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역대 왕실(619~907)에 나타난 景敎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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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大秦) 선교사 알로펜, 장안(現서안)도착 景敎 전해
당태종은 즉위 후 치세(治世) 4년(貞觀 630) 우선 먼저 돌궐(突厥)을 평정시키고, 주변 세 종족에도 힘을 행사해 조공을 바치도록 함으로 국위를 떨쳤다. 게다가 내부적인 치리에도 힘을 씀으로 태평성세(太平盛世)를 이루었다. 치세(治世) 9년(貞觀 635)에는, 시리아인이며 로마(大秦)의 선교사인 알로펜이 21명의 일행과 실크로드를 통해 장안(現 서안)으로 건너와 景敎를 전했다…
[김규동 박사 동전사 연구] 당 역대 왕실(619~907)에 나타난 景敎 연구 [9회] A Study of jing-jiao in the History of Tang Dynasty »
1. 당고조(唐高祖 566~635)
이연(李淵)은 선비족 가계의 무장 출신인 아버지 이병(李昞)과 투르크 몽골인(Turkic-Mongolian) 혈통으로 선비족 탁발부 출신이며, 절실한 동방기독교인인 어머니는 사이에 태어났다.
이연은 수의 태원(太原) 사령관으로 617년 진양(晉陽)에서 반란군을 진압하고,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 등과 함께 擧兵, 장안을 점령했으며, 618년 수의 양제(煬帝 569~618)가 반란군 우문화급(宇文化及 ?~619)에게 살해되자 양제의 손자 공제(恭帝)를 협박하여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고 국호를 당(唐)이라 칭하였다.
당 초기, 사회의 주요 종교 신앙은 대체로 불교와 도교였다. 게다가 신흥 외래 종교인 불교는 토착화에 성공하여 세력이 막강해지자, 이에 唐의 황실은 재빨리 老子를 자신들의 李氏 조상으로 삼고 나서야, 고조 때에 이르러 도교가 다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 건립 초기 각종 문헌에는 유.불.도의 순서를 유.도.불로 바꾸어 기록했다. 고조는 원래 불교를 좋아했지만, 불교는 외래적이며 토착종교가 아니라는 유교의 논증을 수용하여 반(反) 불교 사상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626년에 칙령을 발표하여 승려를 환속시키고 불교의 절과 도교 도관의 수를 축소시키는 등 여러 가지 핍박을 가했다.
2. 당태종(唐太宗 627~649)
♣ 景敎의 태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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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은 원래 수나라의 장수로 활동하다가 후일 아버지 高祖 李淵(618~626)을 도와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唐을 세웠다(618). 그러나, 그의 정치적 야심은 결국 태자인 형 이건성(李建成 589~626)과 넷째 이원길(李元吉 603~626)을 죽이고 아버지인 고조마저 퇴위시키며 왕위에(626) 올랐는데 군사적인 면에서 불교 승려들의 큰 도움을 받아 쿠데타(玄武門之變)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배경하에 태종은 親불교적이고 親외래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당의 삼대종교인 유.도.불 세력에 대해 균형을 가지고 대했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온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631), 景敎(635)를 환대하였다.
당태종은 즉위 후 치세(治世) 4년(貞觀 630) 우선 먼저 돌궐(突厥)을 평정시키고, 주변 세 종족에도 힘을 행사해 조공을 바치도록 함으로 국위를 떨쳤다. 게다가 내부적인 치리에도 힘을 씀으로 태평성세(太平盛世)를 이루었다. 치세(治世) 9년(貞觀 635)에는, 시리아인이며 로마(大秦)의 선교사인 알로펜이 21명의 일행과 실크로드를 통해 장안(現 서안)으로 건너와 景敎를 전했다.
당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 578~648)을 황궁 西門 밖까지 내보내 상덕(上德) 알로펜 주교 일행을 극진한 예우로 맞았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국빈에 달하는 파격적인 대접인 것이다. 처음에는 페르시아에서 왔다는 의미에서 파사교(波斯敎)라고도 하였으나, 이후에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종교란 의미로 景敎라 하고, 혹은 로마에서 왔다고 하여 대진교(大秦敎)라고도 하였는데, 이후 일반적 景敎의 명칭은 대진경교(大秦景敎)로 널리 사용되었다.
