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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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강석진 목사]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6 »
고종, 1887년 6월 29일 박정양(朴定陽)을 초대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
고종은 미국과 1882년 5월에 수교를 맺은 후에는 오랫동안 종속 관계를 이어왔던 청나라로부터 벗어나려했고 일본과는 1876는 강화도 수호통상 이후 조선을 향한 침탈적 압박이 가해 오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미국에 공사관 설치를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외교적 절차에 대해 사전에 청나라의 리홍장에게 알리지 않고 은밀히 진행했다. 그 당시만 하여도 청과는 관행상 속방으로 인지하고 있었기에 이에 대한 청의 태도가 어떻게 나올지는 명약관화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과단성있게 1887년 6월 29일 박정양(朴定陽)을 초대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하였다. 이를 위해 사전에 거금의 내탕금 2만 5천 달러로 워싱톤에 공사관 관저를 구입하였다. 이 당시에 워싱톤에는 30여 개의 각국 공사관들이 주재하고 있었다. 이로서 조선도 세계 속의 자주국임을 외교상으로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고종은 갑신정변(1884)으로 수년 동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신뢰와 친밀 관계를 이어왔던 제중원의 알렌을 공사관의 참찬관(參贊官)에 책봉하여 박정양 공사의 고문 역할을 담당케 하였다. 이는 매우 파격적인 인사 조치로서 자주적 외교활동을 하는 일에 외국인을 중책의 공직자로 임명했다는 점은 특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당시 조선으로서는 서양과의 외교 관계와 그 활동에는 경험이 전무하였고 영어를 구사하는 조선인 인사가 없었기에 고종으로서는 불가피하게 차선의 임용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로써 알렌은 미국에 가서 조선의 공직자로 청나라의 불필요한 간섭을 차단하고 자주국으로서의 국격을 부각시키는 데에 힘써야 했다. 고종은 미국과 함께 유럽 여러 나라의 공사관 설치와 파견 함에 대하여 그 전문을 이같이 포고하였다.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5개 나라와 차례로 조약을 맺어 점차 우의가 두터워지고 있으니 관리를 특파하고 그 나라 수도에 주재시키는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판 내무부사 심상학을 전권대신으로 파견하여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의 수도에 가서 편의에 따라 주재하고 겸하여 공사의 직무를 처리하도록 하라. 또 미국과는 제일 먼저 화친을 맺고 상호 관리들을 초빙한 지 1년 정도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수도에 주재시킬 사신을 파견하지 못했으니 실상 겸함으로 한다. 협판 내무부사 박정양을 전권대신으로 특파하여 미국에 가서 수도에 주재하면서 공사의 직무를 처리하도록 하라.”
이당시에 조선 한성부에는 청나라에서 파견한 위안스카이(원세계, 1859~1916)는 조선에서 총독처럼 군림하였던 인물로서 고종의 공사 파견 전문을 청의 리홍장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조선 조정에서는 예산이 없어서 곧바로 공사관을 열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한성 주재 외국 외교관들은 만일 조선이 재외 공관을 개설하게 되면 조선이 청의 속국이라는 청의 주장이 약해질 것을 걱정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리홍장은 즉시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잊지 않고 이에 걸맞는 예법과 절차를 준수하도록 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고종은 1887년 8월7일 박정양에게 워싱톤 임지로 떠날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그날 저녁에 리홍장은 조선 조정이 박정양을 파견하기 전에 청의 허락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내왔다. 이는 조선으로서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고 청나라는 아직도 조선을 속방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금일 주찰조선총이 교섭통상사 원스카이의 조회를 받았습니다. … 총서에서 칙지를 받들어 전보를 보내었는데, 조선에서 유럽에 공사를 파견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지시를 청하고 윤허가 끝난 뒤에 다시 보내야 비로소 속방 체제에 부합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부에 이를 신속하게 통지해서 준수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귀 정부에 이를 조회하니, 부디 살펴보신 후 받들어 시행하길 바랍니다. 마땅히 품청하여 이에 따라 시행해야 할 듯합니다.”
위안스카이는 고종이 청을 상대로 죄를 지었다면서 청 관리를 보내 도성 밖에서 박정양이 출국하지 못하도록 저지하였다. 알렌은 당시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날 저녁 왕실에 인사를 하고 서울을 떠나 제물포에 도착했다. 박정양 공사는 도성문 밖에서 만나 같이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제물포로 향했다. 다음 날 나는 국왕이 중국의 대리인 위안스카이에게 겁을 먹고 박공사를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모든 방법이 실패하자 급기야 만일 조선의 공사가 미국으로 떠난다면 전쟁을 선포하겠다는 리홍장의 편지를 내보였다고 한다.”
처음 박정양과의 약속이 어그러지자 눈치를 챈 알렌은 제물포에서 기다리다가 바로 말을 타고 급히 한양으로 다시 달려와 곧바로 미 공사 딘스모아와 조선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만났다. 이에 딘스모아는 어떤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박정양 공사 일행을 출발시켜야 한다고 하였고, 베베르는 각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였다. 훈령의 내용이 무엇이든 위안스카이는 미국과 러시아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겁을 먹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다음 주 딘스모아 미공사는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답신을 받았지만, 그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으니 다시 보내 달라는 답신이었다. 그당시 조선의 전보망이 청나라에 의해 개설되어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전보 내용이 다 탐지된 탓이었다. 청이 그러한 전보문을 혼잡게 한 것이었다.
이에 알렌은 고종을 알현하여 딘스모아 공사를 미국에 급파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미공사와 알렌은 고종이 청의 승인을 요청하는 것은 조선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설득하였다. 이에 더하여 미국 공사와 청 주재 미국 공사 덴비(Charles Denby Jr., 1861~1938)는 한성과 베이징의 청 관료에게 항의하였다.
미국의 베이야드 국무장관은 덴비에게 “조선이 미국과 체결한 조약에 따라 미국 주재 외교관을 파견하는 데 대한 청 관리들의 방해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유감을 표할 것”을 명한다. 이에 고종은 결심이 유약해져 주미 공사 파견을 포기하고 싶어했다. 이에 알렌은 고종에게 박정양과 늦어도 11월 10일까지는 요코하마항에 도착하여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타야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결국 고종은 청의 리홍장에게 굴복하여 청의 공식 허락을 받기로 하고 사신을 보내어 리홍장에게 조선 조정이 공식적으로 외국에 주재관 파견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주문을 보냈다. 이에 대한 답신으로 리홍장은 조선 정부가 미국에 공사를 파견해도 좋다는 허가 전문을 위안스카이에게 보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을 달았다.
“하나, 조선 공사가 각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의 사관에게 가서 보고를 하고, 해당 국가의 외무부를 방문할 시에는 인솔을 받고 지시를 받아야 하며 그 뒤를 따라야 한다.
하나, 긴요한 외교적 교섭 사항이 있으면 조선 공사는 먼저 청국 공사와 협의 후 처리해야 한다.
하나, 관계의 중요한 사안은 먼저 청의 외무 담당관에게 긴밀히 상의해서 그 지시를 받아야 한다.”
고종은 이런 수모적인 청의 모든 조건을 다 받아들이므로 박정양은 드디어 미국으로 출발하게 된다. 청의 리홍장은 이처럼 조선의 자주적 국격을 결코 인정하질 않았다. 박정양은 이같은 청의 영향력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초대 미주재 공사로 파견되는 것을 달가워하질 않았고 조선을 떠나려 하질 안았다. 그는 결국 강제로 잡혀서 배에 태워져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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