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 교회역사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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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취재=이창배 발행-편집인] 키프로스 교회역사 탐방 »
프랑크푸르트교회협, 키프로스 초대교회 발자취 찾아가다
지중해 동쪽 끝, 아름다운 휴양지로 유명한 키프로스(Cyprus)는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1만년 전부터 사람이 거주했다는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예수 이름으로 제일 첫 번째로 들렀던 전도 여행지는 바로 구브로 섬 (행 13:4-5)이었습니다. 구브로 섬은 오늘날 키프로스(Cyprus)로 불려집니다.
지중해에서 시실리(Sicily)와 사르디니아(Sardinia)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말타(Malta) 섬 다음으로 1960년 8월 16일 탄생한 새로운 지중해의 섬 국가이며, 형식상으로는 키프로스 공화국(Republic of Cyprus)입니다. 키프로스의 수도는 명목상 니코시아인데, 분단 상태로 남 키프로스와 북키프로스 공화국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전 독일의 동서 베를린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남과 북 키프로스 어디로든 입국한 다음 니코시아 시가지 안에 있는 완충지대, 유엔검문소를 통하면 간단한 여권심사를 받고, 상대편 지역을 오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편 지역을 방문하려면 당일만 가능합니다.
우리 프랑크푸르트교회협의회 회원들로 구성된 교회 역사 탐사단은 2년 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국제공항을 출발해 남키프로스 공화국의 라르나카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절차를 마쳤고, 일정 중 하루는 북키프로스의 살라미 지역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키프로스 첫째날 교회 답사 일정 라르나카와 니코시아를 가다
라르나카에는 나사로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강단 옆 지하로 내려가면 나사로 무덤이 있는데, 거기엔 석관이 놓여 있습니다. 성경에는 부활한 나사로의 이후 소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승(傳承)에 의하면 나사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바리새인들이 물이 새는 배에 강제로 나사로를 태워 지중해로 떠내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사로를 태운 배는 침몰하지 않고, 구브로 섬에 도착하게 됐으며, 나사로는 키티온(Kition)이라 불렸던 나르나카(Larnaca)서 목회를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행 11:19에 보면, 스데반의 순교와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에, 박해를 피해 믿는 자들이 흩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흩어진 사람들은 베니게와 안디옥, 그리고 여기 구브로에 와서 기독교 복음을 계속 전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나사로도 흩어지는 무리들 틈에 끼어서 여기까지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남은 인생을, 예수님이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심을 생생하게 증거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때 구브로에 선교의 첫발을 디딘 바울과 바나바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나사로를 라르나카(키티온)의 첫 감독(교회 지도자)으로 안수했습니다. 나사로는 여기서 30년 동안 목회와 전도 활동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어서 감격했고, 또한 매우 기뻐했습니다. 지금의 나사로 무덤 위에다 9세기 비잔틴 황제 레오 6세(Leo VI)가 그리스 정교회를 세웠고, 17세기에 건물을 다시 복구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때문에 라르나카는 ‘제 2의 베다니’로 불려지며, 베다니 나사로가 성경에서 잊혀지지 않고, 라르나카에서 훌륭한 목회자로 사역했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게 된 우리 일행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우리들은 수도인 니코시아를 향해 출발해, 1시간 정도를 달린 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니코시아는 현재 남과 북 키프로스로 분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남과 북으로 갈려져 서로의 왕래를 차단하고 있지만, 키프로스는 정해진 완충지대의 유엔 검문소를 통과하면 남과 북을 하루 동안 오갈 수 있다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검문소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며, 긴장감 없이 국경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언제 쯤 이런 시절이 올까 하는 부러움도 맛보며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키프로스 둘째날 교회 답사 일정: 바보(Paphos)를 가다
마침 방해하려던 바예수(Bar-Jesus)라 하는 마술사(점쟁이) 엘루마(Elymas)는 바울에게 꾸중과 훈계를 받게 됐는데,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는 바울의 예언대로 장님이 되자, 큰 충격을 받은 서기오 바울은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과 이 지방의 수호신 아프로디테를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심한 박해를 당했습니다.
오늘날 파포스(Paphos)로 불리는 이곳을 향해 바울과 바나바는 터키의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살라미로 와서 섬 중앙 육로를 통과해 이곳에 도착했습니다(행 13:4~6). 바보는 구(舊)바보와 신(新)바보로 구분되는데, 바나바와 바울이 전도한 곳은 신바보입니다. 이곳은 BC 55년 로마의 식민지가 된 후 이 섬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로마 총독의 주재지였으며 바울은 총독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3:6~12).
고린도후서 11:24를 보면, 훗날 바울은 전도여행의 어려움을 고백할 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차례나 맞는 고난을 겪었다’ (고후 11:24)고 술회하고 있는데, 매를 맞은 장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중의 한 곳이 바로 바보이며, 돌 기둥에 묶여 매인 채 채찍을 맞았다고 전해집니다.