태종은 그의 藏書樓에서 景敎徒들이 경전을 번역토록 배려해주었으며, 때때로 주교의 설교를 들은 태종은 “景敎의 가르침은 바른 진리임을 깊이 알게 됐다(深知正眞)”며, “황제의 명으로 景敎의 전수를 명한다(特令傳授)”며 포교를 허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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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펜의 장안 도착 후 3년 만에 장안의 開遠門 내 십자로 동북방향의 의녕방(義寧坊)에 조정의 찬조로 페르시아식의 사원(波斯寺, 후에 大秦寺로 개명)을 짓게 하였고, 태종은 친히 예배당 이름을 바꾸면서 장안의 또 다른 대진사에도 친필 글귀를 하사하여 황제의 초상을 예배당 벽에 전모토록 하였다. 이 사원은 동방기독교의 중국 전래 이래 가장 오래된 예배당이다.(貞觀 12年 638) 이곳이 당대 중국 景敎의 선교센터라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어서, 대진사의 대대적인 완공 축하식과 함께 이에 탄력을 받은 景敎의 선교사업은 순조롭게 전국적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景敎는 황제의 비호하에 상층부를 향한 전도에는 성공적이었지만, 오히려 상류층에만 집중하다 보니 보편적인 종교로서 하층민에게까지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과오를 범했다.
아무튼 당태종의 景敎에 대한 이례적인 호의에 대해서는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중국 각 왕조시대의 가장 걸출한 인물로서, 천하를 호령하던 그가 서역의 종교인 삼이교(三夷敎) 중의 하나인 景敎를 환대해 맞아주었는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의구심을 자아내지만, 필자는 생각하기를 당이 비록 제국으로서의 면모는 갖추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몇가지의 정치적인 취약점이 있어 당태종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사안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북방민족의 끊임없는 약탈과 내부적으로 허술한 의료체계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이 바로 페르시안들 즉 동방기독교인들에게는 장점으로 당대 실크로드 전역에 소문이 파다했기에 당태종 역시도 이에 대한 소문을 이미 접했을 것임이 자명한 사실이다. 이에 당나라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을 위한 골머리를 앓는 중에 들려온 동방기독교의 방문 소식은 각별히 반가운 소식이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이후 景敎는 토착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의 중심지인 唐朝에서 둥지를 틀고 황실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2백여 년 동안 번성했다.
3. 당고종(唐高宗 650~683)
♣ 景敎의 부흥기
당고종은 태종의 정책을 승계하여, 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 일신론(一神論), 일천론(一天論), 세존포시론(世尊布施論) 등을 번역한 알로펜(Alopen)을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奉하고, 景敎를 국교의 하나로 삼아 참종교(眞宗)라 하여 景敎의 전파를 도왔다.
이 시기에, 景敎가 당의 전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파되며 부흥했던 시기일 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도 안정되며, 국력 또한 대외적으로 강성한 시기였다.
그들은 주로 실크로드의 각 경유지인 도시에 정착하게 되었다. 육로 실크로드를 통해 주로 수도인 장안과 낙양, 揚洲 등지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들 중 다수의 景敎徒들은 자신의 문화와 종교적인 색채로 현지에 스스로 적응해 나가기 시작한 점도 다른 측면의 景敎 유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비록 생소한 당의 문화에서도 그들의 종교 활동을 지속했는데 이를 위해 교회조직이 필요했고 예배장소가 시급했다. “法流十道 國富元休 寺滿百城 家殷景福”이란 말의 의미가 바로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때 벌써 전국 각 州에는 景敎가 퍼졌으며 100여 개의 도시에 景敎사원과 수도원들이 있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당에는 358개의 수도원 혹은 교회들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景敎碑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고종은 말년에 자신의 황후를 폐하고, 태종의 궁인이며, 불교의 비구니였던 무씨(武氏)를 총애함으로 점차 그녀의 가족들의 영향으로 불교를 더욱 선호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태종 사후에 무씨(武氏)을 환속시켜 자신의 황후로 삼았는데 그녀가 바로 야심 많은 측천무후(則天武后)다. 이로 인해 여화(女禍)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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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당중종(唐中宗 684~710)
당고종이 죽자, 중종은 제위에 오르고도 어머니 무후(武后)의 섭정으로 정치에 간섭을 받다가, 결국 폐위되어 측천무후가 왕위에 있는 동안, 여릉왕(廬陵王)이 되어 균주(均州)로 옮겨지고, 다시 방주(房州)로 옮겨졌다.
