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이성과 믿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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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개혁신학과 전제주의 변증학 정립을 위한 방향 탐색
인간이 먼저 무엇인가를 노력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은혜를 주셔서 결과적으로 무엇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로마교식 신앙체제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복과 같은 예로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에 의하여 무엇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개혁의 신앙이다.
[교육저널=조용선 선교사]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이성과 믿음의 관계 »
서론
기독교인으로서의 나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나는 그분을 잘 믿고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기독교인인 나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 그렇게 살 때에 나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행복하다. 그런데 사실 이 표현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먼저 복을 주셔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 그러므로 행복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고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면 그 순서는 잘못되었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문제될 것이 있는가? 하겠지만 이 순서가 잘못되면 아주 크게 문제가 된다.
한마디로 쉽게 말해서 인간이 먼저 무엇인가를 노력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은혜를 주셔서 결과적으로 무엇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로마교식 신앙체제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복과 같은 예로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에 의하여 무엇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개혁의 신앙이다. 종교개혁 신앙에도 루터가 중점을 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이 루터교 신앙이다. 한편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에서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전체의 방향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것임을 알고 신앙과 신학을 거기에 맞춘 것이 칼뱅을 대표로 하는 개혁신학이다.
개혁신학은 왜 로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까?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이란 것을 했던 것일까? 많은 부분에서 로마교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에서 떠나 인간의 조직과 신학체계를 만들었다. 그 왜곡과 뒤틀림이 너무나 심하고 그 왜곡과 뒤틀림으로 인해 타락과 부패가 또한 심하여 종교개혁자들이 볼 때에 로마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니었고 로마교의 수장이 되는 교황은 적그리스도(anti-Christ)로까지 불렸던 것이다.
본문에서는 그 많은 내용을 다룰 수는 없고 특별히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기관이 이성인가? 신앙인가? 하는 점을 다루고자 한다. 이 점은 간단해보이지만 사실 역사 전체를 통해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내는 질문이다. 또한 종교개혁의 신앙과 신학이 어디에 있고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다.
조직신학에서도 중요하지만 인류 학문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질문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고대 헬라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인간의 이성을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이 자명한 원리(原理)이며 공리(公理)라고 했는가? 하는 것이다. 헬라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처음부터 철학을 그들 사상의 기반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철학이 발생하기 약 1천 년 전부터 그들은 제우스와 올림포스 산의 신들을 믿는 신앙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버리고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을 그들의 기반으로 삼으며 변화를 꾀했던 것일까?
헬라인들이 만든 이 철학의 원리는 단지 그들의 세상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알렉산더 왕의 정복 사역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전파되었다. 뒤이어 세워진 로마제국도 헬라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공인되고 기독교의 세상이 되었지만 중세의 로마교는 헬라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로마교는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헬라철학과 기독교 사상을 합하여 로마교 체제를 만들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생에 걸쳐 로마교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진을 만들었다. 자연과 초자연 세계를 분리하고 그것을 각각 이성과 신앙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체제를 정립했다. 그러나 이것은 거미줄로 쳐놓은 방어진이었다. 이성의 거대한 해일이 과학과 수학을 통해 다가오자 중세의 로마교 체계는 무너지고 정신과 사상의 세계에까지 이성은 자신의 요새를 건축했다.
이 시기에 종교개혁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오직 신앙으로 받아들여 세계관과 진리의 체계를 형성했다. 이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신앙이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전제주의 변증학’(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이라고 한다.
종교개혁 이후에 세상은 이성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18세기와 19세기는 이성의 시대였다. 이성은 하늘 끝이라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날 평지의 바벨탑은 무너지지 않고 하늘에 닿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계대전은 인간의 희망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중국에서 엄청난 숙청을 통해 사람을 죽였던 공산주의 사상은 모두 인간의 이성에서 나온 괴물들이었다.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여 해체와 의심을 중심사상으로 하는 후현대주의(post-modernism)시대를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대전 이후 70여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에스라의 유대교 공동체와 같은 것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과학과 자본주의를 결합하여 인간이 신이 되는 ‘호모데우스’(HomDeus)의 세상을 열어가고 있다.
