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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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3 » 강석진 목사 »
이승만의 외로운 대미외교 활동과 시련
대한제국과 일본과의 을사조약(1905.11)으로 대한이라는 나라의 외교권은 사실상 박탈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수모가 실행되기 4개월 전인 1905년 7월에 ‘가스라.테프트밀약’으로 미국은 사실상 일본이 대한제국의 지배를 묵인하였고 바로 이어서 주한미공사관을 폐쇄시켰다. 이 당시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이 들 두 나라는 전리품을 챙겨주듯이 일본의 지배를 지지 및 묵인해 준 것이다. 이처럼 19세기의 국제 사회는 강자들만의 독식하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이 당시 이완용을 비롯한 대신들 5명이 일본의 압박에 협조하였고 그에 대한 대가로 고종과 대신들은 막대한 재물과 권력을 보장받았다. 을사늑약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상 일본의 겁박과 지배욕에 고종과 대신들이 굴종했기에 가능했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는 ‘횡성신문’의 장지현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주제로 통탄하는 글로 분개하며 저항했지만 국권은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이때에 대한제국의 참정대신인 한규설과 민영환은 놀랍게도 이승만에게 대미 밀사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그 전에 이승만은 자신에게 사형을 집행하려했던 일로 고종에 대해 상당한 분노심을 갖고 있었기에 고종의 밀사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여러 사료에 의하면 민영환과 한규설에 의한 이승만의 밀사 파견이 설득력이 있다.
“어느 날 아침 외출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궁중에서 온 시녀 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는 폐하께서 나를 단독으로 만나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황제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에 대해서 평소에 품고 있던 모든 쓰라린 증오감이 북받쳐 올라와 즉석에서 폐하와 사적 알현을 하고 싶은 의자가 전혀 없다고 단언해버렸다. … 후에 알고 본즉 민공과 한장군이 황제에게 나를 불러다가 황제의 밀사로 미국에 보내어 1882년에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약속한 대로 도움을 요청토록 하려는 것이었다. 고종은 그 조치에 찬동했으나 민공과 한 장군을 믿을 수 없어 나를 비밀리에 불러다가 금전 얼마와 밀서를 주어 보내려고 했던 것이었다. 나는 황제의 초빙을 거절함으로써 얼마나 좋은 기회를 잃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와 접촉하기를 거부한 데 대해서 후회해 본 일은 없다.”(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배제학당 출판부, 313쪽)
그러나 그 당시에 이승만은 이미 ‘미국유학’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배제학당 출신으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여 아펜젤러, 언더우드, 에비슨, 게일 등의 선교사들로부터 신뢰를 받았으며 장차 민족의 지도자 감으로 기대했었기에 미국 유학에 19통의 추천서를 해주어 유학을 준비 중에 있었다. 묘하게도 이승만은 ‘유학과 밀사’라는 두 가지 과업 중 이승만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이었는지 분명히 판단할 객관적 근거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이승만에게는 출국 당시 선교사들로부터 많은 추천서와 두 명의 고위직의 사신을 품고 미국으로 출항하였다.
이승만은 1904년 11월5일 인천에서 오하이오(Ohio)호에 승선하여 1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워싱톤을 향해 기차를 타고 갔다. 1904년 12월 31일에 주미공사관을 방문하였다. 이승만을 밀사로 보낸 당시 총리 서리 민영환은 이미 외교서신을 통해 이승만의 워싱톤 방문을 공사관의 홍철호와 김윤정 서기관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의 편지를 딘스모아 의원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딘스모아는 전에 주한공사로 3년 동안 역임한 바가 있었고 귀국 후에는 의원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 당시에 이 두 사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반거워하며 협조하여 그 당시 존 헤이(John Hay) 국무장관을 만나도록 알선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마침내 1905년 2월 20일에 딘스모아 의원과 함께 국무부에서 헤이 장관을 30분간 면담이 성사되었다. 이자리에서 헤이 장관은 미국과 조선의 1882년 맺은 조약에 따른 의무를 이행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그해 7월에 사망하여 이승만의 밀사 외교는 모두 허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이승만은 밀사 역할과 상관없이 그로부터 5개월 후 즉 1905년 8월 4일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대통령을 면담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는 이승만이 하와이를 들렀을 때에 윤병구목사를 맞났었는데, 이 때에 대한제국에 대한 청원에 대해 함께 구상을 한 바가 있었다.
그 청원서의 내용은 이승만과 합세한 운병구 목사는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자신들은 고종의 사신이 아니라 8천 명의 하와이 교포들의 대표라 자처하면서 조선의 1천 2백만의 보통 사람의 민의를 대변한다고 주장했고 미국 대통령이 포츠머스 회담을 계기로 1882년 조미통상조약 정신에 입각해 조선의 독립을 지켜 주기 바란다고 호소하였다. 이같은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일본과 조선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육군장관인 태프트(William H. Taft)가 일본으로 향하는 도중에 하와이에 잠시 머무를 때에 하와이 교민들의 주도하에 테프트가 이승만이 루스벨트가 만나도록 소개장을 써 주도록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감격적인 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루스벨트의 반응은 정식 외교채널을 통해 제출하면 그 청원서를 반영해 보겠다는 형식적 반응이었는데, 이를 간파하지 못한 두 사람은 의기양양하여 당일 워싱톤의 대한공사관을 찾아가 당장 필요한 조치를 밟고자 했다. 그러나 주미공사관인 김윤정은 뜻밖에도 본국 정부의 훈령없는 그런 요구를 들어 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이승만과 윤병구 목사는 통탄하였다. 이승만은 1905년 8월 9일 민영환 총리에게 보낸 서신에서 실패의 원인을 “관료주의적 복지부동 뒤로 숨은 김윤정의 배신”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사실상 그 청원의 성사 실패의 원인은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 있었다. 미국은 이미 대한제국을 일본에 내주는 것으로 밀약된 가운데에 있었다. 이 당시 일본은 지정학적으로나 지경학적으로 미국에게는 우군일 수 밖에 없었고 일본의 엘리트 관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바드와 예일 대학 등의 유수한 대학 출신들로서 백악관의 고위 관료들과는 동문 관계로 인맥이 매우 긴밀했기에 미국으로서는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생면부지의 무익한 나라일 뿐이었다. 루스벨트도 조선 민족이 일본에 결기있게 대항도 못하는 무기력한 나라로 치부하고 있었다. 20여 년 전의 1882년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문 상에 ‘조선이 위기에 처할 때 미국이 도움을 준다’는 문구는 외교상 수사적인 것으로서 휴지 조각같은 외교문서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그당시 나이가 30살의 국제 무대의 초년생으로서 냉엄한 국제 사회에서 약소국들은 강대국들의 흥정의 대상이 되는 외교 생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 1905년의 ‘가스라.테프트밀약’이 1924년에 가서야 공개될 때까지 미국의 이중적인 외교 전략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이 당시 이승만은 1905년 2월에 조지워싱턴대학 2학년에 편입학생 신분이었다. 그러나 이어서 하바드와 프린스턴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공부하면서 미국의 민주 정치와 국제관계를 체휼하였고 그 나름대로 미국측 인사들과 자연스럽게 학연을 통해 인맥을 쌓아갔다. 대표적 인물로는 대통령이 되기 전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이었던 윌슨과 죠지워싱턴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의 동문으로 룸메이트였던 덜레스(6.25전쟁시 국무장관)과 맥아더와는 소령시절부터 지인 관계를 구축하였기에 훗날 이들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6.25전쟁시에 큰 유익을 주었다. <다음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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