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διασπορά )코리아와 Tephutzot(תפוצות)
Share This Article
[시사칼럼=Dr. Elijah Kim] 디아스포라( διασπορά )코리아와 Tephutzot(תפוצות) »
디아스포라의 모습은 다양하나 본질은 복음 전도에 있어…
역사적으로 바라 본 디아스포라의 모습은 다양하나 본질은 복음 전도에 있습니다. 이제 이미 땅끝에 나가 있는 Korean 디아스포라를 통해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디아스포라 선교 자원과 동원은 인류를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하기 위한 가장 큰 선교적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들어가는 글
지금 지구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디아스포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에덴 동산을 떠나 타향에 사는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흩어진 인류는 말그대로 디아스포라가 되어 각 지역에 서로 서로를 모른 채 살아 왔습니다. 인류는 끊임없는 인구이동은 새로운 땅에 새로운 역사를 쓰게 했습니다. 훈족(흉노)의 이동으로 인한 게르만 민족 이동은 슬라브족을 비롯한 지금의 유럽 국가들의 지형도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게르만 민족 대이동 뿐 아니라 몽골족의 침입을 통해 일어난 중앙아시아와 유럽의 인구 대이동은 한 국가 뿐 아니라 전 유라시아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때 이루어진 역사적 유산은 아시아 전역과 중동 그리고 유럽 각 국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인과 아프리카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이동은 지금의 미주 대륙의 새로운 국가들과 국제 정치 역학 구도를 창출했습니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시작된 유럽 인구의 이동은 신대륙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라틴 아메리카, 남아공, 오스트렐리아, 뉴질랜드 등 새로운 나라의 탄생을 불러왔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반적 인구 이동 가운데 특별히 복음의 빛을 비춘 민족이 있었으니 바로 유대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국소적 의미에서의 인구이동사와 광의적 의미에서의 인구 이동은 인류 전체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흩어짐이 주는 성경적 디아스포라의 의미와 선교적 역할 관계를 본 논문은 다루고자 합니다.
UN의 이민자 정의
UN 본부의 경제사회부(Departmen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의 인구국(Population Division)에서 발표한 2020년 국제 이민(International migration) 자료에 따르면 자신의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이민 인구가 2억7천2백만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전세계의 3.2 퍼센트의 사람이 이민 인구에 해당합니다. UN에서 발표한 이민 인구에는 단순 이민자(immigrants and emigrants) 해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overseas workers and labor immigrants), 유학생(international students), 해외 여행자(overseas travelers and strangers)와 같은 자발적 이민자(Vulnerary migrants)와 정치적 망명자(political refugees), 성노예자(sex slaves), 전쟁 포로(POW, prisoner of war), 난민과 망명자(refugees and defectors)등과 같은 비자발적 이민자(Involuntary migrants)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이민자, 망명자, 포로, 귀환자의 인류 역사의 이민 유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디아스포라’란?
신약 성경에 나오는 다이아스포라는 그리스어는 주전 5세기부터 헤로도투스(Herodotus)같은 학자들이 사용한 용어입니다. 주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발간된 70인역에서 다이아스포라는 모두 12번 사용되었습니다. 70인역에서 사용된 다이아스포라는 지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흩어지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도 않았고 ‘갈룻(glaut)’을 직역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70인역에는 ‘이민(emigration)’을 뜻하는 ‘apoikia,’ ‘해외거주(settlement aborad)’를 뜻하는 ‘paroikia,’ ‘이민(emigration)’를 뜻하는 ‘metoikia,’ 또는 ‘운송(tranporatation),’을 뜻하는 ‘metoikesia,’ ‘전쟁포로(wartime captivity)’를 지칭하는 ‘aikhmalosia’ 또는 ‘계시(revelation),’을 의미하는 ‘apokalupsis”가 있습니다. 신약에 다이스포라가 사용될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신적 행위에 의한 흩어짐을 말할 때만 사용하였습니다.