이제 또 하나의 질문은 이런 세상에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오직 믿음으로 수용하여 세계관을 형성하는 기독교인들이 정말 그럴싸한 과학이 만들어내는 생명나무의 열매가 가짜임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짜 생명나무의 열매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참된 계시이시고 그의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 진리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이성의 어떤 해일도 이겨내는 반석이 되는 것!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그렇게 인도하는 것! 이것을 이루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이 글을 작성한다. 그러므로 나의 신앙의 지식이 어느 정도이든 상관없이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하여 내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글을 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본문
1장 로마교와 개혁신학
1절 로마교의 계시와 신앙 체계
내용은 이렇다. 로마교에서는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를 분리한다. 자연계시는 인간의 이성으로도 파악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초자연계시를 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계시는 일반은혜와 상응하고 초자연계시는 특별은혜와 관계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2절 개혁신학의 계시와 신앙 체계
그런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구조이며 인식이다. 로마교의 잘못된 인식에 대해 종교개혁을 수행한 개혁신학은 하나님이 말씀하는 정확한 구조와 인식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데 그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이다. 그런데 일반계시 안에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가 다 포함된다. 이 계시를 대상으로 보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자연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이란 개념을 기적, 하나님의 현현, 예언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에 하나님이 현현이 없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인간을 에덴동산에 거주하게 하시면서 그 아담에게 현현하셨다. 기적이나 예언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다 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까 로마교에서 자연에는 기적, 하나님의 현현, 예언 같은 것이 없다고 하고 이성의 인식에 의해 다 이해되는 그런 자연에 하나님의 일반계시만 상응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교리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탄이 뿌려놓은 가라지 씨앗과 같은 잘못된 가르침에 거의 세뇌되어 하나님 말씀의 참된 구조를 흐리게 알거나 잘못알거나 거의 관심 없이 감성과 감동의 이야기와 사건들을 통한 어떻게 보면 인본주의적이고 인위적인 은혜를 추구하는데 빠져있다.
3절 개혁신학의 좀 더 깊은 설명
좀 더 개혁신학의 계시에 대해 설명하겠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계시이시다. 하나님은 자연의 피조물들을 통해서도 계시하시고 성경을 통해서도 계시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다. 하나님은 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은 특별계시에 속하고 특별한 은혜가 된다.
혼동을 막고 분명하게 기억토록 하기 위해 다시 말한다. 로마교가 말하는 방식, 즉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로 나누고 이것을 ‘일반계시=자연계시’, ‘특별계시=초자연계시’ 로 분류하는 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이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하시고 계시물(啓示物)은 피조물의 세계인 자연과 성경이라는 것이다. 자연에 자연과 초자연이 다 있고 그 내용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인간을 구원하시는 계시와 은혜를 특별계시와 특별은혜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시 자연과 성경에 다 나타난다.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를 보아야 하는데 성부하나님은 계시 자체이시며 성자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계시는 성경에 기록되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과 계시는 외적원리라고 한다. 이것을 신자가 인식하고 믿고 알게 되는 것은 성령님의 작용이다. 이것은 내적 원리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님은 신자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는 조명의 작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자신도 계시하신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당연하다.
2장 로마교는 왜 이성과 신앙의 두 체계를 세웠는가?
1절 밀려오는 이성(理性)의 해일(海溢)
문제는 저 로마교가 왜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을 인식하고 초자연은 신앙으로 인식한다는 두 체계를 세웠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십자군 전쟁이후로 이슬람 세계로부터 들어온 고대 헬라 세계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유럽에 퍼지면서 문예부흥을 일으켰다. 문예부흥은 옛 헬라와 로마의 정신과 문화와 사상으로 돌아가자는 것인데 그들이 세웠던 학문의 원리가 바로 인간의 이성을 기준으로 세운 것이다. 원리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아르케 αρχη이고 라틴어로는 principium이다. 이것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는 자명(自明)함을 뜻한다. 다른 말로는 공리(公理)이다. 공리(公理)란 모두가 그렇게 안다는 것이고 자명(自明)함이란 스스로 명백(明白)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성을 앞세운 거대한 문화의 해일(海溢)에 로마교는 인간 이성이 소용되는 영역을 자연에 쥐어주고 나머지 초자연의 영역은 신앙으로 인식한다는 두 체계의 경계를 만든 것이다.
2절 이성의 해일이 나아간 방향
현재 개신교의 적지 않은 사람들도 이성이 지배하는 구조에 영향을 받고 있다. 사실 로마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연과 초자연의 영역을 이성과 신앙으로 구분하고 로마교를 보호할 방어진을 만들었으나 한번 흔들린 유럽의 로마교 체제는 이성에 의하여 잠식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일본 후쿠시마에 몰아닥친 해일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성의 해일은 몇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흔히 사상과 철학에서 프랑스 데카르트의 합리론과 영국 베이컨의 경험론 그리고 독일 칸트의 이성비판에 의한 관념론을 말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단지 사상과 철학에서 그런 사유가 발생했다고 해서 세상이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3장 물리학과 수학: 해일발생의 더 큰 진원지
1절 물리학: 만유인력
그것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힘을 준 것 만큼 움직인다는 것,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따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바탕의 틀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기적, 현현 등 초자연의 영역은 우주라는 저택의 지하 창고에 두고 자물쇠로 잠가두는 결과를 낳게 했다. 로마교의 원리로 따져보면 초자연의 영역은 신앙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초자연이 사라졌고 감금당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성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의 방어벽을 쳐서 보호하려고 했던 것은 이제 이성의 거대한 해일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2절 기하학: 사물의 구체화
과학은 사실 여기서 멈춘 것이 아니다. 수학에서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미분학이 등장한 것이다. 사실 미분학을 말하기 전에 적분학과 기하학에 관해 말할 것이 있다. 플라톤은 그가 만든 철학자들의 학원인 아카데미아(Akademia)에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글을 써 놓았다. 현대인이 볼 때에 플라톤의 말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철학은 모든 학문이 종합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수학도 고대 철학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수학은 가장 명징한 논리의 학문이기 때문에 철학을 할 때에 중요한 학문이었다.
