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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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저널=정이신목사] 희망의 인문학 » 얼 쇼리스(Earl Shorris) 지음, 고병현ㆍ이병곤ㆍ임정아 옮김/ 출판사: 이매진 »
인문학이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줄까요? 분명히 그럴 것…
인문학은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서, 제대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외부의 어떤 ‘무력적인 힘’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쳐올 때 무조건 반응하기보다는 심사숙고해서 잘 대처해 나가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공부입니다. 저는 인문학이 우리가 ‘정치적’이 되려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적’이라고 말할 때는 단지 선거에서 투표하는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테네의 정치가였던 페리클레스는 ‘정치’를 ‘가족에서부터 이웃, 더 나아가 지역과 국가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했습니다. – [책 내용 중에서]
저자는 미국에서 소외계층을 위한 정규 대학 교육 수준의 인문학 교육과정인 클레멘트 코스를 창립했는데, 이걸 창립한 과정, 운영 철학 등을 책에 상세히 소개했습니다. 저자가 이런 내용을 상세히 소개한 건, 이런 프로그램을 다른 국가나 지역에서도 누군가가 시행해 주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클레멘트 코스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25년의 형기 중 교도소에서 8년 이상 보내고 있었던 여성 재소자 비니스 워커가 저자에게 했던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the moral life of downtown: 책을 번역한 사람들이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해서 이 구절을 ‘도덕적인 삶’이 아니라 ‘정신적인 삶’으로 번역했습니다)]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인 삶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 … 길거리에 방치된 그 애들에게 도덕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거짓말과 고백, 범죄, 임신이 다반사며 언제나 외로움이 붙어 다녔던 클레멘트 코스 수강생들에게 저자가 그들의 가능성을 역설하며, 그의 표현대로 ‘희망을 팔았던’ 방법은 소크라테스가 썼던 ‘문답법(산파술ㆍmaieutikē)’입니다. 철학ㆍ문학ㆍ예술ㆍ역사ㆍ논리학 등 여러 학문 분야를 통합한 형태로 대학 수준의 강의를 진행하면서도, 저자는 교수 방법으로 줄기차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썼던 방법을 썼습니다. 이게 저자가 발견한 미국의 가난한 사람을 깨우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길의 입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난에서 해방해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런 탈출구는 진작부터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찰적 사고를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여전히 이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습니다.
“인문학이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줄까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단,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삶이 훨씬 풍요로워진다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부자로 말입니다.”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문학의 필요성을 이렇게 설파한 저자의 말에 동의합니다. 저 역시 대안학교에서 대표간사ㆍ선생으로 있으면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사람이고, 지금껏 북향민과 소외계층 청소년ㆍ청년에게 인문학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자와 달리 저는 인문학을 ‘가르치지 않고, 알려’만 줍니다. 강산이 변한다는 그림자를 만든 시간 동안 대안학교를 운영해 보니, 가르치는 건 제 몫이 아니라 대안학교를 찾아온 재생(齋生)의 몫이었습니다. 재생이 스스로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지, 선생인 제가 그들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대안학교의 재생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냥 이들에게 인문학을 알려줍니다.
제가 대안학교에서 인문학을 알려주면서 알게 된, ‘인문학을 배우고(學), 익히기(習)’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를 위해 태어났다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회의 무력(武力)’은 이걸 늘 방해합니다(저자는 책에서 ‘force(무력)’와 ‘power(힘)’를 서로 다른 의미로 썼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미국에서 빈곤의 황금시대를 연 무력은 추상적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력은 의미를 파악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타동사처럼 목적어를 반드시 요구합니다. 이런 무력과는 협상이 안 되는데, 이는 무력이 그의 힘을 행사하는 대상과 합의를 추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문학을 배우고 익혀 힘을 기른 후, 협상을 거부한 무력에 대항해야 합니다.
이런 걸 가능하게 해주는 ‘살아 있는 인문학’은 경이로운 가능성을 가진 존재인데, 이걸로 무장한 사람들이 가정에서부터 ‘우리의 작은 민주주의’를 만듭니다. 예를 들어 가족 구성원들이 ‘빈민을 위한 정의의 도구’인 인문학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행운을 담보해주는 사람’이란 걸 발견한 순간부터, 빈곤이 내뿜는 가족을 둘러싼 무력의 포위망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가족은 서로 다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난 이들에게는 앞이 꽉 막힌 동굴이 아니라, 멀찍이 보이더라도 해결책이 있는 터널이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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