‘이민자’ 또는 ‘디아스포라’는 본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하거나 거주중인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살펴 볼 때, 현재 세계 학계에서는 이민자, 방문자, 여행자, 거주자, 난민, 체류자, 거류인 등 다양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먼저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는 디아스페이로(διασπείρω, “to scatter”)에서 왔습니다. 이는 ‘디아(δια, 찢어지다, apart)’와 ‘스페이로 (σπείρω, 씨앗을 뿌리다, 흩어 버리다, “to sow”)’의 합성어입니다. ‘디아스포라’는 히브리어의 ‘흩어짐(dispersal)’을 의미하는 ‘תפוצות (tephutzot)’의 직역입니다. Tephutzot(תפוצות)의 어원은 ‘pvtz’ 로 이는 ‘흩어지다(scatter, 레 26:33)’라는 뜻입이다. 구약에서는 ‘디아스포라’에 해당하는 또 다른 단어가 있으니 바벨론 ‘유배’ 또는 ‘유수’를 뜻하는 ‘גלות (galut)’ 또는 ‘גלה (galah)’입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밖으로 흩어지거나 또는 유배되었을 때 ‘흩어진 백성” 또는 ‘유배’ 또는 ‘유수’된 자의 의미로 ‘디아스포라’를 지칭한 것입니다. ‘디아스포라’가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왕국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해외로 나가 살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역과 식민지 통치를 위해 아라비아 반도 남부, 아프리카 일부 지역과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져 거하게 됩니다. (삼하 8장, 왕상 4장, 10장) 그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 당했을 때 이스라엘 10지파는 열국으로 흩어져 거하게 됩니다. 남왕국 유대 지파의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당시입니다. 저들은 먼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게 되고 그곳에서 열국으로 흩어져서 열방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바로 이 시기를 말합니다.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근동에 있던 유대인들이 지중해와 이란 및 중앙아시아로 흩어진 것은 제2차 디아스포라의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은 전세계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의 삶이 2천년 이상 이어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모두 6회에 걸쳐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단어가 나옵니다. 그중에서 사도행전 8장1절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일어나서 흩어진(디아스페레인)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복음전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미 이전에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있었지만 핍박을 통해 흩어진 디아스포라 크리스쳔 유대인들이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된 점을 21세기를 사는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한국인 디아스포라, 재외동포
디아스포라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말은 재외동포입니다. 재외동포는 정부의 공식 명칭이지만 실제로 쓰이는 용어는 다양합니다. 해외교민, 해외동포, 해외교포, 해외한인, 재미한인, 재중조선족, 재러고려인, 재일교포등으로 각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각 나라에서 살면서 그 나라 국적을 취득하고 점점 그 나라에 동화되어 가기에 어느 세대까지 거슬러서 재외동포로 정의하느냐가 매우 큰 의미를 지닙니다. 유대인은 수천년을 흩어져 살아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지만 미국에 온 영국, 아일랜드 및 유럽에서 유럽인들은 미국인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유럽인의 정체성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나라 법무부에서는 3세대까지 재외동포로 규정하던 것을 4세대까지 확대하였습니다. 문제는 수백 년 또는 수천년을 흩어져 살아도 여전히 우리민족의 언어, 문화, 풍습, 규범 그리고 민속신앙을 갖고 있다면 유대인처럼 재외동포로 규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외교부에서 발표한 재외 동포는 시기적으로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 해외에 거주하게 된 한민족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외 거주 한국인에 대한 정의의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범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우리 민족 역사 가운데 흩어진 우리 민족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과의 역사와도 맞물립니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고구려 유민이 지금의 중국 후난성 서부로부터 구이저우와 메콩강 마의 삼각지대인 태국, 라오스, 미안마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백제 유민은 당나라 뿐 아니라 지금의 일본을 있게 했으며 또한 일본 천황가에 있어서 백제의 왕족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도래인 그리고 귀화인으로 일컫고 있던 백제 유민은 일본 상류층을 형성하였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경우에는 배달국, 단군 조선, 부여로부터 흩어진 우리민족의 발자취와 각 지역에 살고 있는 것을 추적하는 것도 매우 유의미하다고 봅니다. 제가 지난번 언급한 것처럼 우리 민족을 한민족으로 정하게 되면 매우 국소적 범위가 되나 역사적 기원을 좀 더 깊게 다루게 되면 고조선을 건국한 멕이족,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고리족은 한반도 정착과 더불어 더욱 더 북으로 북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배제대학 손성태 교수의 저서 “우리민족의 대이동”에서는 이처럼 북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어메리칸 인디언이 된 것 까지 계산한다면 흩어진 우리민족은 천만명이 넘는다고 말합니다. 손성태 교수는 이 멕이족인 멕이가 사는 곳이라는 멕시코의 이름의 유래까지 우리민족과 연관 짓습니다. 이는 비단 멕이족과 고리족 뿐 아니라 선비 그리고 숙신과 말갈 및 여진에 이르기까지 광의의 의미로서의 한민족의 범위는 매우 확장됩니다. 더불어 발해와 고려 유민까지 포함하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갖고 있는 한민족의 범위는 매우 커지지만 이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요청은 지대하다 하겠습니다.