기하학(幾何學)은 geometry 라고 하는데 도형과 공간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영어의 뜻은 지구를 측정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고대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를 측정하여 알고자 했다. 그렇게 지구를 측정하고자 하는 생각은 모든 물체들을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타났다. 눈에 보이는 삼각형, 사각형, 원형 등의 2차원적인 평면만이 아니라 3차원적 입체 모양을 나타내는 원뿔 모양 등 예를 들어 산은 원뿔 모양이다. 이런 모든 세상의 물체들을 측정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3절 적분학: 공간(空間)의 구체화
이때에 적분 수학이 나오게 된다. 적분(積分)이란 것은 가령 예를 들어 원형에서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낼 때에 사용되었다. 나는 아르키메데스가 적분의 원리를 발견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는 사각형 모양은 가로와 세로를 곱하면 그 크기가 나오는데 원형은 사각형을 다시 대각선으로 자르면 삼각형이 되는 것을 이용하여 원형의 곡선과 사각형의 직선 사이의 차이를 줄여 나갔다. 즉 원형 안에는 사각형으로 잘라내고 나머지 네 방향에 남은 반원형의 모양은 계속해서 분할해가면 원형은 결국 삼각형 모양의 총합과 유사해진다. 이 방식을 통해 곡선의 원형은 직선으로 변환되어 원형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다시 2차원의 평면에서 3차원의 입체에까지 발전되어 갔다. 이것이 적분(積分)이며 기하학(幾何學)이다.
그러니까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조건으로서 바로 이 기하학을 알고 세상의 물체들을 측정할 수 있는 사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곡선을 직선으로 풀어서 값을 계산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세상의 모든 물체들의 크기와 값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이런 수학의 발견에서부터 인간이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4절 미분학: 시간(時間)의 구체화
그렇다면 미분은 무엇인가? 미분은 입체의 기하학과 연관된다. 가령 예를 들어 나무숲에서 열 그루의 나무들이 성장속도와 환경이 다르지만 각각 자라나는 것을 어떻게 예측할 것인지 하는 문제를 생각하면서부터 미분수학이 나온다. 전체의 예측에 대한 것은 라이프니츠 (Leibniz) 가 생각한 것이고 날아가는 포탄이나 위성 등이 한 시간 후에 어떻게 이동할 것인지를 그 지점을 알아내는 것을 생각하면서 미분을 연구한 것이 뉴턴(Newton)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예측이다.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물체의 변화를 측량해내서 예측하는 것이 미분수학의 중요개념이다.
뉴턴의 미분학에 대한 예를 쉽게 들면 5초 전에 에 쏜 화살이 날아갈 때에 5초 후에는 어느 지점에 있을 지를 측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바람, 화살의 상태, 각도 등 여러 가지 환경의 요소가 고려되어야 한다. 이 화살을 각 초단위로 계산하여 예측을 할 수 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초 단위보다 더 작은 단위에서 계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4장 현대 과학
과학을 말하는 김에 약간 시대를 넘어 현대까지 과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살펴보자.
1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E=mc² 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E는 에너지를 뜻한다. m은 물질이다. C 는 속도이다. 이 등식은 에너지가 물질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물질이 있는 세상이 이전에는 어떤 형태였을까? 를 추정하게 한다. 또한 물질이 엄청난 속도를 갖게 되면 그 물질은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핵분열과 혹은 핵융합을 통해 가공할 파괴력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 파괴가 일어날 때에 빛과 열이 발생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원리의 발견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2절 시공(時空)의 구체화: 빛은 30만km이다.
빛을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다. 빛을 물리학적으로 윤리학적으로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정말 그 빛이 무엇인지는 사실 잘 모른다. 빛은 우주 안에 있다. 우주는 흔히 시간과 공간이라고 한다. 시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의식이 갖는 우주의 단위이다. 시간은 의식하는 피조물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존재한다. 우주가 포함하고 있는 또 하나의 단위는 공간이다. 공간은 거리 개념으로 인식된다. 이 둘의 개념을 하나로 묶는 것이 빛이다. 빛이 1초에 가는 거리가 30만km이다. ‘빛의 1초(시간)=30만km(공간거리)’ 이 등식의 성립으로 인간은 우주의 시공(時空)을 연관 짓고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빛은 시간과 공간을 측량(測量)하는 도구이다.
