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景敎의 주요 인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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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김규동 박사] 당대 景敎의 주요 인물 비교 »
Comparison of Key People in the Jing-Jiao of the Tang Dynasty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신명기 31장 11~12절)
사도바울(Paul 10?~67?)의 선교여행은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소아시아의 여러 관문 도시의 문들을 활짝 열어 궁극적으로 유럽 전체 복음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때마침, 로마의 장교 고넬료(Cornelius)의 선한 행실은 여러 교회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다른 시대적 상황이지만, 당대 동방기독교의 전래 과정에도 시대마다 비슷한 인물들이 세워지고, 그들로 인하여 복음이 더욱 활기를 띠었다.
景敎碑文에 언급된 동방기독교 선교사는 80여 명 정도로, 그중에서 당대 景敎 부흥에 가장 헌신적이고 영향력 있었던 세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당대 景敎선교를 전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景敎의 발전역사와 더불어 선교사들의 활약상을 심도 있게 연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당시 景敎 선교사들은 당대 사회 전반에 걸쳐 자선과 구제, 종교, 문화, 의료 등에 상당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아래 세 명의 경건한 복음의 메신저들의 행적에 관하여는 동방기독교가 중국에까지 들어와 정착하기까지 어려운 고비를 수없이 겪었음에도, 이들의 극적인 역할이 컸다. 이들이야말로, 동방기독교의 동전 사명의 징검다리와도 같은 시대적 도구였다.
동방기독교의 복음 노정에는 늘 한계가 있었고, 이때마다 하나님의 구속적 열심으로 인하여 극적인 반전이 있었다. 그들은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구속적인 열심만이 선택된 특정인을 통하여 동방을 향한 복음의 길을 확장시켰다.
1. 알로펜(Alopen 阿羅本)
최초로 중국에 기독교 복음을 전달해 준 이들 은 다름 아닌 景敎徒들 이었다. 그중 가장 먼 저 정식적으로 중국 조정의 허락 하에 들어온 景敎 주교는 알로펜이다. 알로펜은 635년 당의 수도 장안에 들어왔고, 이에 당태종은 특별히 의장대까지 동원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보내어, 정식적인 국빈대접으로 직접 궁내까지 영접했다. 이것은 국가원수에게 준하는 특혜로 최고의 예의를 표한 것이다.
원래 알로펜은 일찍부터, 서역 변경에서 전도활동을 해왔고, 서역인들에게서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던 인물이었다. 이에 唐태종은 이미 그에 대한 신상을 잘 알고 있었고, 때마침, 그가 장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윤허와 동시에 특별히 융성한 대접을 배려토록 했다.
알로펜은 원래 시리아 출신으로, 후일 페르시아로 가서 景敎를 접했다. 그곳에서 그는 직분을 받아 사역자가 되어 635년에, 중국 장안으로 복음사명의 명을 받았다. 장안에서 중국인들에게 비쳐진 그의 인상은 늘 단정하고 정숙한, 겸손하며, 예의바른, 학문을 통달한 중년의 학자로 유가(儒家)와 비슷한 품위를 지니고 있어서 황제로 하여금 쉽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중국으로 건너올 때 530부의 景敎서적을 휴대 반입하였다. 후일 일부분은 중문으로 번역되어, 태종도 친히 열람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태종은 그를 통해 景敎의 진리를 전해 듣기도 하였다. 이에 태종은 그가 전하는 설교와 더불어 가져온 經書를 통해, 景敎가 전하는 심오한 진리가 당 국정의 치리에 공헌이 되어 주길 바랬다. 이리하여 알로펜과 더불어 들어온 수행원 모두는 중국에 남아 활동할 수 있는 기회까지 부여 받았다.
알로펜이 중국에 와서 황제의 특별한 호의를 받은 건 개인적인 것도 있긴 하지만 사실은 정치적인 계산도 숨겨져 있었다. 당시 실크로드 지역은 늘 불안한 정세가 고조 되어있었기에, 이를 수습해줄 인물이 절실했다. 이에 중국 측에서는 실크로드의 교역길이 더 이상 위협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구축되기를 바랐고, 이를 통해 무역의 안정과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었다. 태평성세를 이뤄낸 태종에게 단 한 가지 골칫덩이인 서역의 정치적 정황은 늘 복병이었다. 이때, 서역인 景敎徒 수장이 장안을 방문한다는 희소식이 날아들었으니, 당은 기쁘지 않았겠는가!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을 이용해 실크로드의 서역인들에게 당의 입장을 전달하여 서역의 여러 민족을 이해시킬 수 있었고, 동시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통역원을 둘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왜냐면 이들은 머지않아 아라비아와의 협상에 큰 도움이 될 걸로 판단된 것이다.
