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그리고 열쇠와 자물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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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칼럼=Dr. Elijah Kim] 독일 통일 그리고 열쇠와 자물쇠 » 2023/02/12 »
우리가 서독과 서독 교회로부터 배우는 지혜, 우리가 적용해야…
우리가 서독과 서독 교회로부터 배우는 지혜를 통해 우리가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한 사이에 아무리 군사적, 정치적, 사상적 적대 관계가 일어난다 해도 그러한 적대행위를 일삼는 북한의 기득권 층과 주민 대다수를 하나로 묶어서 대응하지 않고 고통받는 대다수의 북한 주민들을 향한 남한 교회의 섬김은 지속되어야 …
들어가는 말: 통일의 열쇠와 자물쇠
지구상에서 같은 민족, 같은 뿌리, 같은 역사를 공유하다가 분단이 되고, 다시 통일을 이룬 나라들이 있고 이와 반대로 가는 나라도 있습니다. 독일과 예멘은 분단을 겪었고 이어서 통일을 이루었지만, 독일은 통일 후 더욱 더 부강한 나라가 되었고 예멘은 지금 내전을 겪고 있습니다. 수단은 한 나라였으나 북쪽은 이슬람 국가인 북수단으로, 남쪽은 기독교 국가인 남수단으로 나라가 나뉘었습니다.
통일은 절로 이루어진 적이 없으며 위정자와 국가 그리고 국민들이 통합으로 갈 수 있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함으로 통일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저는 이를 통일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는 통일의 문, 이는 전적으로 당사자 국가 지도자들과 국민들과 교회들의 책무 아래 놓여 있습니다. 통일로 가는 문에는 열 수 있는 열쇠도 있지만, 도리어 반대로 통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물쇠도 있습니다. 통일의 문을 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가는 열쇠를 사용하지 않고 도리어 자물쇠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으로 분단이 고착화되고 정국이 경색되며 대결과 대치 그리고 비난만이 남아 통일의 문은 더욱 더 굳게 닫히고 통일의 문을 여는 열쇠의 기회는 갈수록 줄어 들기도 합니다. 지금의 한반도가 그러하다고 봅니다.
독일 통일로 가는 중요한 연대기적 사건들
독일 통일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있으며 우리가 고려해야 할 남북한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동서독 사이에 있는 상호 다른 국가체제와 이념 대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독 정부는 서독 정부 나름대로, 그리고 서독교회는 서독교회 나름대로 차근 차근 통일의 기초를 닦아 놓음으로 실제적인 통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열쇠를 사용함으로 통일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 1945년 2월 4일 얄타회담. 전후 독일은 4개 구역으로 분할되기로 결정
• 1945년 5월 8일 – 나치 독일 항복, 포츠담 협약, 국가 분할
• 1948/9 베를린 봉쇄, 생필품을 비행기로 공수
• 1949년 5월 23일 – 서독, 독일 연방 공화국(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FRG)출범
• 1949년 10월 7일 – 동독, 독일 민주 공화국(The German Democratic Republic DDR) 출범
• 1953년 6월 17일 – 동독, 소련군이 노동자 봉기를 진압
• 1955년 9월 서독과 소련간 정식 국교 수립이래의 서독외교정책의 기본원칙
• 1956년 1월 18일 – 동독군이 창설되고 곧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
• 1961년 8월 13일 – 베를린 장벽이 세워 짐
• 1969-1974 빌리 브란트 서독 연방 수상 재임 그리고 동방 정책의 추진
• 1970년 3월 19일 – 동독과 서독 지도자가 처음으로 만남
• 1971년 5월 3일 – 에리히 호네커가 월터 울브리히트 다음 공산당 서기장 부임
• 1972년 12월 21일 – 동독과 서독 사이에 기본 조약이 체결
• 1975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의정서 체결CSCE(Commission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유럽안보협력회:1995년 OSCE (유럽안보협력기구)로 개칭
• 1987년 9월 7일 – 호네커의 서독 방문
• 1988년 1월 17일 – 공식 행진에서 시위가 반대파에 대한 대규모 탄압
• 1989년 5월 7일 – 공산주의자와 동맹국은 거의 99퍼센트에 이르렀습니다.