3절 과학: 우주 시공(時空)의 장악
자 이제 하나의 작은 결론을 말하겠다. 인간은 적분(積分)을 통해서 측량하기 어려운 곡선이 만들어내는 크기를 직선으로 만들어 측량할 수 있게 있게 되었다. 기하학을 통해서 입체도형의 값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사물들을 다 측량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다음 미분(微分)에서는 시간의 변화를 측량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시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통해 인간은 에너지와 물질과 속도의 상관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우주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빛의 1초= 30만km’라는 등식을 발견하여 우주의 시공(時空)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신이 되는 길로 가고 있다.
5장 철학: 판도라의 상자를 나온 이성
1절 대륙의 합리론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세상은 원인과 결과로 설명 가능한 세계가 되었고 그 안에 있는 시간과 공간과 사물들은 수학의 적분학과 미분학과 기하학을 통해 인간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진행 될 때에 인간은 인간의 정신세계와 사상을 파헤치고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는 체계를 구축했다. 그것이 곧 데카르트의 생각에서부터 시작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cogito ergo sum 의 명제가 유명해졌다. 생각하는 존재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합리적 사유는 모든 것을 판단하는 틀이 되었다.
2절 영국의 경험론과 이신론
그러자 영국에서는 경험론이 중시되었다. 인간의 머리는 원래 ‘글자가 쓰여 있지 않은 석판’ 즉 하얀 백지와도 같다고 하여 tabula rasa라는 말이 유행했다. 영국에서는 이신론(Deism)이 등장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들을 자연스럽게 해석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실 어린이가 예수님께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치자 사람들이 몰래 감추어 두었던 도시락들을 꺼내놓게 되어 다함께 나누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기적이 빠진 세상의 해석이란 이런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 원인과 결과로 해석되는데 재미는 하나도 없었다. 우주는 정교하게 구성되어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휴가를 떠나셨다. 세상에 관여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여겼다.
3절 독일의 관념론
독일의 칸트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아무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인간의 순수한 이성에서 볼 때에 하나님 존재는 증명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판결은 사실 퇴장시킨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다만 칸트는 인간을 윤리적 존재로 보았고 하나님은 그 윤리적 인간에게는 유효하며 그 유효함에 의해 신 존재는 저택의 골방에 누워 영양주사를 맞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윤리에서의 이성을 실천을 위한 이성이라고 해서 실천이성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그 실천이성에서 검증 가능하다는 것이다.
4절 슐라이어마허: 신앙과 신학의 뒤집어진 방법론
슐라이어마허는 이런 상황에서 등장했다. 그의 지식인 친구들은 이신론자들로서 슐라이어마허가 무엇인가? 쓰기를 원했다. 그때에 슐라이어마허가 쓴 것이 「종교에 관해서: 종교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에게 하는 연설」(ü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n unter ihren Verächtern) 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당시 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경시하는 것에 대해 일종의 거룩한 분노의 마음으로 썼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글은 그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갔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것이 이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감성이 근원이라고 했다. 이것은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판단하려고 했던 당시의 시대풍조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감정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 슐라이어마허의 글은 한편으로는 큰 환영을 받았지만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신학이라는 것은 여하튼 하나님을 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앙의 근거가 경건한 감정이라고 하니까 이제 신학은 누가 어떤 신앙이었는가? 하는 것이 신학의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어떻게 느꼈고 어떻게 표현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앙은 무엇이고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어떠한가? 하는 것이 신앙과 신학이 되었다. 이때부터 교회사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이 열렸다. 신앙과 신학의 방법론에서 완전히 코페르니쿠스적인 뒤집음이 일어났다. 슐라이어마허를 비유하자면 마치 제우스가 보낸 상자를 연 판도라와 같았다.
5절 스피노자의 일원론
신앙과 신학의 방법이 이렇게 뒤집어지자 이제는 여러 사람들이 다양하게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등을 말하며 그것을 신앙이고 신학이라고 했다. 리츨은 칸트가 말한 실천이성 즉 윤리를 중심으로 세상을 구상했다. 슐라이어마허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은 유대계 네덜란드인이었던 스피노자이다. 그는 유대교의 일신론과 데카르트의 기계적 필연성에 관한 사상을 종합하여 일원론을 수립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33XX45700021
6절 헤겔의 범신론
일원론이란 것은 세상을 하나로 해석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과 세상이 있다. 이것은 적어도 창조와 피조가 있다. 그런데 일원론은 창조와 피조의 구분을 하지 않고 세상을 하나로 해석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헤겔은 관념에 의한 절대 정신의 구현이 세계라고 했다. 이것은 신과 세상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이런 세상은 변증법을 통해 진보한다. 그 진보를 이끄는 것은 절대정신이다.
