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발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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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저널=정이신목사] 창발의 시대 » 패트릭 와이머(Patrick Wyman) 지음, 장영재 옮김/ 출판사: Connecting »
1490년에서 1530년까지 40년 동안 유럽에서 발생한 일에 주목…
세계사의 지각 변동을 일으킨 이 시기에 유럽인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고, 다른 지역에서 그들과 마주친 사람들은 더욱 크나큰 대가를 치렀다. 보수를 받지 못한 병사와 종교적 적대감이 결합하여 로마의 거리에 높이 쌓인 시체 무더기는 네덜란드 반란과 30년전쟁이 초래할 참상의 맛보기에 불과했다. 카나리아제도와 서아프리카로 향한 포르투갈인의 초기 항해에서 수천 명이 강제로 노예가 된 것은 훨씬 더 상품화된 인간 수백만 명이 끔찍한 상황에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운송될 미래의 전조였다. – [책 내용 중에서]

책에서 다룬 시기가 언제인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저자는 1490년에서 1530년까지 40년 동안 유럽에서 발생한 일에 주목했습니다. 이 40년 동안에 유럽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발전과 충돌, 연결이 일어나 거대한 ‘창발(創發: The Verge)’로 이어졌습니다. 책의 원제는 ‘The Verge’인데, 이걸 ‘창발의 시대’로 번역한 번역자의 의도가 있기에 이걸 제대로 알기 위해 책에서 말한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경제혁명, 기독교개혁, 인쇄술의 발달, 르네상스 등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특정 시기가 이후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책은 오늘날에도 격렬한 논쟁이 되는 ‘서양이 왜 동양보다 잘살게 됐는가?’를 다룬 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을 고찰한《대항해시대(주경철 지음)》와 비교하면서 읽으면 좋습니다. 서양인이 본 서양 문물의 정비와 동양인이 본 서양의 팽창을 비교하면 저자가 말한 걸 헤아리기 쉽습니다.
루터의 말년에 관한 서술은 다른 시각으로 본 기독교개혁의 지류입니다. 점점 뚱뚱해졌고, 금욕적인 수도사가 아니라 결혼해서 여섯 자녀의 아버지가 된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교구 목사로 그의 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했던 갖가지 이야기를, 그의 제자들이 여러 개혁 운동의 하나라고 생각해서 계속 출판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갖가지 불협화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뚱뚱한 원로 정치인으로 전락하게 됐고, 자신의 시대와 이어지는 시대의 과도한 극단주의 폭력을 가능하게 한 인물로까지 흘러갔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쉴레이만(Suleiman)의 사례도 이와 비슷합니다. 쉴레이만은 1553년 가장 유망한 아들이었던 무스타파(Mustafa)를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다른 아들 바예지드는 실패한 반란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쉴레이만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아들 셀림 2세가 왕위를 이었지만,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한 사람이었고, 이후 그의 후계자들은 더 나빴습니다. 근대를 넘어서서 현대를 이끈 사람 중의 한 명으로 평가되는 루터의 말년과 쉴레이만을 보면서, 제가 딛고 선 거인들의 어깨가 어떤 구성 요소를 갖추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제 눈에 강하게 들어왔던 건 야코프 푸거와 은행업에 관한 대목입니다. 중세 교회는 고리대금에 관해 강력한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교회가 제시한 원칙에 따르면 원금을 초과하는 건 무엇이든 고리대금이었습니다. 이를 어기고 원금을 초과하는 이자를 받았을 때는 짓는 죄는 영혼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유한 중세 투자자의 유언장에는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고리대금의 죄를 씻기 위해, 경건한 기부를 위한 돈을 따로 떼어둔다는 말이 대부분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투자에 대한 수익을 기대하지 않고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없기에, 이런 틈새를 은행업자는 뚫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방식으로 이익을 내는 거래 과정을 만들었습니다.
은행업의 진정한 효용은 예금과 이자를 훨씬 능가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환어음, 신용장, 그리고 송금이 은행 업무의 핵심이었습니다. 푸거가 만든 회사를 비롯한 기업들도 같은 노선을 따랐는데, 이게 16세기 초에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이 여러 세기 동안 이탈리아인이 선호했던 벨기에의 브뤼헤를 대신해서 유럽 금융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계기가 됐습니다. 또 여기에는 두툼한 장부도 한몫했습니다. 이처럼 유럽에서 벌여놓은 은행업은 상업 세계의 궤도를 구부리는 중력장 역할을 하며, 현대 자본주의의 혈맥이 됐습니다.
세계사의 지각 변동을 일으킨 이 시기에 유럽인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고, 다른 지역에서 그들과 마주친 사람들은 더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회계 장부는 언뜻 보기에 무미건조하고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열과 행으로 기록된 숫자들, 초심자는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표기법 체계를 특징으로 한 회계 장부에는 수익을 낸 해외 항해의 투자가 기록돼 있었습니다. 이후 그들이 장부로 남겨 기록한, 해외 항해로 얻은 이익에 관한 사항은 잉크가 아니라 피로 기록한 것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 피의 기록이 21세기의 삶을 정의하는 끝나지 않는 흐름이 됐습니다.
책은 유럽에서 벌어진 일만 다뤘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부흥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니 동양이 세계의 역사를 바꾼 일을 쓴 책도 나오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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