• 1989년 7월/8월 – 이민 희망자들이 출국 서류를 찾기 위해 동유럽 전역의 서독 대사관을 가득 채움
• 1989년 9월 4일 라이프치히에서 동독 반대 시위
• 1989년 9월 10일 –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국경을 개방하여 수천 명의 동독인이 서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함
• 1989년 10월 18일 – 라이프치히 시에서의 대규모 시위와 계속되는 탈출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소요가 발생한 후 Honecker는 사임
• 1989년 12월 22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림
• 1989년 11월 9일 – 베를린 장벽 무너짐
• 1990년 2월 13일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 두 독일은 “2 더하기 4 계획”에 동의
• 1990년 3월 18일 – 동독 최초의 자유 민주 선거
• 1990년 5월 18일 동독과 서독이 본에서 서명한 단일 독일 경제 조약
• 1990년 7월 1일 – 동독과 서독은 경제를 통합하고 동독은 도이치마르크를 통화로 채택
• 1990년 9월 12일 – 2차 세계 대전 동맹국과 2개 독일 국가가 미래 통일 독일의 주권을 회복하는 조약에 서명
• 1990년 10월 3일 – 동독이 서독과 통합 됨
서독과 동독의 통일의 일련 과정을 지켜 보면서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우리민족에게도 이러한 조치들이 가능하며 실제적 통일을 일구어 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 통일부의 1993년 제2차 통일 대비 정책 연구 결과 보고서에 참여한 드미지에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통일은 일방의 의지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역사 과정에서 온 상황의 산물”이라고 했습니다.
동서독 분할과 한반도 분할은 미소 양진영으로 나뉘는 냉전의 산물이었습니다. 냉전을 완화 시키고 화해와 협력을 도출시키는 데탕트의 노력은 역사 연대기를 놓고 보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일관되고 일치된 조치와 협력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냉전의 문을 닫고 화해의 문을 연 것은 동방 정책 추진, 하나의 일치된 창구로 도운 서독교회 연합체인 디아코니아 재단, 동서독 국민들 사이에 하나됨을 천명한 기본조약, 그리고 양국민이 한 형제임을 확인해 준 “특별한 유대관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독일 통일을 일구어 내기까지 가장 중요한 전환점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있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 독일은 동서독으로 나뉘어 분할 통치
1949년부터는 동서 양쪽에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 분단이 공식화
1950년대 초에는 한때 중립 통일안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무산됨
60년대부터는 국제적 냉전 기류에 편승한 서독의 이른바 할슈타인 원칙에 따라 대결 국면이 조성되면서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 짐
1969년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 을 추진하여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함
1972년대부터 1987년까지 약 15년간 34차례의 협상을 통해 과학 기술, 문화, 환경 등에 관한 협력체계를 구축함
동서독간 민간인의 교류가 이루어짐
1982년 슈미트 서독 총리의 동독 방문
1987년에는 호네커 동독 공산당서기장이 서독을 방문함으로써 통일에 일대 전기가 마련됨
통일 전후의 독일의 자물쇠를 열쇠로 바꾸었던 일련의 사항들
다시 말하지만 독일 통일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독일 민족에 대한 일치된 정체성을 유지하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는 내독 정치 체재의 충돌이 있던 경우에서도 일관되게 동방정책을 추진하고, 양 국가 원수의 상호방문을 이끌어 냈으며 미국과 소련의 동의를 이끌어 냈고, 더불어 유럽 안보 협력회의에서 화해와 협력의 합의에 이르게 됩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이 이토록 일치된 적이 없다고 할 정도 서독 정부, 지도자, 국민 그리고 교회의 노력은 눈물 겨운 행보였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통일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었던 다음 사항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독일의 통일에 가장 큰 영향: 1985년 고르바초프의 개방과 개혁정책 추진
1989년 폴란드, 헝가리, 체코와 같은 동구권 국가들의 민주화 혁명
1989년 동독도 같은 행보를 걷게 되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
