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철학이 필요한 시간 ◙ Photo&Img©ucdigiN
[북스저널=정이신목사] 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 지음/ 출판사: 사계절 »
48가지의 목소리, 우리가 내야 하는 소리의 다양성…
지금까지 48가지의 목소리를 여러분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내가 여러분에게 들려준 목소리들은 나의 강렬한 독서 경험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이 48가지의 목소리에 들어가야 하는데 빠진 것도 있을 수 있다. 내가 별다른 감응을 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예 접하지도 못했던 책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가보지도 않았던 곳, 혹은 가보았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감응을 느끼지 못했던 곳을 소개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 삶을 낯설게 성찰하기에 충분한 중요한 목소리는 어느 정도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 [책의 에필로그에서]
먼저 저자에 대한 시선이 여러 가지란 점을 고려한 후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저자가 공식적으로 박사 학위 청구 논문을 발표한 2003년 이후로, 논문 발표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라는 명함만 가지고 있을 뿐, 학술적으로는 크게 이바지한 일이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에 대한 이런 평가를 그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평가에 대해 저자는 그가 ‘강단 철학자’가 아니라, 항간(巷間)을 떠도는 ‘대중 철학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책도 다분히 이런 구도로 썼습니다.
저자가 우리에게 소개한 책을 두고, ‘알지 못하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편지’와 비슷하다고 했는데,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48가지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그가 선별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 편지의 무게가 상당합니다. 저자가 발췌한 아포리즘을 조각조각 그의 생각에 따라 모아서 분류한 것이지만, 여항(閭巷)의 인간에게는 한 개의 소리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이 쉽게 읽힌다고 해도, 가볍게 처리하기는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철학자 한 사람이 꽤 어려운 논조로 복잡한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그 사람‘만’의 이야기라고 무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철학자가 학문적으로 대단한 일을 했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나와 다른 마음의 결을 지닌 어떤 사람의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생각을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어 둘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48명의 사람이 그들이 살아낸 각각의 시대 풍경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독자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책에 실린 48개의 소리 중에 독자가 겪어내고 있는 현실과 비슷한 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자가 의도한, 대중을 위한 철학책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책을 읽을 때는 먼저 책에 있는 저자의 선별기준을 고려해야 합니다. 책에서 저자가 소개한 갖가지 편지는 여러분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 여러분과 거리가 먼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자가 왜 그 사람이 쓴 이 책을 골랐을까’를 물으면서 책에 담긴 편지를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읽어야 저자가 소개한 48명의 사람 중에 내가 감응을 일으킬 만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책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 후, 내가 안고 있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꿔야 합니다. 그것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 삶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저자가 책에 소개한 48가지의 목소리와 감응이 잘 안 일어나는 것이 독자의 취향이라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내 취향이 저자와 달라서, 저자가 소개한 사람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소수인 것은, 내게 뚜렷한 자아정체성이 있다는 말이기에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독자의 눈이 가려져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독자의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를 벗어야 합니다. 안대를 쓰고 있으면 책에 담긴 편지뿐 아니라 생동하는 자연을 봐도 감응이 잘 안 일어납니다. 덕불고(德不孤)라고 했기에, 이런 외로움은 절대 권장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책에 실린 48가지의 목소리를 낸 사람들은 그들이 쓴 편지가 누구에게 도달될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소망을 편지로 써서 유리병에 담아 바다로 보냈고, 후대의 누군가가 그 유리병을 발견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의 바람처럼 후대의 누군가가 책의 바닷가에서, 낡은 유리병 안에 담긴 그들의 메시지를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 ‘심쿵’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세상에서는 그들의 몸이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지만, 유리병에 담긴 편지로 우리와 이어지고 있는 48개의 목소리가 독자들의 마음에서 새롭게 살아났습니다. 48개의 편지가 현대인의 마음에 새롭게 꽃을 피웠습니다.
한 권의 책에 여러 가지 목소리를 담았기에 서로 충돌한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게 이 책의 매력입니다. 비슷한 예로 한 사람의 인생이지만, 그 안에 여러 가지 목소리가 담겨 있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어릴 적에 좋아했던 것을 나이 들어 싫어하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제 안에도 때에 맞춰 여러 가지 소리를 낼 수 있는 도구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나이가 들었고, 그에 맞춰서 새로운 소리로 낼 수 있도록 나를 바꿔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과거에 갇혀 어릴 적의 소리만 내겠다고 고집하면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 책에 있는 48가지의 소리는 우리가 내야 하는 소리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수단입니다.
책에서 스피노자는 삶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아포리즘(aphorism)은 스피노자의 전 인생을 대변하는 것이지만, 저자가 발췌한 스피노자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독자가 책에 나온 여러 가지 소리를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고, 저자가 제공한 망원경으로 봐도 괜찮습니다. 이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삶의 기쁨을 얻기 위한 것이니, 책에 실린 여러 가지 소리를 통해 내게 주어진 삶에서 기쁨을 얻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한나 아렌트는《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스스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순전한 무사유의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아렌트의 말을 빌려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출처는 아렌트가 쓴 책이지만,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려는 것에도 일정 부분 이런 면이 있습니다.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보면, 인간의 생애는 사(私)와 공(公)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먼저는 이 책을 통해 나와 우리의 삶에 깔린 채 숨 쉬고 있는 다양한 의무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무를 만났을 때, 그 의무에 밀려 질식당하지 말고,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 은일(隱逸)하는 권리도 슬그머니 얻어내야 합니다. 또 무사유의 책임을 혼자 떠안은 채 그 의무에 밀리지 말고, 책이 담고 있는 여러 가지 편지를 읽으며, 그 의무의 파도에 정치(精緻)하게 감응하는 법도 익혀야 합니다.
◙ Now&Here©ucdigiN(유크digital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