전기한 바와 같이 외교부에서 고지한 한민족의 범위는 구한말로부터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로 규정짓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흩어지게 된 한민족은 그 형편과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불리워졌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간 구한말 조선인들은 해외 동포 또는 해외 거주자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 간 사람들과 일본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는 교포(僑胞)라고 불렀습니다. 한때 중국 교포들을 화교(華僑)라고 부른 것처럼 한교(韓僑)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아직도 북한에서 , 이에 반해 북한에서는 조교(朝僑)라고 부르는데 이는 조선동포(북한을 통칭 북조선이라고 부를 때)라는 뜻입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의미로 해외나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동포(同胞)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외교부의 지침에 따라 재외거주자, 재외동포, 재외국민이라는 용어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인 대비 재외동포(이민자) 비율로는 우리나라가 단연 독보적입니다. 13억이 넘는 중국인 가운데 1억의 화교가, 그리고 다인종으로 구성된 인도계가 무려 5천만, 그리고 천 3백 50만이 넘는 필리핀 해외 거주자 다음으로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전세계 7백 5십만에 달합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의 경우만 해도 화교들은 각국가별로 대륙별로 뛰어난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화교들의 상장기업 중 태국은 81%, 싱가포르 81%, 인도네시아 73%, 말레이시아가 61%, 필리핀이 50% 등 넘어서고 있습니다. 만약 전세계 화교들의 자산은 추정하면 2-3조 달러에 달하며 이는 세계 3위 경제력 규모에 이릅니다.
화교란?
우리가 사용하는 교포(僑胞), 동포(同胞)는 중국 교포를 뜻하는 화교(華僑)와 관련이 깊습니다. 중국인 디아스포라에 해당하는 단어가‘화교(華僑, huaquio)’입니다. 화교(華僑)는 중국 본토를 떠나 중국외의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지칭합니다. 여기에서 ‘화(華)’는 중화의 중국을 의미하며, ‘교(僑)’는 타국에서의 거주 또는 임시 거주하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2세대, 3세대를 넘어가가면 자신들이 거주하는 나라의 국적을 갖게 됨에 따라 이들 2-3세대를 가리켜 ‘화인(華人, huaren)’이라고 부릅니다. 중국 대륙을 떠나서 오랫동안 타국 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이라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도 동향단체(주로 화교방(華僑幇)을 통해)를 통해서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경우에 ‘화교’라는 단어을 사용합니다. ‘화인’이라는 용어는 현지인과 결혼하여 동화되고 ‘화교’로서의 정체성이 약화되고, 모국어도 잃어 버리고(아예 사용해본 적도 없는 경우도 있음) 현지화된 경우에 해당됩니다. 태국의 ‘혼혈교생’인 ‘룩친(lukchins)’의 경우 태국인도 아니고 화교도 아닌 제3의 인종 또는 민족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경우는 태국과는 상황이 다른 경우입니다. 이 두나라에 정착하게 된 ‘화교’들은 여러세대를 거쳐 오면서 종교와 문화면에서 기본적인 삶의 양식을 겨우 유지하고 있기에 이들은 ‘바바차이니즈(baba Chinese)’ 또는 ‘바바(Baba)”로 부릅니다. ‘바바(Baba)’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아버지가 중국인(father in Chinese)’인 경우를 말합니다. 중국인 남자(baba)와 말레이시아 여성(nonya) 사이에서 태어나면 뻬라나깐(peranakan)이라고 부릅니다. 비슷한 예로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사람들은 ‘반도인(Peninsulares),’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와서 그들 부모를 통해 태어난 자녀들을 ‘반도 출신 자녀들(Criollos)’로 구분해서 부른 것처럼 ‘화교’와 ‘화인’의 관계도 그러하다 하겠습니다.