이 시기에, 알로펜은 재상 방현령과 궁내 여러 대신들의 협조를 받아 아주 순조롭게 초기 선교활동을 진행 할 수 있었는데, 이때가 그의 景敎 선교사역이 실제로 막 발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정관 12년 가을, 알로펜이 장안에 들어온 지 3년째, 태종은 景敎를 국내에서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도록 친히 조서를 내렸다. 게다가 장안의 경내 의녕방(義寧坊)에 景敎사원을 세우도록 하였다. 동시에 자신의 초상화를 景敎사원 벽면에 전모토록 했다. 이것은 태종의 景敎와의 밀접한 관계를 만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당태종의 景敎를 향한 적극적인 호위정책은 마치 당의 국교를 景敎로 삼는 듯한 뉘앙스를 갖게 하였지만, 실제로 당태종 자신이 景敎를 신봉했다는 문헌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기에 그의 통 큰 마음으로만 이해했어야만 한다.
650년 고종이 재위했고, 景敎는 더 확장 보급되었다. 전국 각지에 景敎사원이 건립되었고, 조정은 알로펜을 당의 景敎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삼았다. 이 시기 景敎는 이미 전국 각 도시에 알려졌다. 오래지 않아, 알로펜은 중국 景敎의 공식 주교로 임명 받았고, 당시 수도 장안은 중국景敎의 중심이 되었다.
그동안, 중국에 온 알로펜은 景敎사원을 세우는 일과, 경전을 번역함으로, 복음의 빛을 중국 전역에 퍼뜨릴 수 있었다. 3년이 채 못 지나서 21명의 페르시아 景敎徒가 또다시 들어왔는데 그들의 생활방식과 조직행정은 페르시아와 시리아의 景敎徒와 거의 일치했다. 은수사(隱修士)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역시 바그다드의 총주교를 섬겼다. 중국의 주교 하에도 몇 개의 교구가 나뉘어 세워졌는데, 부주교에 의해서 관리되었고, 그들은 주로 예배와 봉헌, 교육 등에 관여했다. 비교적 규모가 큰 사원은 교목과 총무를 두기도 하였다.
알로펜의 사역으로는 景敎의 교의적 가르침 외에도, 신앙의 삶을 아주 중시했다. 교의적 방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핵심주제로 삼았으며, 이를 통한 구속적 진리와 성령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장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생활방면의 가르침에는, 날마다 성경읽기를 중시했고, 매일 일곱번 정한 시간에 전심을 다해 성경을 봉독해 올렸다. 목판을 두들기는 소리에 맞춰 엄숙함과 경건함의 기도가 묻어났다. 예배시간이 다가오면 긴 수염에 머리를 삭발한 수도사들이 수도복으로 갈아입고 기도에 임했다. 바로 이것은 동방수도원의 모습을 따른 것이다.
이들의 의식 외에도, 기타 실생활에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이웃에게 나눔의 실천을, 망자들을 위한 기도와, 죄인들을 위한 정결의식과 고해성사를 베풀어줌으로, 주일예배는 점차적으로 적지 않은 중국인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2. 이사(Yazdhozid 伊斯)
이사의 행적을 보노라면 사도행전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사도행전 10장 1절~5절)
본문은 백부장 고넬료와 사도 베드로를 통한 이방인 전도의 문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첫 번째 사례이다.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대 되었지만 유대인의 경계를 넘지 못했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고넬료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자신의 직책과 아무런 상관없이 기도와 구제의 삶을 살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정통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달되는 길목에는 반드시 이방인의 본이 되는 구속자의 모델이 있어야 했다. 성공적인 선교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이때, 모델로 등장한 사람이 고넬료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으로, 신행일치(信行一致)한 인물이다.
그의 믿음은 이방인 정통복음의 첫 통로가 되었고, 그의 경건한 삶으로 이어진 이방인 전도가 곧 본보기가 되어 이방인 선교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景敎 역시도 기도와 구제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기도한 대로 살기를 강조했고, 영적으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추구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사는 景敎碑를 대내외로 알리게 한 직접적인 인물이다. 그는 왕사성(王舍城; Rajgir)의 발리치(Balykchy)인이다. 그는 景敎徒의 신분으로 조정에까지 들어간 인재로, 당시 景敎 선교사 중 크게 출세한 사람이다.
또한, 곽자의(郭子儀) 장군을 도와 안사의 난을 평정시킨 공로를 세웠다. 숙종 때에는 아라비아인과 회홀인들이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자, 이사는 곧바로 시전중감(試殿中監)의 직분의 자색 두루마기를 하사받고, 영무궁(靈武宮)에 들어왔다. 숙종은 그를 동삭방절도부사(同朔方節度副使)로 삼아 곽자의 장군 휘하 안사의 난을 평정시키는 중임을 부여했다.
국가 위기의 난을 평정시킨 그는 큰 공을 세웠음에도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청빈의 삶을 실천했으며, 영무오군(靈武五郡)에 景敎사원을 중건하였고, 재산을 자신의 집에 쌓지 않고, 가난한 이웃을 향해 나눠주기를 좋아했다. 이러한 성격과 더불어, 경건함에는 사리판단이 분명하여, 매년 영무오군의 주교가 모였을 때, 예배를 주관하였고, 자선활동을 추진함으로 롱우(隴右)와 하서(河西) 일대에 景敎를 다시 정비해 세웠다.