1990년 4월 동독 첫 자유 선거가 실시로 자유 민주주의 데 메지에르 정권(Lothar de Maiziere) 탄생
서독이 막강한 경제력을 내세워 소련에 경제협력을 약속
주변 국가에 외교 공세를 폄
1990년 초부터 독일 통일의 외부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동서 양 당사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이른바 2+4 회담이 열림
1990년 8월 말 통일조약이 체결됨
1990년 9월에는 2+4 회담의 승인을 얻음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민족통일을 이룸
1990년 12월 2일 전독일 총선거로 콜 총리 통일정부 출범
통일 전 파산 지경에 이르렀던 동독 경제의 회복과 동서독 주민간의 경제적 격차 해소, 사회주의 체제에서 빚어졌던 재산권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함
서독의 통일정책: 내독정책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통일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에 해당하는 정책들을 일관되게 추진하는 일은 서독과 동독 역사에서 결코 쉽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에 통일이 명문화되어 있는 것처럼 서독도 통일이 기본법상의 명제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 통일의 단초가 된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가 있기까지 서독의 어느 정권도 그리고 어느 정당도 통일을 현실적인 정책목표로 설정하거나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세계 2차 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이 독일 통일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통일을 원하면 원할수록 통일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습니다. 빌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미묘하며 작은 차이점들이 끊임없이 내독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삐걱거리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서독의 양대 정당인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은 서로 명확히 다른 통일노선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미·보수정단인 기민당은 ‘자석이론(Magnet Theory)’에 따라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통일정책을 추진한 반면, 사회주의 정당인 사민당은 통일이 사실상 어렵다고 보고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herung)를 추구했습니다. 당연히 사민당의 기조는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증진함으로써 통일의 물꼬를 트는 데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1968년 이후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시행되는 과정 중 기민당과 사민당 정권이 뒤바뀌는 상황 속에서 역대 정부는 동방 정책의 일관성과 동독 주민에 대한 협력과 지원을 결코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좌우 정권이 교체되었어도 기본법 23조의 기본법 적용대상 지역에서 동독을 편입하였고 116조 국적조항에서 서독과 동독 국민에 대한 국적조항을 명시하여 내독 정책이 계속 추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입니다. 기민당 정권이든 사민당 정권이든 친미 그리고 친 서방 정책에는 변화가 없었으며 그 이후 계속 추진된 동방정책은 내독 교류 협력과 개방과 민주화를 이끌어 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 것입니다. 때론 중도 정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 Free Democratic Party FDP)이 때론 기민당 쪽으로 또 한편으로 사민당의 연정에 참여하였지만 동방정책 추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동방정책 추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겐셔리즘(Genscherism)도 바로 자민당 부총재인 한스 티트리히트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1974년 슈미트 정부 이후 독일 통일을 이루던 해까지 16년간 외무장관으로 재임함으로 변함없는 내독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각 정권의 통일정책(혹은 ‘내독정책’) 및 대동독 정책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1기 자물쇠 정책 시기
아데나워(Konrad Hermann Joseph Adenauer) 집권시기(1949-1963): 냉전 대결시기
이 시기는 힘의 우위를 이루어서 동독을 능가하는 것이 아데나워가 추진한 정책입니다.