7절 유물론: 뒤집어진 범신론
그런데 포이에르바하는 정신의 일원론을 물질의 일원론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상을 만들어 냈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인류에게 어느 정도의 피해를 주고 있는지를 잘 알 것이다. 경제에서 공산주의는 나라를 가난하게 했고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었다. 경제의 해방을 부르짖던 고전적 공산주의가 실패하자 최근에는 신 마르크스주의가 나와 사상에서의 해방을 시도하며 동성애자등 성 소수자들의 법적인 보장을 인권으로 해석하며 각 나라와 민족들마다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반적인 자연의 개념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결혼은 자연스럽고 정상인 것으로 보는 관념 속에 살아왔다. 성경도 이것을 말씀하고 있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이고 진리로 믿고 알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이성은 기존의 상식이 문제가 있다고 하며 사람들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6장 원리(原理)이전의 세계: 헬라 신화의 계보
여기서 다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원리(原理)의 개념으로 돌아가 보자. 내가 한 가지 의문을 품는 것은 그가 이성을 학문의 원리로 삼기 전에 헬라에서의 원리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4세기의 사람인데 기원전 2천경에 헬라 세계를 구축했던 사람들의 자명함과 공리의 원리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놀랍게도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을 믿듯이 헬라인들 역시 신들의 계시를 믿는 그 믿음의 관점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1절 고대 헬라 신들의 세대
헬라인의 신앙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그녀의 아들이면서 남편이 된 하늘의 신 우라노스 사이에서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 다른 신들과 여러 타이탄들을 낳았다. 그 이후 크로노스의 아들인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제거하고 그의 형제자매 신들과 함께 올림포스 산에서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2절 헬라 영웅들의 세대
한편 신들은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여신들과 인간 여성들 사이에 사랑과 쾌락을 추구하며 그들 사이에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영웅들을 잉태했다. 영웅들의 역사는 페르세우스에서부터 시작하여 테세우스, 이아손, 헤라클레스, 아킬레스, 오디세우스에까지 많은 영웅들이 출현했다. 헬라 신화에서는 오디세우스를 마지막 영웅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사실 오디세우스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인 demigod 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에 끼인 것은 반신반인의 세대가 끝나고 이제 인간들의 시대로 전환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헬라 신화는 크게 신들의 세계가 있고 반신반인의 세대가 있고 그 다음은 인간들의 세대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오디세우스는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에서 귀환할 때의 모험 때문에 유명해진 영웅이었다.
페르세우스는 신들이 인간 여성과의 사이에서 창조한 가장 모범적인 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헤라클레스와 오디세우스의 모습은 굳이 성경에서 비교하자면 사사기 시대의 삼손과 사무엘의 모습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겠다. 헤라클레스와 삼손은 힘이 장사였다. 사실 흥미롭게 생각해 볼 것은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디세우스와 사무엘을 비교하는 것은 거의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만 한 가지 오히려 대조되는 점에서의 비교라면 오디세우스는 꾀를 내어 트로이 목마를 만들어 승리를 취하였고 사무엘은 신앙으로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적 블레셋의 침공을 막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절 헬라의 신탁과 이스라엘의 예언
1항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의 신탁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시대는 헬라의 무엇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을 했다면 헬라에서는 각 신전에 신탁(神託)이 있었다는 것이다. 신탁은 우리가 잘 아는 영화 ‘300’에서도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신탁을 받고 300명의 스파르타 친위대 용사들과 더불어 테르모필레 평원에서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의 30만 군사와 맞붙어 싸웠다. 그들은 스파르타 용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들로 싸웠다. 모두가 다 전사할 때까지 두려움을 모르고 싸웠다.
2항 오이디푸스 왕의 신탁
신탁은 헬라 신들의 말씀이었고 헬라인들은 그 말씀을 따라 명예를 얻기도 하고 승리를 취하기도 했으며 비극을 맞이하기도 했다. 비극으로 대표적인 사람은 오이디푸스 왕이다. 아들이 아버지 왕을 죽일 것이란 신탁 때문에 라이오스는 아들을 버렸다. 그런데 그 아들 오이디푸스는 장성하여 자신의 아버지인줄도 모르고 길에서 라이오스를 죽였다. 그리고 젊음의 약을 먹어 청춘을 유지하던 왕비인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테베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신탁은 오이디푸스가 부왕 라이오스를 죽인 살인자임을 밝혔다.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방으로 가서 그녀의 핀으로 자신의 눈을 도려낸 후 이오카스테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안티고네의 부축을 받으며 테베를 떠나 영원한 방황의 길을 떠났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인 「오이디푸스 왕」은 신들이 인간 세상에 어떻게 비극을 만드는 지를 잘 보여준다.
