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한 사랑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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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저널=정이신 목사] 음란한 사랑의 길 » 78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사랑을 하지 마라…
<6:24>에서 “음행하는 여자(노크리)”는 비이스라엘 여자고, 그 여자가 “호리는 말”은 히브리어로 ‘헬캇 라숀’인데 ‘부드러운, 아첨하는 말’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여자는 율법으로 자신을 다듬고 있었지만, 비이스라엘의 여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비이스라엘의 여자가 던지는 성적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에 성적인 접촉은 우상숭배와 연결된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비이스라엘 여자를 만났다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놓칠까 봐 <잠언>은 이것을 거듭해서 경고합니다(6:25)…
‘음란’이란 표현을 쓴 것은 욕정에 얽힌 사랑으로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6장>에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몇 가지 언급한 후 <잠언> 기자는 잘못된 사랑에 대해 긴 글을 <7장>에 기록했습니다. 종이로 돼 있는 책을 보고 있는 우리는 종이 한 장으로 이 글의 분량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분량을 양피지에 쓰려면 꽤 많은 가죽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사랑을 하지 마라’라고 간단하게 써도 될 것을 소설처럼 상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런 사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7:17>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많은 안해를 두지 말라고 했지만,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말씀을 제대로 지킨 왕이 몇 명이나 될까요? 이스라엘의 상황이 그러했기에 <잠언> 기자는 마치 소설을 묘사하듯이 당시에 꽤 비쌌던 양가죽에 이렇게 길게 잘못된 사랑의 시작과 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합니다. 태어난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태어난 이상 자기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어떤 길을 가야 합니다. 물론 가는 길이 서로 다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길로 가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은 누구나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내용이 같은 게 있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기에 실패의 내용도 달라야 하지만 실패만큼은 공통분모처럼 같은 게 있는데, 그게 남녀관계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남녀관계를 가로지르는 성적 유혹은 고대나 오늘날이나 같고 특정 연령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넘어질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함정입니다.
성적 유혹에 빠져 인생을 망친 사람이 현대에도 여럿 있는데, 이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이 이 유혹입니다. <7장>은 이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교훈을 3단계로 기록했습니다.
첫째로 믿음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라고 합니다(1∼5절). 경찰서 바로 옆에 있는 집에는 도둑이 들지 않습니다. 또 사람이 성경을 들고 목사 가운을 입은 채 룸살롱이나 창녀촌에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이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에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유혹에 끌려가는지 제삼자의 관점에서 관찰하듯 설명합니다(7:6∼21). 유혹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미리 알고 있으면 싱거워서라도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그 과정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셋째로 이런 성적 유혹에 넘어가 탈선했을 때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7:22∼27). 결과가 이렇게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죄를 짓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7:1∼2>을 보면, 말씀을 보관하는 게 아니라 지키라고 합니다. 이는 보물처럼 집안에 두고 관리하는 게 아니라 말씀처럼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평균대 위에서 체조하는 선수들은 거기에서만 연기해야 합니다. 평균대에서 벗어나 떨어지면 실격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평균대가 아닌 땅 위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삽니다. 그러나 성도는 평균대 위에서 연기해야 합니다. 성도가 땅 위에서 연기하지 않는 이유는 평가 기준과 삶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땅 위에서는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평균대 위에서 연기하는 선수와 같은 평가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평균대 위에 올라서서 연기하려면 불필요한 것을 버려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평균대 위에서 연기할 수 없기에 평균대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가진 것을 줄여야 합니다.
눈동자는 신체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라서 조그마한 티가 들어가도 엄청나게 격한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신다는 말씀이 있듯이(시편 17:8), 말씀을 눈동자처럼 지키려면 엄청나게 신경 써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눈동자로 삼으면 세상을 말씀이 제공하는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7:2). 반대로 우리 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버리면 영적인 소경이 돼 인간의 눈으로만 사물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볼 수 있는 게 아주 적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눈동자로 하고 있으면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만, 영적 소경이 되면 죄를 볼 수 없습니다. 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하나님이 주신 종말이 다가왔을 때 죗값을 청산하느라 남는 게 하나도 없는 빈털터리가 됩니다. 그동안 엄청난 부를 쌓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전부 빚으로 한 잔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부딪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눈동자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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