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바르면서 빠른 길과 앞질렀지만 늦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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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모든 것의 근본…
<잠언>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주는 유익을 먼저 알려주고(2∼6절), 결론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잠언> 서두를 미괄식으로 구성했습니다(1:7).
[교육저널=정이신 목사] 4.바르면서 빠른 길과 앞질렀지만 늦은 길 »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회에서 주님의 지혜를 얻으려면 보따리를 싸 들고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스바의 여왕이 그렇게 했습니다(열왕기상 10:1). 그런데 스바의 여왕이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유명해진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서 놀란 건, 주님이 주신 지혜로운 말씀이 예루살렘에 너무 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신하들은 온종일 하나님의 지혜를 들을 수 있었고,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열왕기상 10:8). 그녀는 지혜로운 가르침을 얻기 위해 이국땅인 예루살렘까지 왔는데, 정작 예루살렘 사람들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늘 듣고 배우고 있었습니다. 스바의 여왕이 봤던 예루살렘에 대비되는 곳이 현대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에 하나님의 지혜가 차고 넘쳐서 그걸 들으러 간다는 말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열왕기상>에 따르면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말씀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은 본인의 타락한 정욕을 따라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사람들이 ‘가인(Cain)의 길’로 명명된(유다서 1:11) 유혹의 길을 갔던 게 아니라, 말씀이 있는데도 자신들의 정욕을 따라갔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부흥이 일어난 교회 안에도 세상에서 말하는 정욕의 길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처럼 위장해 들어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부활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경계하며 싸워야 하는 대상입니다.
한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면 모든 게 다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솔로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차고 넘쳤던 예루살렘에도 정욕의 길이 같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부흥이 일어난 교회 안에도 가인의 길이 들어 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흥이 일어난 교회는 더 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솔로몬 이후에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탐욕의 길을 따르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됐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부흥으로 모든 성화 과정이 끝나는 게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몸을 입어야 끝납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될수록 더 간절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만약 사람이 몰려오는 것에 눈이 멀어 교만에 빠지면 자신을 찾아왔던 스바 여왕의 매력에 속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던 솔로몬과 비슷한 처지가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가 주님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주로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나 이에 필요한 요령을 다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세상의 성공과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잠언>에서 말한 이 관계가 결국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토대가 됩니다. 그래서 <잠언>은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니 계속 복을 받고 싶으면 주님과의 관계를 늘 원활하게 유지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이 주신 길을 가다가 정욕이라는 샛길이 나오면 그걸 무시해야 합니다. 샛길이니 지름길일 것으로 생각하고 그곳으로 빠져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길은 바른길이면서 빠른 길이지만, 샛길은 남을 속여 앞지르라고 부추기는 유혹의 길이면서 삥 돌아가는 길입니다.
<1:1∼7>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유익을 설명한 글로 <잠언> 전체의 서론입니다. <잠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젊은이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이런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그들의 귀를 솔깃하게 합니다(1:2). 그리고 그들이 바른 자세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합니다. <잠언>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주는 유익을 먼저 알려주고(2∼6절), 결론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모든 것의 근본이라고 <잠언> 서두를 미괄식으로 구성했습니다(1:7).
<잠언> 기자가 일부러 이렇게 썼습니다. 만약 처음에 <1:7>을 기록하고 다음에 <1:2∼6>을 기록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순서로 글을 읽어 보십시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이 읽었을 경우 ‘그럼, 그렇지. 하나님 어쩌고 저쩌고네!’라는 반응이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잠언> 기자는 이런 반응을 차단하기 위해 미괄식으로 <잠언>의 서두를 썼습니다. ◙
글 정이신 목사/ 본지 칼럼니스트/ 아나돗 공동체 위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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