서독 민주 정부의 초대 총리를 역임한 콘라드 아데나워는 냉전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통일은 미래의 목표일 수 있으나 시급한 정책목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번영과 성장을, 정치적으로는 승전국으로부터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서독 정부의 주권 회복을 그리고 외교적으로는 친서방 정책을 그리고 내독정책으로 동독을 따돌리는 압도적 우위이론인 자석이론을 견지했습니다. 여기의 핵심 전략이 바로 자물쇠 정책인 “할슈타인 원칙”으로 철저히 동독의 고립화를 유도하였으며 오더-나이세 국경선 승인을 거부하였습니다. 그가 추진한 자물쇠 정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서독의 주권 회복
• 서독의 민주화
• 자유와 반공 이데올로기
• 경제 재건 및 회복
• 서방과의 결속 강화
• 소련의 팽창저지
• 할슈타인 독트린
• 통일의 자석이론 추진(모든 면에서 서독 우위를 점유하기 위한 정책)
• 분단 고착화를 가져 옴
■ 제2기 자물쇠에서 열쇠로의 전환
에르하르트(Ludwig Wilhelm Erhard) 정부와 대연정시기(1963-1969): 변화의 과도기
아데나워의 뒤를 이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총리는 힘의 우위 정책을 이어 받았으나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맞게 내독관계와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으나 연 이은 경제정책 실패로 빛을 보질 못했습니다. 냉전보다는 화해의 무드 즉 데탕트가 시작되면서 할슈타인 원칙을 계속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기민당 출신의 키징거 총리는 빌리 브란트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하고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오더-나이세 국경선을 인정함으로 사실상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1969년 10월 사민당이 대연정을 파기하고 자민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함으로써 기민당은 건국 후 처음으로 사민당에 정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키징거 총리 때에 인정하게 됨
• 사실상 할슈타인 원칙 포기
• 사실상 동독 국가 인정
• 1961년 베를린 위기를 계기로 아데나워 방식의 포기 검토
■ 통일 열쇠의 완성과 개화 시기
제3기 브란트(Willy Brandt) 집권시기 (1969-1974): 동서독 정상화와 긴장완화
베를린 시장을 역임했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장벽으로 인한 독일 민족의 비극을 몸소 체험했으나 그 누구보다도 반공주의자였던 브란트 총리는 독일 통일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지도자였다는 점에는 어떤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지도자인 브란트는 폴란드의 유대인 게토에 있는 묘지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 사람으로 세간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접근을 통한 변화’를 표방하면서 동독 뿐 아니라 동유럽 공산권과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몰색 하였습니다. 그는 동독과는 ‘1민족 2국가’를 표방하면서 대등한 입장에서 상호 회담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는 일관된 동방정책을 추진했는데 그것이 동서독 당사자간의 교류 협력 중대입니다. 사실상의 통일을 달성하기보다는 통일의 기초를 닦은 것입니다.
브란트의 대소 관계개선 노력과 동독에 대한 적극적 제의를 계기로 1970년 3월과 5월 2차에 걸쳐 동서독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그해 8월 이후 소련, 폴란드, 체코와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일련의 ‘동방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어서 1972년 12월 동독과 동서독 기본조약을 비롯한 각종 교류·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1973년 9월에는 동서독이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 모든 분야에서 동독과의 교류와 협력이 대폭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1974년 5월 브란트 총리의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의 스파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브란트 총리가 사임함으로써 사민당의 동방정책은 다시 한 번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 1970년 3월과 5월 2차에 걸쳐 동서독 정상회담이 개최
• 1970년 8월 이후 소련, 폴란드, 체코와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일련의 ‘동방조약’을 체결
• 1973년 9월에는 동서독이 유엔에 동시 가입
동독의 변화 유도
• 1974년 5월 브란트 총리의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의 스파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브란트 총리가 사임
• 사민당의 동방정책 지속의 위기
• 분단 변화에 대한 국제 환경 조성
■ 제4기 열쇠를 완성시기
헬무트 슈미트와 헬무트 콜 정부 시기(1974-1989): 분단의 평화적 관리시기
기민당 정부의 집권은 헬무트 슈미트 총리와 헬무트 콜 총리로 이어지는 두 시기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1기 헬무트 슈미트 실용주의 노선의 시기 (1974.5~1982.10)
제2기 헬무트 콜 통일실현 시기(1982.8~1998.10)
이 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추진되었습니다.
• 통일의 여건 조성 우선
• 내독 교류협력의 확대
• 콜 정부도 브란트 내독 정책의 기초 승계
• 1983-1984년 동독에 20억 마르크 차관 주선
제 1기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총리의 실용주의 노선(1974.5~1982.10)
독일 연방 공화국의 5대 총리인 헬무트 슈미트는 빌 브란트의 간첩 사건으로 말미암아 총리직을 승계한 사람입니다. 그는 빌리 브란트 집권시인 1974년 재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연정을 통해 총리직을 승계했으나 여전히 사민당의 당 총재는 빌리 브란트였습니다. 그는 친서방 정책, 빌 브란트의 동방정책 계승을 추진했지만 친 러시아 행보도 진행함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양다리 외교를 추진합니다. 이 시기에 국제 외교에 가장 큰 변화를 바람을 일으킨 1975년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 CSCE) 정상회담이 개최되어서 서방 진영의 결속은 강화된 반면 친 소련 경향을 보인 그의 행보는 견제를 받게 됩니다.