19세기 말 시작된 중국인들이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을 때, 중국인의 해외 투자의 중개(다리) 역할을 하거나 해외에 있는 지식전달의 가교를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화교(화치아오, 華僑)’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비해 비교적 최근 용어인 ‘해귀(하이꾸이,海歸)’ 또는 귀교교권(歸僑僑眷)는 해외에서 유학을 마친 사람이 귀국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객가인 또는 ‘번객(番客)’으로 부릅니다. 예전에는 외국인을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이 해외에 거주할 경우에는 ‘화예(華裔, huayi)’ 또는 ‘교생((僑生)’이라고 불렀습니다. ‘화예(華裔)’라는 단어는 중국을 뜻하는 ‘화(華)’와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민족 즉 ‘오랑케’를 뜻한 ‘예(裔)’가 합쳐저서 해외 거주 비한족 이민자를 지칭하였고 때론 ‘화이(華夷)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1949년 모택동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이는 모택동의 공산당을 피해 수많은 중국인들이 해외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때 해외 중국인을 ‘해외화인(Overseas Chines, 海外華人)’이라고 불렀습니다. 광동인(Cantonese), 복주(후추, Hoochew), 복건인(호아낀Hokkien) 그리고 객가인(하까, Hakka)인들이며 이들은 당인(唐人)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1957년에 이르러 중화인민공화국은 화교사무위원회라는 정부 기구를 통해 화교에 대하여 해외에 교거(僑居)하는 중국공민(中國公民)으로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 정부의 정의는 1984년에 이르러 화교는 해외에 정거(定居)하는 중국공민으로 다시 정의하였습니다. 비록 중국 영토밖에 거할지라도 그들의 거주는 한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중국시민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화교의 정의는 이미 현지 국적을 취득한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중국외의 나라의 국적을 취득한 중국인들을 ‘외적화인(外籍華人)’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 외적화인이 바로 ‘화인(華人)’인 셈입니다.난징조약 이후 급격히 늘어난 중국인의 인력 송출은 계약 노동자들에게 기인합니다. 1860년대부터 각 나라로 떠나게 된 남성 계약 노동자를 꾸리(苦力, coolie)라고 부르게 되었고 후에 이들이 동남아와 미주 대륙의 가장 많은 화교들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포괄적 의미에서 ‘화교’ 또는 ‘화인’은 중국 본토 지역 이외의 사람들도 포함된다면 홍콩, 마카오 그리고 대만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협의적 의미에서 중국, 홍콩, 마카오 그리고 대만 외의 지역에서 거하는 중국인들을 ‘화교’ 또는 ‘화인’으로 봅니다. 중국에서 떠나 중국인의 언어, 문화적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중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화교’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의 재외동포
2021년 발표된 외교부의 한국 재외동포는 732만 명입니다. 이들 중 외국 국적 동포(시민권자)는 481만명, 재외국민 251만명입니다. 용어에서 보신 바와 같이 외교부가 정하는 해외 한국인의 규정은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갖고 있는 동포와 여전히 한국의 국적을 갖고 있으나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로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재외 동포가 제일 많은 곳은 중국, 미국, 일본 그리고 유럽 순입니다. 중국에는 258만명이 거주하고 있고 그 다음 미국에는 223만명 거주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많이 거주하는 국가인 일본에는 85만 명이며, 유럽 전체에는 73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구소련권, 유럽 그리고 중동과 기타 국가에 디아스포라가 흩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만약 단기 내지는 단기 거주하시는 분들까지 포함시키면 최소한 750만에서 850만의 디아스포라 한국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세계에서 재외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중국, 미국, 일본 그리고 유럽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재외동포라고 공식적으로 부르는 한국인에 대한 용어 정리가 필요합니다.
2003년 외교통상부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 51.1%, 미주에 38.4%, 그리고 유럽에 10.3%으로 99.8%의 재외동포가 3개 대륙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재외동포는 모두 151개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총 인구 대비로 하면 무려 12.7%에 달하는 이는 유대인 다음으로 두번째 많은 숫자이다. 그러나 단순히 인구만을 따지면 중국 화교, 인도인(인종이 너무 다양해 통계 조사에 따라 다르게 분류될 수 있음), 이탈리아인(이 경유도 귀화한 경우 수치가 달라질 수 있음), 유대인(마찬가지로 미국인 또는 그 지역 사람으로 구분될 경우 달라짐)에 다음에 많다. 해외 노동자가 1천1백만에 달하는 필리핀인을 포함하면 순위가 또 달라진다. 2003년 통계에 따르면 재외동포의 자산규모가 국내 총생산의 4분의 1에 달하고 액수로는 한국의 4800억 달러와 비교하여 1200억 달러에 달한다.
한인 디아스포라
한인 디아스포라는 선교적 잠재력이 큰 지역에 몰려 있어서 선교 동원과 지역 선교 그리고 열방 선교가 가능합니다. 이미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선교 동원하고 동력화하는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재외동포 가운데 10-20% 만 동원하여도 60만에 120만을 헤아리는 선교 동원이 가능하게 됩니다. 타문화 적응도 이미 된 상태에서 대부분의 디아스포라가 고급 인력이 많이 있고 그 지역 문화 접촉 뿐 아니라 비자와 재정적 후원이 필요하지 않으며 소수자(minority) 그룹으로 겪은 체험들이 복음의 효과적 접근과 관통성에 유리한 면으로 작용합니다. 이미 그 지역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타인종과 더불어 살면서 타문화 적응이 아닌 타문화 삶속에 있는 디아스포라 한인은 선교사적 훈련을 이미 받은 것이나 진배없으며 한인 그리스도인들을 선교의 자원으로 사용하면 그 힘은 놀라울 것입니다.
