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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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저널] 운명 » 임레 케르테스(Imre Kertész) 지음, 박종대ㆍ모명숙 옮김/ 출판사: 다른 우리 »
과거의 아픔이 ‘운명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방식…
나는 살아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 나는 이어질 수 없는 나의 실존을 계속 살게 될 것이다. (…). 사람들이 완전히 자연스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부조리는 없다.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 – [책의 에필로그에서]

“아우슈비츠야말로 나의 최대의 자산입니다. 살아가면서 한 번도 그때의 삶처럼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저자의 말을 읽으면서 예전에 북향민 제자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간사님! 저는 무슨 복이 많아서 유치원 때부터 총살당하는 사람을 봐야 하는 곳에서 태어났을까요?” (잠시 제자와 저 둘 다 침묵) “그래도 감사해요. 제 친구들과 달리 여기까지 와서 가정을 꾸리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북향민 제자가 제게 ‘복이 많아서’ 북한에서 총살당하는 사람을 봐야 했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저자가 아우슈비츠가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말한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픔이 자산이 되고 복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아픔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정제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픔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고, 그 ‘아픔의 샘’에서 여럿이 같이 목을 축일 수 있습니다. 나의 아픔이 정제돼 다른 사람이 나와 함께 목을 축일 수 있는 옹달샘이 되지 못하면, 그 아픔은 한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트라우마로만 작동할 뿐입니다.
1929년에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44년 15살에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수감 됐다가(책에는 16살로 나옵니다), 이듬해 석방된 저자는 그의 체험을 토대로 세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로 쓴 책이《운명》입니다(1975년). 이후《좌절(1988년)》,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1990년)》를 썼습니다.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저자는 운명과 운명 없음, 존재의 엄숙함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자는 운명적으로 20세기 모든 인간을 뒤덮은 야만적인 문화에서 살았지만, ‘그것은 운명이 아니었다’라고 합니다. 저자가 이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때가 2002년이니, 아우슈비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더 깊게 알고 싶으면 세 권을 다 읽어도 좋습니다.
《좌절》에서는 이 책에서 말하지 못한 저자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그래서《좌절》의 주인공과 이 책 주인공은 같습니다. 다만 시간이 흘렀기에《좌절》의 주인공은 이 책의 주인공과 달리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나이도 16살이 아니라 50대 중년입니다. 그러나 둘이 같은 사람이란 것을 말하기 위해 저자는 주인공의 이름과 뜻을 같게 했습니다. 이 책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헝가리어로 ‘죄르지 쾨베시(Kövés)’인데, ‘쾨베시’는 헝가리어로 ‘돌의, 돌 모양의’란 뜻입니다. 그리고《좌절》에서 기자로 등장한 ‘슈타이니히(Steinig)’는 독일어 이름인데, 헝가리어 ‘쾨베시’와 뜻이 같습니다. 따라서 서로 같은 사람을 이 책에서는 헝가리어로,《좌절》에서는 독일어로 썼습니다.
《좌절》에서 저자는 시시포스(Sisyphos)처럼 행동합니다. 저자에게는 도저히 글로 쓸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을 글로 써내야 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글로 자신의 체험을 다 전달하고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글은 저자가 원하는 것에 다다르지 못하고 산 아래로 굴러떨어집니다. 《좌절》에서 저자는 이런 상황을 세 사람의 등장인물을 통해 말합니다. 세 사람은 동일한 삶에 대해 말하고, 같은 사건을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그 기억과 기억으로 파생된 갖가지 일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당연하게’ 말합니다.
“언제 그 일이 일어난 거지? 어제? 아니면 이십 년 전에? 그 일이 일어난 후로 쾨베시는 언제나 그 사건 속에 살면서, 계속 그 일을 되새기는, 작은 문제에 빠져서 살고 있다.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라고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아직도 쾨베시의 머리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면? 이건 아직도 생생하고, 누군가에게 말해야만 하는 무언가 특별한 일이 아닐까?” -《좌절》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1990년)》에는 앞서 발표했던 두 작품과 동일한 인물인 <B>가 등장합니다. <B>는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경험했던 수용소에서의 참혹한 기억 때문입니다. 수용소에서 경험한 인간 군상의 속살 때문에 <B>는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B>는 이 끔찍한 세상에 아이를 낳아, 자신처럼 혹독한 아픔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었다며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거나, 후회의 결과물로 인해 현재에 있는 불만족스러운 자기가 만들어졌다고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에서 이런 과정은 늘 되풀이되고, 이로 인한 아픔의 형태도 다양합니다. 또 나름대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 이것저것 방법을 써 보지만, 과거를 잊기 위한 처방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일수록 오히려 효과는 크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과거의 아픔이 ‘운명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방식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큽니다. 인간의 기억은 뇌뿐 아니라 온몸의 세포 곳곳에 집적된 후,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상(像)을 만들어내는 작용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현재의 내게 주어진 자유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과거의 아픈 기억이 나를 붙잡고 있다면,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자유가 현재의 내게 주어져 있습니다. 또 과거를 ‘아픈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내가 그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내 기억’이라고 하면서 그걸 자기와 같은 정체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주에 널려 있는 고차원의 시각으로 보면, ‘기억=정체성=자아’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또 이 시각으로 보면 해 아래 세상에서 기억이라 부르는 고정된 실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기억은 혼자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함께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내가 지녔다는 기억에 대한 주체가 온전히 나 혼자이지도 않습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이루고 싶은 ‘한(恨)의 노예’로 살면, 트라우마에 밀려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현실에서 감사를 찾아내지 못해, 희망과 거리가 아주 먼 곳으로 가게 됩니다. 또 인간을 희망으로 이끄는 아름다운 기억과 달리 트라우마가 변질이 된 한(恨)은 특정 방향으로만 그 사람을 이끌어, 여럿에게 손해를 끼칩니다. 그것은 과거에 현재를 저당 잡힌 채 사는 ‘꼴’과 같습니다. 아우슈비츠가 ‘최대의 자산’이고 ‘아름다웠던 순간’이라고 말하면서, 그 아픔을 늘 기억하며, 그것을 곱씹어 책을 써낸 저자의 삶에서, 저는 트라우마를 희망으로 바꾼 그의 쾌거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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