景敎徒들은 숙종과 대종, 덕종의 三朝에 이르는 그의 공덕을 기리며 “願刻洪碑,以揚休列”라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이리하여, 781년 景淨에 의해 이사의 공덕을 치하하는 景敎碑가 세워지는 것이었다. 더불어 당에 전래해 들어온 景敎의 150년 역사를 기술하였다.
景敎碑 중 일부 문장에는 그의 공덕에 관하여 기술하기도 했지만, 그의 개인적인 품성과 사회적 공헌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
“大施主金紫光祿大夫. 同朔方節度副使. 試殿中監. 賜紫袈裟僧伊斯.
和而好惠. 聞道勤行. 遠自王舍之城. 聿來中夏. 術高三代.
藝博十全. 始効節于丹庭. 乃筞名于王帳. 中書令汾陽郡王. 郭公子儀.
初總戎于朔方也. 肅宗俾之從邁. 雖見親于臥內. 不自異于行閒. 爲公爪牙.
作軍耳目. 能散祿賜. 不積于家. 獻臨恩之頗黎. 布辭憩之金罽.
或仍其舊寺. 或重廣法堂. 崇飾廊宇. 如翬斯飛. 更効景門. 依仁施利.
每歲集四寺僧徒. 虔事精供. 僃諸五旬. 餒者來而飰之. 寒者來而衣之.
病者療而起之. 死者葬而安之. 淸節達娑. 未聞斯美. 白衣景士. 今見其人.”
이사는 대진사의 중건을 위해 연보를 했고, 빈궁한 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눠주는 일에 주력했다. 또한, 景敎碑를 세우는 일에도 힘을 모았다. 그는 비록 景敎徒였지만, 그의 공덕은 조정과 사회에 커다란 찬사를 받았다.
이사 역시도 서역 출신이면서 조정에 등용된 관직에 오른 군인이었지만, 오히려 성 밖의 군중들로부터 진정으로 존경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손과 발로 헌신한 실천적 믿음의 사람이었다.
3. 경정(Adam, 景淨)
경정(Adam)은 시리아의 발릭치(현 아프간 북부)가 고향으로, 중국 景敎 역사상 가장 특별한 인물로 주교이며 신학자였다. 일찍이 “중국의 교부”, “본토주교”, “장로” 등을 역임했다. 경정은 어렸을 적부터 중국 문화권에서 성장해 자연스럽게 중국식 전통문화를 교육받았고, 고문에도 아주 탁월했다. 시리아어와 페르시아어, 그리고 한문까지 능통했기에 후일 여러 景敎경전과 “대진경교유행중국비송병서(大秦景敎流行中國碑頌並序)”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은 박학다식하여 알로펜의 명을 받들어 시리아어 주석 32권을 번역하였고, 복음서, 바울서신, 시편과 아울러《敬禮常明皇樂經》,《宣元至本經》,《志玄安樂經》,《天寶藏經》,《多惠聖王經》,《阿思瞿利容經》,《渾元經》,《通真經》,《寶明經》,《傳化經》,《述略經》,《三際經》,《寧思經》,《宣義經》,《師利海經》,《寶路法王經》,《三威贊經》,《牟世法王經》,《伊利耶法王經》의 기도문 등 예배와 관련된 서적을 번역하였다. 그중에, 몇 권은 후일 돈황의 석실에서 발견되었는데, 景敎는 불교와 도교에 대하여도 심도 있는 연구를 가졌다.
그는 일찍이 불경 대당정원속개원석교록(大唐貞元續開元釋敎錄), 육파나밀경(六波羅密經) 번역에도 도움을 줬다. 심지어 782년에 북인도에서 온 유명한 불교계 프라즈나(Prajna, 般若) 법사가 장안에 도착하였을 때 인접한 景敎사원에 거하던 그에게 찾아와서 불경 번역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일은, 당시에 함께 거하던 승려들 중에 일본 불교사의 중요한 두 인물, 즉 코보다이시(弘法大師), 덴교다이시(伝教大師)가 있었다. 이후 덕종 황제 때인 781년에 景敎碑가 건립되다.
경정의 景敎 경전 번역작업으로 인해 景敎가 唐代 중국 전역에 원활한 포교가 진행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당시의 景敎 수도사들에게도 하나의 동방선교를 위한 언어훈련과 예배, 생활용어로도 충분한 안내와 더불어 景敎는 대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천재적인 언어능력과 탁월한 문학적 해석 그리고, 역사적인 안목으로 인해 마침내 景敎碑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大秦寺》
– 宋代 蘇軾
晃盪平川盡,坡陀翠麓橫。
忽逢孤塔迥,獨向亂山明。
信足幽尋遠,臨風卻立驚。
原田浩如海,袞袞盡東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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