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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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한은선 목사] 감사의 승리! » 다니엘6:1-10 »
Sieg der Dankbarkeit!
오늘 본문에는 삶의 큰 위기에서 감사로 승리한 사람의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청년입니다. 뜻을 세워 믿음으로 살았던 그는 왕의 눈에 들어 세 총리 중 수석 총리가 됩니다만 당연히 비토 세력이 생길 수밖에 없는 신분이었습니다다…
어떤 화가가 화창한 날씨에 들에서 풍경화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그린 그림은 누가 봐도 훌륭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데 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보면 볼수록 뭔지 모르게 모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새 종이에 다시 그림을 그렸는데 이번엔 화가 스스로가 만족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도구를 챙긴 화가는 그림을 싸기 전에 두 그림을 나란히 세워 놓고 도대체 두 그림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 그림엔 그림자가 빠져 있었고 두 번째 그림에는 그림자를 그려 넣은 것이었습니다. 그림자가 없었던 그림은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준 반면 그림자가 들어간 그림은 진실성과 완성도가 좋았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화폭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그림자는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그림자 자체가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그림자가 있기에 오히려 원형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감사의 대상이지 원망 불평의 대상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림자까지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불평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 복음서에는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각각 열매를 맺고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글자 하나 안 틀리고 똑 같은 칭찬을 받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한 사람은 두 달란트를, 또 한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차이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보시는 관점이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양의 문제로 접근하게 되면 상대적 평가를 위해 서로 비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하실 때 누구와 비교하시지 않으시고 항상 절대적 관계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 대한 주인의 책망은 이익을 남기지 못한 죄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불평 원망의 죄 값을 묻고 계십니다. 원망 불평하는 사람의 큰 문제는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린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늘 결과를 놓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과정을 먼저 살피십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비록 혁혁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일을 믿음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했다면, 원망과 불평으로 일해 큰 결과를 얻은 사람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삶의 큰 위기에서 감사로 승리한 사람의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청년입니다. 뜻을 세워 믿음으로 살았던 그는 왕의 눈에 들어 세 총리 중 수석 총리가 됩니다만 당연히 비토 세력이 생길 수밖에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정적들이 별별 방법을 총동원하여 다니엘의 뒷조사를 했지만 틈을 얻지 못하자 다니엘의 신앙을 역이용하여 올가미를 씌울 법령 하나를 급조하여 요즘 말로 날치기 통과를 시킵니다. 드디어 왕의 재가를 얻어 공포하게 되었는데, 한 달 동안 바벨론 왕 외에는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거나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사자 굴에 던지기로 한 것입니다. 이 법이 한번 통과되고 나면 왕도 번복 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알고도 집에 돌아가서는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총리직은 물론 생명을 잃게 될 상황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집에 돌아가 생명 내놓고 그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했던 다니엘에게서 우리는 감사가 곧 신앙인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감사는 기도했기에 가능했고 기도는 신앙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감사하는 데까지가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보면,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하며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감사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감사 체질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곧 “감사했다”가 아니라 “감사하는 자, 감사하는 존재”였다는 뜻입니다. 세 살 버릇 예순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두 번 불평하다 보면 그게 습관이 되고 습관이 반복되면 체질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주님 바라보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감사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다니엘처럼 체질화 된 감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똑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감사를 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불평을 합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입니까? 제가 늘 설교했던 것처럼 타락한 시각을 가지느냐 아니면 거듭난 영적 시각을 가지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나서도 에덴동산에 달라진 것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의 부부가 갑자기 벗은 것을 서로를 부끄러워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시각이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세상은 천국입니다. 감사란 신앙의 끝입니다. 얼마나 넓은 영역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폭이며 수준입니다.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승리한 다니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의 승리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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