5. 당예종(唐睿宗 684~690)
당예종(唐睿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 684~705)의 치세 하에 景敎는 일시적으로 불교의 박해를 받게 된다. 고종 이후 곧바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이는 다름 아닌 측천무후였다. 집권 초기, 景敎를 위하여 극진한 후의를 베풀었던 고종이었으나 태종이 승하한 후 부왕(父王)의 후비를 취하였던 일대과오가 景敎에 대한 치명타로 나타났다.
6. 측천무후(武周 68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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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景敎의 수난기
야심만만하고 잔인한 성품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중 656년 자신과 고종 사이에 태어난 왕자 충(忠)을 죽이고 스스로 皇后의 자리에 올랐으며, 새로 황제가 된 중종도 퇴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되어 국호를 주(周)로 바꿔 놓았다(武周革命).
그녀를 보면 유다의 첫 여왕이 된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의 악행을 보는 듯하다. 또한, 열렬한 불교도였던 그녀는 691년에 불교를 국교로 선포 하고, 백성들에게 불교를 신봉하라 어명을 내렸다. 또한, 대진사에 있던 역대 황제의 초상화를 제거하고, 도처에 불교 사원을 건립, 불상을 주조하였으며 불교의 僧侶들 중에서 정치적 인물을 발탁하여 채용하였다. 그녀의 제위 16년은 악랄함과 잔혹한 공포통치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박해는 발단 원인이 있었는데, “698년, 어느 한 불교도가 수도 낙양의 저잣 거리에서 景敎徒에게 치욕을 가했다” 이로 인해 양측 간의 충돌이 생겼고, 낙양의 景敎사원 혹은 수도원이 약탈되는 등 698년에 景敎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나마 2년 후인 701년 景敎徒인 아브라함(Abrahan)이 景敎徒들을 통해 막대한 모금액으로 측천무후의 기념물 대주송덕 천추(大周頌德 天樞)의 제작을 맡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그녀의 환심을 사 겨우 명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景敎徒에 대한 군중의 약탈과 박해는 14년 후에 장안까지 만연했는데 당시 景敎는 자체 교리마저도 불교적인 언어를 사용해 토착화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712년에는 중국 최초의 교회당인 대진사까지 파괴되는 등 또다시 핍박이 심해졌으며, 이에 대다수의 景敎 선교사들은 실크로드 변방으로 밀려나면서 신강성(新疆省) 이려(伊犁) 등지에 머물며, 景敎의 예배당과 석비(石碑) 등 600여 개의 景敎徒들의 묘비를 세웠다. 대체로 돌비석 위에는 시리아어로 새겨진 비문과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7. 당중종(唐中宗 705~710)
무주(武周) 성력(聖暦) 2년(699) 중종은 다시 태자로 신분이 회복 되었으며, 신룡(神龍) 2년(706) 그는, 장간지(張柬之, 625~706)등과 함께 우림병(羽林兵)으로 난정(亂政)을 토벌하자, 극적으로 다시 그의 왕위와 함께 당(唐)이라는 국호를 회복했다.