현재 세워져 있는 바울채찍교회 앞에서 AD 300년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터가 발굴되었습니다. 발굴된 유적 중에 흰 대리석으로 세워진 돌기둥 하나가 함께 발굴됐는데, 거기에 헬라어로 사도 바울의 기둥(Pillar of St. Paul)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바울이 이 기둥에 몸이 매인 채 채찍을 맞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 돌기둥은 관광객들이 얼마나 만졌던지, 심지어는 입을 맞추는 통에 둥글둥글할 정도로 닳아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갔을 때는 이미 울타리를 쳐놓고 관광객의 접근을 막고 있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우리 일행은 밖에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묘한 죄송스러움을 감동과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울채찍교회를 나와 오른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지하무덤 카타콤(Catacomb)이 있었습니다.
비록 다른 지역에 비해서 작은 규모의 카타콤이기는 하였지만, 초기 기독교의 박해와 순교 역사에 등장했던 카타콤이기에 마음이 짠해 왔습니다. 그 후 바울은 이곳 바보 항구에서 다시 배를 타고 오늘날 터키 대륙 남부에 있는 밤빌리아 버가로 건너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최대의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황금을 머리에 쓴 아름답고 숭고한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노래를 바친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원전 1200년경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쳐진 신전이 옛 파포스에 건설되었고, 고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구브로에 그리스도교가 퍼지자, 신전은 결정적으로 쇠퇴했으며, 기원 후 391년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모든 이교 신앙을 금지하였고, 여신 아프로디테 숭배도 막을 내리게 된 역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능력이 된다는 사실이 실감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상이 강력한 구브로 섬의 파포스로 건너와서, 생과 사의 싸움을 벌이며, 끝내 찬란한 영광의 승리를 거둔 바울 일행의 발자취를 더듬는 시간은 은혜가 넘쳤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복음을 위해,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지, 그 열매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마음 깊이 되새기는 시간이 됐습니다.
키프로스 셋째날 교회답사 일정: 살라미를 가다
북키프로스에 있는 살라미(Salami) 항구는 오늘날 북키프로스의 파무구스타(Famugusta)만에 위치했었던 고대도시입니다. 배를 타고 실루기아를 떠난 바울과 바나바가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살라미는 바나바의 고향이며, 1차 전도 여행의 맨 처음 도착지입니다. 살라미는 바보 항구와 함께 일찍이 베니게(페니키아)에 의해 건설된 도시입니다.
살라미는 BC 400년경 에바고라스(Evagoras? BC 410∼373년)가 이곳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BC 58년에는 로마의 속령이 됐고, 상업 도시로 번영하였습니다. 그러다 로마의 총독부가 있는 바보(Paphos)에 수도의 자리를 넘겨주게 됐습니다.
AD 116년, 유대인 폭동이 일어나자 트라야누스 황제가 이곳을 초토화했고, 후에는 지진으로 다 파괴되었습니다. AD 648년에는 오스만 터키에 다시 파괴된 이래 지금까지 폐허가 된 채로 유적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는 야외극장과 고대 아치, 상당수의 현무암 원주 기둥 등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얼마나 큰 규모였던가 가늠케 해줍니다.
우리 일행은 살라미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바나바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이 수도원은 AD 5세기에 비잔틴 황제의 재정 지원으로 건축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시련 속에서 파괴되었고, 1950년에 세워졌다가, 이슬람의 지배 하에서 1980년도부터는 박물관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박물관 안에는 바나바의 성화 등 많은 아이콘들(Icons)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진귀한 사도들의 초상화를 만날 수 있었고, 사진에 담을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 외곽으로는 바나바의 무덤인 지하묘지(catacomb)가 있습니다. 1950년에 세워진 카롭(Carob) 나무 그늘에 덮여서 작은 채플처럼 보여지는 건물입니다. 바나바는 이곳 살라미 출신으로 바울과 함께 자기 고향인 이곳에 와서 전도했고, AD 116년 유대인의 폭동 때 돌에 맞아 순교(殉敎)해 이곳에 묻혔다고 합니다.
지하 묘지로 내려가는 입구는 컴컴하여 손전등 없이는 대낮에라도 내려갈 수 없을 정도였지만, 생전에 그가 보여준 인품과 성숙한 신앙심 때문에 후세에까지 존경을 받는 신앙의 선진이었기에 우리 일행들은 그 무덤에 이르러 숙연하게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유적지로 참 귀한 곳임에도 이슬람이 지배하는 이곳의 현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소중한 기록물들이 제대로 보관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안쓰러운 생각이 가득하게 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면서 묘한 오버랩이 스쳐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진정 소중한 복음을 지금의 우리도 지켜내지 못한다면, 앞날의 교회 모습은 또 어떻게 될까?
세속화로, 뉴노멀로 새로운 풍조가 휩쓸어오는 거센 세속화의 풍랑이, 마치도 살라미 해안을 향해 끊임없이 밀려드는 거친 파도와 같이 느껴져 왔습니다. 그래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 거센 풍랑 가운데 배가 파선되어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뚫고 구브로 땅을 밟았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풍랑을 주저하느냐, 이 풍랑마져 물리치는 용기와 담대함으로 복음을 지킬 것인가, 우리들 가슴은 다시금 뜨거워졌습니다. ◙ Now&Here©유크digitalNEWS
글 이창배 목사/ 본지 발행-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