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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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성령
“나의 책은 제3의 길을 향한 복합적 탐색을 위한, 하나의 시각(기독교 신학)에서 사안의 오직 한 측면(일의 문제)에 관해 쓰인 하나의 작은 기여다.”(22쪽) -저자인 미로슬라브 볼프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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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저널=송광택 목사] 일과 성령 »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정의상 성령 안에서의 삶이므로, 교회 사역이든 세속 직업이든 일 역시 그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성령 안에서의 일은 성령을 따라 걷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인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전체가 땅 위에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을 지향한다고 해석한다면(계 21:3), 그리고 만약 에덴동산을 그러한 목표의 원형 이미지로 본다면, 성경 전통에서도 인간의 일은 세상을 형성하는 동력이라는 결론이 따라온다. 즉 누적되는 인류의 일에 부여된 목적은 세상이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창조세계 전체 공동체의 단일한 집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맞다. 성경 전통에서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동산을 심으시는 창조주이시고(2:8),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위로부터 내려온다 (21:2). 그럼에도 인간의 일은 여전히 필수적이다. 인간의 일이 없다면, 하나님과 피조물의 집으로서의 세상도 없다.(15쪽)
현대 사회는 역동적이다. 단일하고 영구적이며 급여를 받는 전업 형태의 고용은 빈번하게 바뀌는 여러 개의 직업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역동적 사회에서는 일의 이해도 역동적이어야 한다.(17쪽)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정의상 성령 안에서의 삶이므로, 교회 사역이든 세속 직업이든 일 역시 그 예외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성령 안에서의 일은 성령을 따라 걷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차원이다.(18쪽)
마르크스주의 유형의 사회주의는 완전히 신뢰를 잃었고, 자본주의는 불충분한 가운데, 우려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제3의 길을 찾고 있다. 이 제3의 같은 가까운 미래에 이 시대의 사회적 · 생태적 문제를 고려하여 강력하게 수정된 ‘제1의 길’(사회 – 생태적 시장 경제)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수정이 이루어져야 할지 아직은 분명하지 않고, 이러한 수정이 따라야 할 가치 체제에 관한 합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책은 제3의 길을 향한 복합적 탐색을 위한, 하나의 시각(기독교 신학)에서 사안의 오직 한 측면(일의 문제)에 관해 쓰인 하나의 작은 기여다.(22쪽)
인간 일의 바른 목표는 집을 창조하도록 돕는 것이다. 개인과 가족을 위한 가장 작은 단위의 집들 뿐 아니라 시골과 도시의 공동체를 위한 집, 그럼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품는 하나의 행성으로서의 집, 곧 하나님이 거하고자 하시는 성전을 만드는 일 말이다.(16쪽)
자본주의의 발흥 및 발전은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일 윤리’–바르게 혹은 잘못 명명된-와 힘을 합쳐 서구의 ‘일이 전부인 세상’을 탄생시켰다. 산업 국가 발전 초기 단계에는 지치지 않는 성실함 혹은 잔혹하게 강요된 근면이라는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로, 이후에는 광적인 여가 추구와 결합한 형태로, 일은 사람들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그것을 지배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익이나 필요나 의무감 때문에 혹은 세 가지 모두를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그다음, 그들은 자신을 일하는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다. 곧 자신의 가장 고차원적 운명은 일하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될 수 없을 소중한 무언가가 되어 가는 과정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사이 나쁜 형제 관계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쪽 모두에서 인간의 일이 인간론과 정치 이론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서론’ 27쪽)
‘일’의 의미
일을 정의하는 것에 관하여
“아무도 묻지 않을 때 나는 안다. 누군가가 물어 와 설명을 하려고 하면 모른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가 ‘시간’을 정의하고자 할 때 가졌던 고충이다. 일을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사람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일은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것보다 이해하기 쉬운 것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 인식의 그물망은 그것을 늘 놓치고 만다.
일을 정의하는 것의 어려움은 『라보렘 엑세르첸스』 초입부의 다소 기이한 일의 ‘정의’를 설명해 준다. 거기서 일은 “몸을 쓰든 머리를 쓰든, 그 성격이나 환경에 상관없이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으로 정의된다. 일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 진술은 일을 인간의 다른 활동과 개념적으로 구분할 필요를 일으킨다. 그런데 이 진술 뒤에 따라오는 것은 직관력에의 호소다. 즉 일이란 “인간이 할 수 있고 본성적으로 하기 쉬운 다른 많은 활동 가운데 일로 인식될 수 있고 인식되어야 할” 인간의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누군가 일이라고 생각하는 무엇이든 일이 된다.
일을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 평범함에서 기인하는 것이 분명하다. 일은 우리 일상에서 “친숙함의 신비 안에 그 의미를 감추고 있는” 것 중 하나다. 게다가, 기술 혁신 때문에 현재 일의 성격은 심오한 변화를 겪고 있다. 한때 일의 세계를 지배했고 ‘일’이라는 단어와 곧바로 연결되던 유형의 일은 하찮은 것으로 축소되고 새로운 유형의 일이 주목을 받고 있다.
유동적인 일상의 현실을 다룰 때 직관에 호소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일의 신학이 그 주제에 대해 직관에 만족할 수는 없다. 한 문화 안에서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활동을 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특정 고찰이 전제하는 일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러한 특정의 행위는 언제나 부분적으로 임의적일 수밖에 없는데, 누군가 한 단어를 특정 의미로 사용할 때 그러한 사용이 그 단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의성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오직 그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이 그것이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방식과 중복되는 부분이 너무 적을 때뿐이다. 그 경우, 단어의 정의는 혼란을 제거하기보다 발생시킨다. 지시적 의미의 혼란을 피하는 것이 ‘일’의 의미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한 가지 이유다. 그러나 단어는 단지 소통 수단일 뿐 아니라 종종 억압의 도구로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가사 노동을 일로 인식하느냐 아니냐는 차이를 만든다. 대부분 경제 선진국에서 어떤 사람이 ‘일을 한다’고 말할 때, 이는 단지 그 사람이 특정 유형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가리킬 뿐 아니라 암묵적으로 그 사람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일하는 것은 좋고, 일하지 않는 것은 나쁘다. 한 사회에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가치가 떨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그냥 가정주부인 여성을 (심지어 그들 스스로의 묘사에서도) 비하하는 표현을 듣는다. 더 나아가, 일은 경제력을 허락하고 따라서 독립성을 부여하며, 집과 더 넓게는 사회에서 활발한 참여의 문이 된다. 주부의 활동은 직장에서 받는 인정이나 보수가 없기 때문에, 주부들은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결정조차 하지 못할 때가 많다.
마지막으로 가사 노동을 ‘일’로 보지 않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많은 여성에 대한 착취를 은폐하도록 돕는다. 여성은 똑같은 일에 대해서도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더 낮은 임금을 받을 뿐 아니라, 일로 인정되지 않는 가사 노동을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이, 한 주에 부가적으로 15-27시간이나 더 하기 때문이다. 책임감 있는 일의 신학이 사용하는 일의 정의는 이러한 억압적 남용을 허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33-35쪽) ©아이앤유크저널
출처: 일과 성령 | 미로슬라브 볼프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2019 간행
글 송광택 목사/ INUC 칼럼니스트/ 한국교회독서연구회 대표 010-6334-0306/ songrex@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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