않으셨기 때문에 신성하십니다. 절대 역설의 기초는 인간의 죄를 깨닫는 것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믿기 시작할 때 인간이 취하는 믿음의 도약입니다.
신학적 논지로 설명되는 죄에 대한 개념 이해와 심판은 말할 수 있어도 인간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는 곳까지 이르도록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지만 이 절망의 내면에는 깊은 죄의 탄식이 있습니다. 저는 그의 책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죄로 인한 영원한 생명의 탄식으로 그려내는 이토록 잔인하리만치 죄를 멀리하고 영원한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철학자를 본적이 없습니다. 한 때 저는 저의 유일한 스승은 키에르케고르라고 자처한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인간 모두에게는 절망이 있고 이 절망은 치명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이 절망의 심연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죄입니다.
죄가 절망에 빠지게 하고 절망의 귀결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부정적 역설에 빠져 있습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서 먹고 마시고 즐겨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현세적인 고뇌, 곤궁, 질병, 비참, 고난, 재앙, 고통, 번민, 우려, 비애 가운데 살아가지만 왜 그러한 고통 속에 사는지 우리는 고민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말합니다. 가장 축약된 형태로 역설은 순간이라고도 불릴 수 있으며 우리가 만약 죄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는 순간 죽음에 이르는 병에 이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만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영원한 생명 안에 이르게 됩니다. 죄의 화신이었던 우리가 죄 없으신 예수를 이해하는 것이 역설이기에 이는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인지하는 순간 그 근원인 죄를 보게 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오시는 것을 깨닫는 역설의 진리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이 죄인이며 무죄하신 예수님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구원자이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애기는 길거리에서 외치는 전도자의 내용이 아닙니다. 19세기를 풍미하던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쇠렌 키에르케고르가 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받는 우리는 역설의 매개인 믿음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 아니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임재하시는 것 자체가 피조물인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리의 가르침이여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줍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 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난주간에 저와 필리핀에 있는 아내와 아들이 영국으로 와서 딸과 사위와 손자를 만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항공사는 어떠한 이유 설명도 없이 비행기를 취소하였고 저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루 늦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아내와 아들은 하루 먼저 도착한 셈이 됩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저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순전히 저의 기억에 의지하여 글을 거의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런던 히드로에 도착하여 짐을 찾는데 저의 짐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짐을 찾아 딸을 만나고 저는 이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미국과 시차가 맞지 않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를 켜서 비행기 위에서 쓰면서 남겨진 지금의 결론 부분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영국 시각은 새벽 3시를 넘어갑니다.
이 고난 주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죽음(사망)에 이르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러 오셔서 그 몸을 우리에게 대속제물로 주신 것을 기억하는 주간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영국 캠브리지 대학 근처 숙소에서 김종필 목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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