• 1975년 헬싱키에서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 CSCE)
• 1979년 12월 12일 NATO가 소련 중거리 핵미사일의 유럽배치에 대한 “NATO의 이중결정”
• 1979년 12월 27일에는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
• 동·서간의 긴장이 대폭 고조
• 1977년 10월 13일 루프트한자 181편 적군파(Rote Armee Fraktion, RAF) 납치 사건
• 1978년 제 2차 석유 파동 (제 1차 석유 파동에 이어)
• 마이너스 경제 성장 이후 경제 성장을 이룸
• 1977년 소말리아 테러리스트 소탕 작전
제 2 기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의 통일실현 시기(1982.8~1998.10)
헬무트 콜 총리는 1982년부터 1990년 통일에 이르는 기간동안 서독 총리로서 그리고 통일 이후인 1990년부터 1998년까지는 동서독 통일로 구성된 연방 정부 총리로 통일 총리의 역할을 수행한 인물입니다. 그는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과의 불화를 계기로 연정 파트너가 기민당으로 바뀜에 따라 13년 만에 다시금 집권하게 되면서 총리 재임하게 됩니다. 그는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정반대 정책인 아데나워 자석 이론으로 돌아 옵니다. 더불어 1985년 소련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에 힘입어 동서독 화해와 동유럽 민주화에 편승한 관계 개선이 진력합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통일 독일을 이르는 역사적 사건들을 진두지휘한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 1983년과 1984년 두 번에 걸쳐 동독에 19억 5천만 마르크의 현금차관을 제공
• 1984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과의 회담으로 통일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를 받음
• 1987년에는 동독 호네커 서기장의 서독방문
•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붕괴
• 1989년 12월 46만 여명의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탈출 시 동독 탈출자를 전원 수용/ 동독 공산정권의‘국가연합 통일방안’과 경제원조 요구를 단호히 거부
• 1990년 10월 3일 통일 완성 및 통일된 연방정부 출범
동서독 국민들의 일치된 통일의 열망
동서독 국민들이 통일을 열망한 만큼 우리 민족도 통일을 향한 염원은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서독 국민들이 실제로 겪었던 이념의 차이와 장벽 그리고 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치된 노력을 기울인 만큼 우리도 그러한 노력을 했느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못했다!”라 일 것입니다. 남북 문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통일방안과 정책이 뒤집어지고도 하고 부정당했고, 첨예한 북한의 위협은 남한 정권 당사자들의 투표율에 영향을 끼칠 만큼 북한 문제를 민족공동체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이념대결과 정권 불이익에 여부에 따라 다루었기에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남북대치가 가증될 수록 이익이 되는 그룹은 누구이고 과연 누가 피해자가 되는가?
여기에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가 야 할 부분이 남한 뿐 아니라 북한도 한번도 무력통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남한의 부요와 북한의 빈곤이 단순히 경제적 수치로만 대비되는 것이 아닌 것은 동일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동독과 동독 국민을 도왔던 서독 정부와 서독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우리가 배우고 또한 우리 형편에 맞게 관용과 단호함 그리고 십자가와 지혜로움을 동시에 갖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동서독의 경우는 통일을 위한 오메가 포인트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통일의 시점이 지속적인 교류와 섬김 그리고 동족애의 연장선상 이었을 것 뿐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반통일주의를, 다른 이는 통일지상주의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통일을 원하든 원치 않든 굶주리고 있는 북한 주민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통일을 이룬 독일의 경우를 살펴 보면 살펴 볼 수록 2023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민족이 그리고 한국 정부와 교회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를 돌아 보게 합니다.