그러나 중종은, 복위한 뒤 황후 위후(韋后)와 무삼사(武三思) 등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안락공주(安樂公主 684~710)는 매관매직을 자행했다. 중종은 7년 동안 재위에 있었지만, 끝내 황후 위후와 안락공주에 의해 독살 당했다. 참으로 여복이 없는 비운의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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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당공종(唐恭宗 710)
9. 당예종(唐叡宗 710~712)
10. 당현종(唐玄宗 712~756)
♣ 景敎의 황금기
景敎는 현종의 즉위 초, 좌절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713년, 어떤 한 사람이 장안의 길거리에서 악한 의도를 가지고 서역인을 조롱했다”. 이로 인해 시작된 한인들과의 충돌로 서로 간에 앙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건 현종의 직접적인 보호와 景敎 선교사 대덕급열(大德及烈)의 관여로 景敎는 무사히 어려움을 넘겨 가까스로 회복할 수 있었다. 실지로 712년부터 781년까지는 당대 景敎의 대부흥의 시기였지만, 이때부터 강력했던 당의 국운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간혹, 아라비아 사절들이(732) 唐을 방문할 적에는 거의가 景敎 선교사들을 가이드로 통역과 조언자로 고용하기도 하였지만, 서아시아의 이슬람 세력의 발전으로 景敎徒의 출입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741년의 아라비아 군대와 티벳과의 연합은 결국 현종에 의해 고구려 유민 출신의 아들 대장군 고선지(高仙芝 ?~755)를 파견하여 아라비아와 티벳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742년에는 대진사에 당초 5대 황제의 초상화를 재안치하고 무너진 교회당을 수축하였으며, 그 뜰에 景敎碑를 건립(덕종 건중 2년)할 정도로 부흥했다.
744년에 새로 온 “길화(George, 佶和)”라는 景敎 주교와 선교사들이 도착하여 “이미 무너졌던 景敎 가르침의 기둥은 다시 높이 숭상되었고, 기울어졌던 도(道)의 반석도 굳건하게 세워졌다”, 景敎 선교사 수라함(首羅含)과 보라(普羅) 등 선교사 17명이 흥경궁(興慶宮)에서 예배를 드리며 황족과 궁인들에게 景敎를 전해도 되는 특혜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景敎가 페르시아가 아닌 로마제국에서 전해져 왔다고 해서 명칭을 대진사로 불리었다. 현종은 가끔 대진사에 가서 자신의 다섯 선왕의 초상화에 참배를 하였는데 이는 그가 결코 景敎를 신봉했다는 뜻은 아니다. 현종은 서예를 아주 좋아했는데 “天題寺牓 額戴龍書”라는 친필을 남기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景敎는 로마에서부터 전해졌고, 오랫동안 중국에서 성행했으며, 초기에 예배당을 지음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어야 한다. 두 도시의 파사교회당은 대진사라 개명하고, 천하의 각지에 전파되도록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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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其兩京波斯寺”는 당시의 장안과 낙양을 말한다. 景敎사원은 장안뿐만 아니라 府州 지방에도 세워졌는데, 景敎사원의 개명의 이유는 과거 사대부를 비웃음으로 인한 사태의 후유증으로 민간에게 여전히 파사(페르시아)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바뀌지 않은터라 이를 바꾸기 위함과, 당시 서역에서 같은 시기에 들어온 페르시아의 타 종교와의 구별을 위해 각별히 조정을 통해 개명하여 정식 반포케 함이 설득력을 더해준다.
755년에서 763년에 이르기까지 약 9년간 돌궐계 안녹산(安祿山, 703~757)과 사사명(史思明, 703~761) 이 주동이 되어 안사의 난(安史之亂)이 일어났는데, 장안과 낙양이 반군의 손에 넘어갔고 포위, 약탈이 진행되었으며 당의 황실 도서관마저 파괴되었다.
이때, 곽자의(郭子儀, 697~781)의 도움으로 태자 이형(李亨, 肅宗)이 불교, 이슬람교, 景敎 세 종교의 군대를 소집하여 반란의 우두머리 안록산을 물리 칠 수 있었다.
景敎의 부흥에는 사제들뿐만 아니라 무역업자들의 노력도 있었다. 당시에 영향력이 있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곧, 곽자의, 이사(Yazdhozid)와 景敎 주교 경정(景淨)이다. 곽자의는 景敎를 지지하였고, 이사는 곽자의의 최측근 보좌이자, 景敎 사제인 동시에 높은 직위의 장수이었다. ◙
저자 김규동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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