3항 신탁과 예언의 비교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은 세상의 창조에서부터 종말까지 모순 없이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 예레미야와 같은 눈물의 선지자도 있고 죽임을 당하는 선지자도 있었다. 호세아와 같은 경우는 탕녀인 고멜과 결혼하라는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에 맞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다. 헬라의 신탁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과 같은 신탁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미래를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거기에 아무 이유가 없다. 궁극적 해결이 없다. 비극은 오이디푸스 왕의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신탁되었다.
7장 스스로 탐색을 시작하다
이런 신화와 신탁에 헬라인들은 신들을 향한 믿음을 접었는지도 모른다. 시기와 질투와 거짓과 모략과 배반과 전쟁과 힘에 의한 제압 등 너무나 인간과 같은 신들의 모습에 헬라인들은 서서히 신들을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식을 넓혀나가고 있었다.
1절 자연철학자들
자연 대상을 관찰하며 세상을 이룬 근본은 무엇인지를 찾는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자연철학자들이 나왔다. 그들은 우주의 근원을 각각 물이나 불, 공기, 원자 등으로 분석했다. 한편 델포이 신전의 신탁은 ‘소크라테스가 첫째가는 현자’라고 했다. 웃기는 말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수천 년이 지나 한국에서는 나훈아 라는 가수가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라고 하면서 현자에게 묻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여러 뜻이 있다. 시대적으로는 수사학을 말 잘하는 기술로 여기는 궤변론자들인 소피스트들을 향한 말이다. 참됨과 그름, 진리와 비 진리, 선과 악의 개념이 이익을 따라 수사학이 뒤바뀌는 당시 궤변론자들의 모습은 당대에 돈을 따라 변호의 질과 내용이 달라지는 법률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
2절 인간의 내면 탐구: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사람을 향하여 철학이 전개되는 시대가 열렸다는 하나의 예언적인 말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철학은 이후 수천 년 간 인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학문의 기초를 그 때에 다 깔았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개인교습을 받은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더는 왕이 되어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면서 헬라인의 사상과 문화를 그가 정복한 땅에 심었다.
3절 로마제국
1항 아이네이아스의 후손들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문화 위에 다시 한 번 강력한 제국을 형성했던 것은 로마였다. 흥미로운 것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오디세우스가 탄 배는 승자로서 모험을 했고 또 하나의 배는 트로이 성의 장군이었던 아이네이아스가 탄 배로서 그의 여행은 패자로서의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은 후에 로마를 세웠다. 트로이는 헬라의 도시국가였었기 때문에 로마는 신화로서 볼 때는 헬라의 후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로마의 신들은 명칭만 라틴어로 바뀌었을 뿐 헬라 올림포스 산에 사는 12신들을 그대로 로마인들의 신으로 차용했다. 그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을 통해 지중해의 서부를 장악하고 이어서 동부를 점령했다. 그리고 카이사르와 그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모든 문화와 문명이 로마로 통하는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2항 공화정
로마는 사실 왕정으로 시작했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왕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일반적으로 왕은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인데 로마의 왕은 처음부터 로마인들의 추천에 의하여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헬라 문화의 민주주의적 성향이 독특하게 왕정체제에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약 200년간 왕정제도를 유지하던 로마는 그 후 공화체제를 수립했다. 이것도 매우 독특한 정치체제였다. 당시 헬라의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직접민주주의가 시행되고 있었다. 로마는 사람을 파송하여 아테네의 정치체제를 견학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를 채택하지 않고 공화체제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직접민주주의가 가져올 수 있는 비효율성과 혼란 그리고 시민들이 높은 시민의식을 갖지 않으면 인기영합에 의해 저급한 우민정치가 될 것을 로마가 미리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00년의 공화체제에서 로마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포에니 전쟁을 통해 스페인 지역을 포함한 지중해 서부 지역을 장악했다.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지중해 동부지역을 정복하고 카이사르에 의해 현재의 프랑스 지역과 영국의 남부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3항 로마제국과 기독교
한편 지중해 전역을 로마의 호수처럼 만든 로마는 300명의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움직이는 공화체제가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는데 비효율적인 것을 느꼈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는 로마를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는 제국으로 전환시켰다. 비록 그 자신은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암살을 당했지만 그의 양자였던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는 실질적으로 황제 체제의 로마를 완성시켰다.