그 주요한 점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념이나 정파가 걸린 문제가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가진 같은 한민족으로서 한반도의 미래와 통일 문제를 거론하고 준비하는 일
주변 강대국의 실리에 따라 우리민족의 장래를 결정짓지 말고 무엇이 한민족의 장래에 유익한 일인지를 살펴보고 결정짓는 일
미국, 일본, 중국 그리고 러시아도 온전히 자국의 핵심이익의 관점에서 한반도를 바로 보기에 우리 민족의 안전과 장래를 위해 어떤 외교 정책이 중장기적으로 안정적인지를 바라보는 일
서독교회나 동독교회가 하루 아침에 서로 돕고 신뢰하는 관계가 되지 않은 것처럼 비록 단기적으로 그러한 신뢰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북한 주민과 북한 선교를 위해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아 미래를 준비하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함
고난 받는 동독 국민
서독 교회는 동독 교회와 주민들을 고난 받는 형제로 인식했다는 점입니다. 때때로 남북한 관계가 경색되면 북한은 당장이라도 무력도발할 것처럼 무력 시위를 벌이고 어린아이들이 듣기에도 낯뜨거운 섬뜩한 적대적이며 저주에 가까운 언어들을 사용해서 언론에 유포하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이때 남한에 있는 국민들 뿐 아니라 크리스챤 조차도 북한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금새 마음이 식어버리고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내독관계 즉 서독과 동독 사이에서 동독에 대한 서독 정부와 서독 교회가 취한 행동을 보면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지혜를 줍니다. 국가 대 국가 간에 일어나는 행위에 대하여 교회는 일체 상관하지 않고 오직 동독에 있는 사람들을 “고난 받는 형제”로 인식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남한 교회도 북한과의 관계에서 세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해서 대처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첫째,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소위 백두혈통과 그 일가
둘째, 김일성 일가 우상화 작업에 협조하고 주체사상 그리고 노동당 및 북한 사회의 심층 권력을 쥐고 충성하는 엘리트 그룹
셋째, 어떠한 권력도 없이 오직 맹종과 충성과 노동만을 요구 받는 “고통 받는” 대부분의 북한 주민
위의 세가지 사항에서 김일성 집단에 대한 대응 때문에 “고난 받는’ 북한 주민에 대한 섬김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점이 서독 교회가 정부의 정책에 상관없이 일관되게 취한 섬김의 모습이었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서독과 서독 교회로부터 배우는 지혜를 통해 우리가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한 사이에 아무리 군사적, 정치적, 사상적 적대 관계가 일어난다 해도 그러한 적대행위를 일삼는 북한의 기득권 층과 주민 대다수를 하나로 묶어서 대응하지 않고 고통받는 대다수의 북한 주민들을 향한 남한 교회의 섬김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유아 사망률이 지구상 최고로 높고, 산모의 영양상태가 지구촌 전체에서 최악이며, 결핵과 기타 전염병 방지와 같은 인도주의적 섬김과 소나무 재선충병 확산과 같은 자연 보호를 위해서는 이념과 정책을 막론하고 서로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김일성 집단이 악하다고 해서 북한 주민까지 고통받는 기간을 방관하지 말고 동족애와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의 정신으로 저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 올 수 있도록 복음 통일의 의지와 기도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탈북민들을 문화의 이질감 해소와 다가오는 북한 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선교사로 품는 아량이 또한 필요합니다. 정치적 특성상 여야가 바뀌고 통일 기조의 작은 부분들은 바뀔 수 있지만 독일 지도자들이 보여 준 화해와 협력 그리고 주변국을 설득해 나가는 인내와 겸손을 또한 배워야 합니다. 지도자의 공과는 후대에 반드시 평가를 받겠지만 지도자의 정책적 추진으로 빚어지는 희생자들이 남한 국민 뿐 아니라 북한 주민이 되지 않도록 성경적인 사랑과 구원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역사가 이 땅에 새롭게 일어나기를 충심으로 기도합니다.
미국 모처에서 밤을 세며 기도하던 중 김종필 올립니다.
PS. 지금까지 한국과 관련된 저의 글을 쓰면서 이제 거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저의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제가 다루었던 한국 관련 주제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시각들
‘Korea’ 나의 조국 대한민국
남북 교회에 대한 재고
세개의 Korea, 그리고 하나님의 눈
디아스포라( διασπορά)코리아와 Tephutzot(תפוצות)
동서독 통일의 교훈과 동서독 교회의 역할
동서독 통일을 통해 본 한민족 공동체론과 교훈
남북 분단의 성경적 의미와 해결방안
남북 분단 70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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