세계 140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 디아스포라는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남북한이 이념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다면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또 하나의 Korean 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한국 교회의 선교 역사를 통해 면면히 흐르고 있는 청교도의 영성, 경건주의의 이상, 미국 대각성 운동의 흐름등이 있습니다. 한국에 온 수많은 선교사들은 이러한 흐름에 있어서 동질성을 공유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무디(D L Moody) 와 함께 스피어 (Robert Speer), 존 모트(John Mott), 토레이 (Ruben Torrey), 피어슨(Arthur Pierson) 등이 함께 한 노스필드 성경 사경회(Northfiled Bible Conference)를 통해 파송되었던 학생 해외 선교 자원 운동(Student Vounteer Mission for Foreign Mission)입니다. 무디와 함께 사역했던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한국교회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 교회 초기의 영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를 이끌었던 존 모트는 한국을 세번이나 방문한바 있습니다. 그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그는 말하기를 “20세기 안에 한국은 동양의 기독교 수도가 될 것이다 (Within this century, Korea will become the capital of Christianity in the Orient)”라고 했습니다.
근대 재외동포의 기원
1902년 12월, 당시 식민지를 얻으려는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 구한말 대한제국에 주재하던 미국대사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종황제에게 이민을 보내줄 것을 권유(?)하였고, 1차로 56명의 남자, 21명의 여자, 그리고 어린이 25명, 이렇게 102명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계약을 하고 제물포항을 떠나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루루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제물포 감리교회의 교인들이 몇 있었고 이들이 배 안에서 기도회와 성경공부를 인도하여 이 호놀루루에 도착할 때 그들 중 58명이 감리교인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맨 처음 그들이 한 일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세운 일이었습니다. 종교박해를 피하여 신대륙을 찾아 나선 청교도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22년 11월 11일 매사세츄스 플리머스에 도착,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세운 것과 너무나도 흡사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102명이라는 숫자는 매사세츄스 플리머스에 도착한 102명의 청교도들의 숫자와 동일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도착한 102명의 조선인들을 기다리는 것은 혹독한 고난이었습니다. 청교도는 첫해에만 추위와 굶주림으로 절반이나 죽었고, 조선인 사탕수수 노동자들도 비참한 노동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피땀과 눈물, 희생으로 아메리카 대륙은 신앙과 자유의 나라가 되었고, 지금 미국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200만명 중 70% 이상이 기독교인일 정도로 가장 복음화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03년부터 약 3년 동안 약 7,400명의 조선인들이 하와이사탕수수 농장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이들 중 약 2,000명은 나중에 캘리포니아 철도공사를 위한 노동자로 미국 본토로 오게 되었고, 1,000여명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와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다시 옮겨가게 됩니다. 이러한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일제 강점기 이전에도 멀리 멕시코까지 가서 일하고 그리고 그곳에서 미국과 카리브해안으로 흩어집니다. 한일 합방이 이루어지기 5년 전인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조선인이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 유카탄 지역의 에네켄 농장에서 4년 계약의 노동자로 입국한 곳이 바로 멕시코입니다.
그 후 조선은 일본에 합병되어 나라를 잃어 버린 그들 일부는 멕시코 남게 되고 또 일부는 쿠바로 떠나게 됩니다. 멕시코에 남은 한인 후예는 이미 6세대에 이르고 있으며, 그 후손은 3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인의 후예가 있는 곳에 가장 역동적인 선교를 감당하고 있는 지역인 멕시코에 한국 교회와 한국 선교사가 열정적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멕시코에 있는 놀라운 선교 자원을 개발해 주고, 교회와 교회의 연합과 네트워크를 활기차게 연결해 주면 멕시코 교회의 활성화가 빠르게 진행될 것입니다.
조선족과 고려인
기미년 3.1 운동 당시의 인구는 조선인(한국인)의 인구 2천만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한반도의 전인구의 3분의 1이 해외로 흩어지고 나중에는 절반 정도가 디아스포라가 됩니다. 일본의 강점기에 자발적으로 한국인들은 만주로 그리고 사할린으로 이주하였습니다. 1931년 만주 사변, 1937년 중일 전쟁 그리고 1941년 태평양 전쟁시에 일본은 한국인들을 강제 징용하고 또한 노동력을 각출하였습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 연행된 인원은 71만4천787명에 달하였습니다. 게다가 강제 징용된 조선인 군인과 군속은 36만5천263명에 이르렀기에 실제 해외로 끌려간 조선인은 일백9만명을 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시베리아 벌목공으로만 끌려 간 사람이 50만명에 이르렀고 이들이 중국에 정착하여 오늘의 조선족이 됩니다. 이를 만약에 중국과 소련 그리고 일본에 간 한국인(조선인)을 모두 포함하면 본국 인구의 절반이 해외동포였습니다. 고려인의 역사는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중앙 아시아로 끌려간 조선인을 통해서 입니다. 이제 조선족과 고려인 그리고 하와이, 쿠바와 멕시코, 미국과 남미 각지로 흩어진 해외동포들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한민족 디아스포라는 서구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이전부터, 그리고 선교사들의 초기 사역에, 더 나아가서 일제 강점기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선교 하기 전에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 동북부의 영구(營口)와 우장(牛壯)과 고려문(高麗門)과 서간도(西間島)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됩니다.