문제는 이 시기에 예수님이 탄생하셨고 그의 복음은 12사도와 이방인을 위해 따로 세운 바울에 의하여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로마가 수백 년에 걸쳐 칼로 정복한 영토는 예수님의 사도들에 의해 복음으로 다시 정복되었다. 이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기독교와 로마는 치열한 영적 전쟁을 했다. 인간의 이성을 한껏 높이는 헬라 사상이 저변에 깔린 로마는 그 위에 실용성을 더했다. 그러나 너무 높아진 강함은 화려함과 사치가 되었으며 마침내 죽은 황제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 황제도 신으로 숭앙케 하는 우상숭배에 빠졌다. 황제주의는 로마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성경은 이미 인간이 힘과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에 인간 스스로를 높이는 의식과 문화가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던 인간들에게서부터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느브갓네살이 금 신상을 만들고 경배하게 하는 것과 다리우스가 자신에게만 기도하도록 하는 명령들이 다 여기에 속한다. 이런 황제주의가 가장 강하게 나타난 것은 중국이다. 진시황이 진 제국을 건설한 이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때까지 중국의 황제는 그의 말이 곧 신의 말이었다. 옳은 것도 황제가 그르다고 하면 그른 것이 되었다. 이것에 대항할만한 종교가 중국에서는 없었다. 오히려 유교는 충효(忠孝)의 사상으로 황제의 권력을 더욱 강하게 했으며 유교학문을 따르는 무리들은 그 황제와 함께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청나라가 무너졌다고 해서 현재 중국이 황제주의를 버린 것은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의식은 여전히 자신들을 황제로 여기고 있다.
8장 하나님 계시의 영적 전투
1절 이단에 대항하여
이 시기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전통이 교회를 강하게 결속시켰다. 헬라 사상과 문화에서 오는 밀의종교 그리고 로마 제국에 복속 되어 있던 지역인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온 이원론 신앙과 이집트의 종교, 그리고 인도의 사상까지 영향을 끼쳐 수많은 이단들이 발생했다. 외적으로는 로마의 핍박과 내적으로는 이단들의 사상을 이겨내며 사도들의 전통을 중심으로 하는 초대교회는 여러 가지 인위성이 있는 로마교회의 모습도 있었으나 여하튼 교회를 중심으로 로마 사회에 사랑으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며 끈질긴 생명력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는 300년간 받아온 박해의 사슬을 끊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다.
2절 구전 계시와 기록된 계시의 시대
다만 문제는 기독교가 신앙의 자유만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힘과 권력을 향유하면서 서서히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사도들의 전통이 필요했던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가 글로 기록되어 완성되기까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기록되기 전에는 사도들이 구전으로 전하는 그 말씀은 그대로 계시였다. 그러나 거짓된 문서들을 가려내고 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는 사도들의 구전은 그 기능을 다한 것이다.
3절 로마교의 잘못된 인식과 주장
그런데 로마교는 사도들의 전통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사도들의 으뜸으로 베드로를 거론하고 로마교회는 베드로의 사도권을 승계한다고 주장했다. 제국이 동과 서로 분할되고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때에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던 레오 1세가 보여주었던 지도력은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그러자 로마교회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레고리 1세가 로마교회의 수장이 되었을 때는 본격적으로 교황체제가 시작되었다.
4절 교황 체제의 심각성
교황 체제의 심각한 문제는 살아있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큐리오스’(κυριος) 즉 ‘주’라고 고백하던 사람들이 이제 서서히 교회의 수장을 황제로 섬기는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교황과 교황주의자들은 교회의 전통은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성경이 기록되기 전부터 진리의 근거로서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유익을 주지만 교회의 전통은 필수라고 배우며 말은 교회라고 하지만 그 정치적 위계질서를 따라가면 결국 교황이 절대자로서 교회를 통치하고 지도한다.
교황은 나중에 교회만이 아니라 세속의 영토마저도 통치해야 한다는 사상을 내놓게 된다. 사상은 행동을 선행한다. 그러므로 사실 사상은 종교에 버금갈 정도의 강렬함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경제적 평등과 자본가들로부터의 해방을 말할 때는 기독교인이 복음과 구원이란 단어를 들을 때와 같은 희망과 희열을 느낀다. 그러므로 진짜 순수한 공산주의 사상가들은 자신을 몸을 불태우도록 내어주는 정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 그것은 참 사랑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여하튼 사상은 매우 강렬한 것인데 로마교 내에서 교황주의자들이 생각할 때에 타락한 세상을 교황이 직접 통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들은 동로마제국의 황제와 충돌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프랑크 왕국의 후예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과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더 나중에는 신성로마제국이 명분으로만 남고 실제 유럽의 각 왕국들이 힘을 낼 때는 그들과 더불어 통치권을 놓고 싸우기도 했다. ‘교황은 태양(Sun)이고 왕들은 달(Moon)’이라고 하는 교황 인노센트 3세의 말은 로마교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9장 중세의 붕괴
1절 토마스 아퀴나스: 이성과 신앙의 두 체제
그리고 이제 유럽의 힘이 강력해졌다고 생각할 즈음에 순례자들을 핍박하고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 세력이 위협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전쟁이 실패로 결론 났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한다는 로마 교황의 절대적 권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슬람으로부터 넘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학문들은 로마교 체제의 유럽을 붕괴시켜나갔다. 여러 가지 현상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의 이성이 점차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바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했듯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방지하고 기독교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이성(理性)의 해일(海溢)을 방지할 수 있는 방어벽으로 자연과 초자연을 나누고 자연은 이성의 영역으로, 그리고 초자연은 신앙의 영역으로 분리하여 기독교를 존립시키려고 했다.
