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할 대상이 없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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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저널=정이신 목사] 비교할 대상이 없는 지혜 » 88회
절대 같지 않기에, 비교하지 않아야 하는 대상에게 비교하면 오히려 역효과…
<8:11>에서 “비교할 수 없다(로 샤와)”를 직역하면 ‘절대 같지 않다, 절대 일치하지 않는다’란 뜻입니다. 절대 같지 않기에, 비교하지 않아야 하는 대상에게 비교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맹세’를 ‘비교’로 바꿔도 비슷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비교할 때는 비교할 만한 대상과 비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이것을 다른 것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행위와 비교할 수 있습니까?
성자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은 것과 비교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또 다른 예로 천국을 비교할 만한 대상이 이 땅에 있습니까?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기에 예수님은 천국을 ‘마치 ∼같다’라고 비유로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그걸 그대로 인정하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억지로 비교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것을 헐값에 넘기게 됩니다.
그러나 사이비ㆍ이단끼리는 반드시 서로 비교해야 합니다.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은 대개 자신들만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따로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이 우리나라에도 여러 명입니다. 그럼 그 계시를 사이비ㆍ이단 교주들끼리 서로 비교해 봐야 합니다. 누가 진짜 계시를 받은 것인지 서로 비교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그런데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은 절대 이런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꼭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가지고 기독교의 정통교리와 비교하자고 떼를 씁니다. 하지만 사이비ㆍ이단의 교리와 기독교의 정통교리는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돼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는 신인사상(神人思想)과 여러 사람을 잘 속여서 인간이 신이 됐다고 주장하는 인신사상(人神思想)은 근본 바탕이 다르기에 서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사이비ㆍ이단의 계략에 따라 비교하다가 엉뚱하게 저들의 술수에 속습니다.
만약 비교하고 싶다면 정통 기독교에 다니는 사람은 구원을 약속받은 사람답게 자신을 성경에 나온 인물과 비교하십시오. 이때 ‘사울처럼 실패했다’, ‘다윗처럼 간음해도 용서해 주시는구나!’ ‘솔로몬도 이런 실수를 했다’라는 식으로 비교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 나온 많은 사람 중에 비교할 사람이 없어서 실패한 사람들, 성령님이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라고 슬퍼하셨던(에베소서 4:30) 사람들과 비교합니까? 비교하지 않아야 할 일은 비교하고, 비교해야 할 일도 엉뚱하게 다른 사람의 일과 비교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 나온 인물과 비교할 때는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니 성경의 인물 세 명 이상과 비교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고 했습니다(빌립보서 2:5). 그러니 크리스천은 자신이 비교 대상으로 삼는 세 명에 반드시 예수님을 포함 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엉뚱하게 성경에 나온 딱 한 사람만을 지목해 비교한 후, 자신이 잘못한 행동을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8:12>에서 지혜가 주소로 삼았다는 “명철(오르마)”은 우리말의 슬기에 해당하는 단어로 <2:3>에서 “명철(타분)”로 번역한 히브리어와 다릅니다. 우리말 번역 성경은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같은 단어로 번역했는데, 이는 히브리어의 특성을 고려한 번역입니다.
<잠언>은 먼저 대중이 듣기 위해 기록한 책입니다. 글을 아는 한 명의 낭독자가 두루마리를 읽으면 다수의 청중이 들었습니다. 이때 같은 단어를 반복해 들으면 듣는 사람들이 지루해합니다. 그래서 비슷한 뜻을 가진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해서 지루함을 최소화했습니다.
이런 노력은 <8:9∼10>에서 쓴 지혜ㆍ훈계ㆍ지식이란 표현에도 나옵니다. 앞에서 명철을 말할 때 히브리어 타분이란 단어를 사용했기에, 이번에는 오르마란 단어를 써서 지혜가 오르마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주소를 삼는다”란 표현은 한 단어인데(샤칸), 이는 ‘정착하다, 거주하다, 머물다’란 뜻입니다.
<8:12>에서 지혜가 명철을 주소로 삼았다는 말은 명철과 같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표현한 것과 비슷합니다. 지혜는 더 근원적이고 명철은 우리의 삶에 적용해 생활 원리로 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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