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 선교사가 만나게 된 조선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존 로스를 도와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동참하였고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 )으로 조선 선교가 시작되기 전에 성경을 배포하였습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머물던 이수정이 1883년 미국인 선교사 녹스(G. W. Knox)와 함께 마가복음을 번역하였습니다. 마가복음은 6천부 출판되었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5일 제물포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최초로 한국인 세례가 이루어진 것은 서간도의 집안(輯安)으로 고구려의 옛 수도이기도 한 지역인데 이는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입국보다 무려 7년 또는 8년을 앞서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조선 땅에 최초로 세워진 소래 교회 보다 앞선 것이 바로 집안의 이양자(李養子)라는 마을에서 세워졌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들이 들어 오기 전에 이루저진 왕성한 선교 활동은 중국 동북 3성 즉 길림성, 요령성과 흑룡강성 그리고 연해주와 일본등으로 주로 1874년부터 1911년까지입니다. 조동진 박사의 보고에 따르면 이 기간에 중국 동북 3성의 평신도 자비량 전도인이 이미 100명을 넘어섰고 만주 땅에 세운 교회는 200교회가 넘는다고 보고 하였습니다. 조동진 박사는 사무엘 모펫(Samuel A. Moffett)이 1910 에딘버러 선교 대회에서 한 보고를 인용하면서 한국은 이미 한국인에 복음을 스스로 자립 선교를 한 점을 지적하고 한국 교회가 한반도 뿐 아니라 다이아스포 중국과 연해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자립 선교를 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해외 한인교회와 디아스포라
보편적으로 한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교회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2017년 크리스챤 투데이의 기사에 따르면 해외 한인교회는 6천교회를 넘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미국의 한인 교회들의 삼분의 1일이 캘리포니아에 있으며 또한 캘리포니아 한인 교회의 삼분의 1일이 LA 카운티에 몰려 있습니다. 미국의 한인교회는 4,421교회이며, 그 외의 국가에 있는 해외 한인교회는 1,630교회라고 합니다. 미국 다음으로는 캐나다(482개), 일본(231개), 오스트레일리아(205개), 독일(138개), 영국(72개), 브라질(60개), 알젠틴(52개), 뉴질랜드(37개), 멕시코(27개), 프랑스(25개) 순입니다. 한인 390명 당 한 개의 교회가 있는 셈입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미주한인총인구 172만2840명을 세대별로 보면 1세들은 45.7%, 1.5세는 14.8%, 2세는 39.6%로 인구센서스 자료가 밝히고 있다고 합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은 해외 디아스포라 인구 비율 가운데 미주 한인의 경우 70% 이상이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주 뿐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한민족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세워졌고, 한글교육 그리고 민족교육과 더불어 신앙교육을 통해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구심점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한민족 디아스포라 비교
• 초대교회 당시의 공용어인 코이네 헬라어 사용(Use of Lingua Koine)하였고 대부분 이중 언어 구사자입니다. 우리도 해외에서 지금까지 한국어 및 현지어 구사하고 있습니다.
• 다문화와 이중 문화 상황(Multi-cultural, cross-cultural and bi-cultural Context) 속에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정체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 우리도 다문화 또는 이중문화속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기도 공동체로 이방 선교의 도구가 됨-새벽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선교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 유대인 공동체에 구축된 비즈니스 네트워크처럼 한국 기업의 세계 진출과 한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 초대교회의 복음지도(Gospel Roadmap)조성한 것처럼 한국인 디아스포라도 21세기형 세계선교 지도 구성하고 있습니다.
• 회당(Synagogue) 중심 공동체라면 한민족 디아스포라는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교육, 한글교육, 신앙교육 진행하고 있습니다.
• 바울의 선교 첫번째는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인것처럼 한민족 디아스포라 선교 그리고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바울의 이방인 가운데 있는 경건한 무리들이 복음전도(God Fearer among gentiles)를 감당한 것처럼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있는 지역의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불교인, 모슬렘과 힌두교도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복음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라면 남한과 북한 그리고 북간도로부터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거주하고 있는 땅끝까지 선교입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한계를 통해 극복해야 할 한민족 디아스포라 선교
• 유대인들의 선민 의식, 율법 준수(할례,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 것등)를 통한 복음에 대한 제약이 있습니다. 한민족 우월적 민족주의, 종족주의, 지나친 선민의식, 한국적 식민주의와 한국적인(?) 기독교만 전파하기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한 분파로서의 기독교였다면 세계에 있는 지구촌 기독교와 협력하지 않고 우리만의 기독교, 그리고 교단주의만을 지향하는 내 방식의 기독교는 재고되어야 합니다.
