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지혜의 눈으로 자연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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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저널=정이신 목사] 44. 지혜의 눈으로 자연을 보면 »
땅ㆍ하늘ㆍ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창조주를 기억해야 인간의 시야가 좁아지지 않습니다. <3:21>은 이것을 “건전한 지혜”라고 했는데, 이 말은 우리말 번역과 달리 한 단어(히브리어: 투쉬야)입니다. 또 이 단어는 ‘영구적인 성공’이란 뜻도 있습니다. 사람이 건전한 지혜를 지녀야 영구적으로 성공할 수 있어…
어떤 사람의 집에 초대돼 갔는데, 그 집을 치장한 호화로운 인테리어에만 관심을 두고, 그 집에 사는 주인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면 이는 엄청난 실례입니다. 초대한 사람은 그 집에 사는 집주인입니다. 따라서 초대된 집에서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않으면 그 집을 보는 시야가 좁아집니다.
마찬가지로 지구촌에 살고 있으면서 지구촌의 비경이 뿜어내는 아름다움만 칭송하고 그 비경을 만드신 창조주를 기억하지 않으면 똑같은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이런 지혜와 분별력이 없으면 시야가 좁아지기에 이 둘을 꼭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3:19∼20>에서 말한 땅ㆍ하늘ㆍ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창조주를 기억해야 인간의 시야가 좁아지지 않습니다. <3:21>은 이것을 “건전한 지혜”라고 했는데, 이 말은 우리말 번역과 달리 한 단어(히브리어: 투쉬야)입니다. 또 이 단어는 ‘영구적인 성공’이란 뜻도 있습니다. 사람이 건전한 지혜를 지녀야 영구적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기에 인간 사회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부터 독립된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꾸 이것을 부정합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ㆍ복과 전혀 상관없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낯선 곳을 여행하는데 미리 지도도 한 번 보지 않고 그곳을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가전제품을 샀는데 사용설명서도 읽지 않고 110V용 제품을 220V에 꽂으면 고장이 납니다. ‘우리가 사는 해 아래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ㆍ복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라고 말하는 게 이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ㆍ복이 세상에 개입하는 경로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어항에 있는 물고기는 아무리 부지런히 돌아다녀도 누군가가 그 어항에 먹이를 주지 않으면 돌아다니는 게 아무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항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넓은 우주 중에서 은하계, 은하계 중에서도 태양계, 태양계 중에서 유일하게 지구에서만 살 수 있는 인간이 어항 속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면 누가 어항 속에서 사는 존재입니까?
생각으로는 온 우주를 떠돌며 산다고 해도 몸은 이 땅 위에 있기에 인간은 어항 속의 물고기와 비슷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물고기가 사는 어항을 관리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어항 속의 물고기는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죽을 것입니다. 물고기가 알든지 알지 못하든지 위에서 먹이를 주고 관리해 주는 인간의 손길이 있기에 어항 속에서 물고기가 그나마 자유롭게 삽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부정한다고 해서 주님의 은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게 지구를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에 인간이 지구에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의 복을 붙잡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복을 붙잡아야 합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한 국가의 경제가 안 좋아 일거리가 없으면 취업이 힘들고, 어떤 나라의 경기가 좋다고 해도 세계 경제가 어두워 주변국들과 교역이 힘들어지면 경기가 좋은 그 나라도 얼마 못 가서 전반적인 국가 상황이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이 세상 전체에 주시는 복을 보지 못하고 나에게 주어진 현실만으로 모든 것을 헤아리면 시야가 좁아져서 영혼에 생기가 생기지 않습니다(3:22). 하나님의 지혜를 얻지 못해 영혼(히브리어: 네페쉬)에 생기가 없으면, 주님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져 자폐증을 앓는 사람처럼 자기 세계에 갇혀 살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하는 게 왜 중요할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사람과 말이 통하는 짐승이 있습니다. 들판에 있는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사람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이 소를 잡아 오늘 밤에 자신들의 식탁에 올릴 수 있을까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그건 이미 소가 아니라 사람과 친구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100%는 아닐지라도 주님의 상대가 돼 하나님의 형상이 된 것입니다(창세기 1:26∼27). 하나님이 이런 존재에게, 주님과 늘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을 아무런 말씀도 없이 심판하실까요?
그래서 <3:3>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목에 거는 우아한 장식물이 됩니다(3:22).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산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주님에 준(準)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기도와 성경공부가 중요합니다.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고,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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