• 유대적 기독교에서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돋움 한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한의 교회가 발돋음 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유럽, 중국, 일본과 구소련의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게 될 재교육과 폭넓은 신앙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 바울과 바나바의 예루살렘 방문을 통해 이방인 선교의 눈을 뜨게 한 것처럼 본국 교회를 깨우는 세계화의 주역인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되어야 합니다.
• 초대교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가 감당했던 선교 사역과 같이 디아스포라 기독인을 통해 선교의 도전, 동원, 훈련 그리고 그 지역과 열방까지 선교를 감당해야 합니다.
• 사도바울과 이방인 선교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처럼 디아스포라 선교는 기본적으로 비즈니스와 종교 공동체(회당) 그리고 기도와 전도를 하나로 엮었던 총체적 선교입니다
초대교회 유대인 공동체와 한민족 공동체가 갖고 있는 중요 이슈
• 흩어진 유대인들의 한 국가 공동체 의식은 이스라엘입니다. 세 개의 코리아, 남한, 북한 그리고 디아스포라 Korea가 갖고 있는 것은 원코리아(One Korea)인 민족의식입니다.
• 흩어짐, 해외정착, 망명, 해외유랑, 귀환과 재정착이 유대인 디아스포라 패턴인 것처럼 해외이주로부터 귀환과 정착까지 같은 패턴의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지금 이스라엘의 알리야 운동처럼 일어나고 있는 귀환 문제는 우리에게는 탈북자들의 정착과 해외 디아스포라 한민족의 본국 귀화의 문제입니다.
• 광범위한 지구촌 유대인 공동체 – 한민족 공동체 또는 한민족 디아스포라 네트워크 구성은 정영훈 연구조사 제안에 따르면 네트워크 구성일 경우 재외동포와의 협조망 구축이 관건입니다. 그는 민족적 동질성에 토대하여 한민족의 결속을 촉구하는 실천운동이 바로 한민족 공동체 건설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21세기 한민족 디아스포라 선교 네트워크의 융성을 바라보며
오순절 성령 강림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행 1-2장) 이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행 8:1-4), 헬라인에게(행 11:19-26)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방인에게도 복음 전파가 가능했던 것은 유대 문화와 헬라 문화의 두 사이에서 문화적, 언어적, 지역적 그리고 인종적 차이를 극복한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디아스포라의 존재가 없었다면 세계 복음화는 불가능 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 의식, 율법 준수(할례,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 것등)를 통한 이방인의 회당에 들어가는 맹세로부터의 제약, 그리고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한 분파로서의 기독교 밖에 될 수 없었던 유대적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돋움 한 것 역시 문화와 인종을 뛰어 넘어 이방인이나 유대인 모두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통해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증거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선교의 완성과 추수 사역도 흩어진 크리스쳔들을 통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복음 전파가 디아스포라를 통해 이루어졌듯이 이제 마지막 추수 사역도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을 통해 마무리될 수 있음을 깨닫고 디아스포라 선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선교의 중심축을 감당하는 세력으로 부상하는 디아스포라 기독인을 통해 선교의 도전, 동원, 훈련 그리고 그 지역과 열방까지 선교를 감당하도록 연합하고 독려할 황금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한인 디아스포라 사역을 위한 제언
198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본격적인 한국교회의 해외 선교를 평가할 때에 많은 열매도 있었지만 2000년 가까이 세계 선교를 주도했던 서구 교회가 받았던 많은 비판과 비난 그리고 오해와 저항을 한국 선교사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한반도 중심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피선교지 주민과 그곳의 정서와 교류 그리고 현지화가 되지 못한 결과물로 인해 빚어진 불가피한 상황이란 점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세기 세계선교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한반도 중심 선교 (남한 교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 교회 중심 선교와 한국적 정서와 신학 그리고 문화를 강조하는 민족주의 성향의 선교)를 탈피하여 각 나라와 지역 정서에 부합하면서도 현지 선교를 현지인에게 가장 적합하게 선교하도록 하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 도전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1.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의 일원으로서 한국교회에 준 아름다운 신앙의 영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안에서 각 디아스포라 성도와 교회도 이러한 아름답고 순수한 신앙의 DNA 와 영성을 디아스포라 네트워크와 공동체를 통해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교회가 새벽기도의 영성, 복음전도의 열정, 인적, 재정적 선교사역에 대한 후원과 참여 그리고 현지 지역을 위한 적극적 사회참여와 복음전도가 그 실례가 될 것이다.
2. 지금까지의 지극히 한국적인 선교는 이전의 서구식민지 선교가 크나큰 비난에 봉착한 것처럼 한국적 식민지 선교라는 저항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럼으로 디아스포라 교회는 한국 교회의 세계화를 돕고, 한국 교회는 디아스포라를 통해 각 지역의 상황에 더욱 더 맞는 선교를 하도록 디아스포라를 통한Glocalization 즉 지구촌지역화를 감당해야 한다.
3. 한국교회와 현지 지역의 Marketplace leader, 그리고 제자화와 훈련을 통해 디아스포라 2세 지도자 배출 뿐 아니라 현지 지도자 배풀에 집중해야 한다.
4. 필요한 경우에 따라 한국교회, 디아스포라 지도자와 현지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역동적 교회의 모습들을 참관하고 중단기 기간동안 서로를 이해하고 도전을 받는 교류의 기회를 갖는다.
5. 디아스포라 지도자는 현지에서 가능성 있는 현지 지도자를 발굴하여 앞으로 자국민 선교와 복음전도를 힘있게 하도록 도와 주고 한국 교회를 이들을 또한 더욱 더 지속적이고 성장가능한 사역을 하도록 교육과 훈련 자료 그리고 인적 영적 재원을 협력한다.
6. 이전에 한국 선교의 모습속에 비춰졌던 한국의 단일문화(Homogenous culture)적 요소인 가부장적, 권위주의적 그리고 교단주의적 선교를 가급적 지양하고 디아스포라를 통해 현지인 교회와 선교단체 그리고 그리고 지도자들과 동반자적 협력관계를 구축 발전시킨다.
7. 디아스포라 교회와 지도자들의 장점들을 모국교회 방문을 통해 소개하고 도입하여 한국교회가 역동성을 갖게 하고 또한 역으로 방문한 디아스포라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의 역독성을 현지화하여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감당한다.
8. 한국교회는 언어, 문화, 그리고 역사 등 디아스포라 2세대가 필요한 교육자료와 인적 자원을 현지 교회나 선교단체를 통한 한글학교나 문화원 사역을 협력하며 또한 현지어로 번역하여 선교사역의 내용을 더욱 더 풍부하게 하며 다음 세대 교육 사역에 큰 기여를 해야 한다.
9. 이제 세계선교는 한 분야만을 요구하는 선교가 아니다. 목회자와 평신도 뿐 아니라 각 세대와 지역을 포괄하며 교육, 행정, 정치, 문화, 사회, 의료, 군사, 무역과 비즈니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요청하는 통합선교( integral mission)가 지금 필요하다. 그럼으로 한국교회의 다양한 선교채널과 디아스포라 각 영역에서 지금 세계 교회 가운데 일고 있는 복음전도가 교회로부터 비즈니스 영역에까지 미치도록 다양한 선교영역의 협력이 필요하다.
10. 한국교회와 세계의 많은 선교협의화와 유관기관들 그리고 디아스포라 교회 단체들의 유기적 협력이 요청된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역사적으로 바라 본 디아스포라의 모습은 다양하나 본질은 복음 전도에 있습니다. 이제 이미 땅끝에 나가 있는 Korean 디아스포라를 통해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디아스포라 선교 자원과 동원은 인류를 그리스도 예수께 인도하기 위한 가장 큰 선교적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아스포라 사역의 영역은 이제 한 두가지가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개척, 문화 사역, 선교 네트워크, 2세 사역, 현지인 목회, 비즈니스 선교 등 매우 다양합니다. 한인 목회의 경우 한인 대상으로 다인종 사역으로 나가는 경우 그 지역이 선교지가 됩니다. 디아스포라를 동원하기 위해서 다양한 부분의 전문 영역과 일꾼 세우기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현지에서의 직업을 통한 선교 사역 그리고 제자 양육을 통한 사역자 양성 등입니다. 한 사람이 세속 사회에서 일하는 직업의 영역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사역자로서의 역할에서 우리는 상황화의 필요성을 봅니다. 2010년 제3차 로잔 대회의 가장 주목 받는 분야는 역시 디아스포라 선교였습니다. 2차 로잔대회에서는 미전도 종족에 대한 집중 조명을 받은 바와 같이 3차 대회에서는 물론 많은 영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 선교는 모든 이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언어, 문화, 재정, 사회 진출에 있어서 선교 사역을 바로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디아스포라는 직업 선교, 자비량 선교, 비즈니스 선교와 문화 선교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외국인에게 매우 불편할 수 밖에 없는 비자도 필요없습니다. 이중 문화(biculture) 구조에서 그 나라와 모국 문화(부모 세대를 통해)를 두루 섭렵하고 있기에 양쪽 문화의 교량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Minority 에 해당하기에 소수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인 특유의 열정으로 대부분의 디아스포라는 현지에서 교육과 사업 그리고 문화적인 부분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2023년 벽두에 서울의 한 구석에서 우리 민족과 디아스포라를 생각하며
김종필 올립니다.
◙ Now&Here©ucdigiN(유크digital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