2절 이성(理性)의 해일(海溢)
그러나 이런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이성의 가차 없는 공격은 데카르트, 베이컨, 칸트의 3단 파도 공격과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의 감성과 윤리의 공격, 그리고 스피노자, 헤겔로 이어지는 관념의 일원론과 범신론 다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카를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는 명백한 선언을 하게 되었다.
10장 현대의 이성
1절 현대의 모순
로마교가 유지하려고 했던 이성과 신앙의 두 체제에서 신앙은 살해당했다. 이제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시날 평지에 바벨탑이 하늘에 닿은 듯 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1차, 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이성이 만드는 세상에 대해 심각한 의문과 회의를 갖게 했다. 인간은 천국을 만들지 못하고 지옥을 만들었다. 히틀러의 나치즘과 무솔리니의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악마 그 자체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데리다는 해체주의를 선언했다. 인간이 건설한 모든 것을 해체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는 성향이 나타났다. 이것이 후현대주의(post-modernism)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파괴된 실존 그 자체를 얼싸안겠다는 실존주의가 등장했다. 실존주의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원래 인간의 본질이 어떠하다는 정의(definition)가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와 같이 유대인을 학살하고 일본의 ‘이시이’ 준장 같은 사람이 731부대를 만들어 인간을 실험용 통나무라는 뜻의 ‘마루타’라고 부르며 각종 화학, 세균 실험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을 그대로 부둥켜안는 사상이 곧 실존주의였다.
2절 새로운 이성(理性) 체제: 호모데우스
세계대전 후에 약 70년이 흐른 지금, 인간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서겠다는 에스라의 바벨론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자본주의가 결합을 하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제대로 철저히 반성하지 않았고 그 불완전함을 숨긴 채 이제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호모데우스’(HomoDeus)의 세상을 꿈꾸고 있다. 히브리 대학의 유발 하라리는 역사학자이다. 그는 「사피엔스」를 통해 인간의 진화와 종교가 갖는 의미를 분석했다. 그리고 「호모데우스」를 통해 인간이 신이 되는 세상으로 들어섬을 선포했다.
이제 인간들은 스스로 신(神)이 되려고 한다. 물질의 원자들을 파열시킬 때에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로 세상을 파괴할 수 있는 원자폭탄과 또 원자의 융합을 통해 원자폭탄보다 수천 배 강한 수소폭탄과 같은 것을 갖고 있다. 생명체의 정보가 담긴 DNA를 발견하여 생물의 DNA들을 결합해서 지구에 없던 전혀 다른 생물체도 만들어 낼 수 있다. 또 생명체가 노화하는 것이 염색체 끝에 있는 ‘텔로미어’(telomere)임을 알아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으나 다시 돌아갈 필요 없이 인간 스스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단계에 접근하고 있다.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오늘의 지경에 이르렀다.
11장 인류의 미래: 영생의 두 길
1절 두 그루의 생명나무
지금 인간에게는 두 그루의 생명나무 열매가 놓여있는 듯하다. 하나는 인간이 만든 생명나무의 열매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나무의 열매이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생명나무의 열매는 인간이 선악을 알게 나무의 열매를 먹고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는 그 불완전한 능력으로 만들어낸 영생의 열매이다. 여기에는 회개가 없고 겸손이 없다. 하나님을 제거했고 인간 스스로 신이 되었으며 인간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는 열매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의 열매는 믿음과 회개와 겸손을 가는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먼저 생명나무의 첫 열매가 되신 그 나무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을 간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나무의 길이다.
어떤 길을 가야할까? 인간의 이성으로 스스로가 신이 되며 인간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 인간의 길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신앙이 최고이며 유일한 판단의 기준임을 알고 회개와 겸손의 길을 가며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길을 갈까?
2절 우주는 계획되었다
나는 하나의 힌트(hint)를 통해 인간이 가야할 길을 숙고하기를 기대하며 말한다. 최근에 천체물리학자들은 이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만일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것은 상자 안에 스위스 시계부품을 다 집어넣고 흔들었더니 최고급 시계가 만들어져 나왔다는 것보다 더 확률이 없는 이야기란다. 천체물리학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주는 계획(design)되었음을 시인하고 있다. 설계자(designer)가 있다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롬1:20)
세상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설계자가 있다. 성경은 그 설계자가 하나님임을 말씀한다. 하나님은 설계자일 뿐만 아니라 창조자이시다. 그는 자존자이시며 주권자이시며 전능자이시다. 그는 인간을 위하여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그 안에 우리를 살게 하셨다. 스스로는 영원하시면서 인간의 모든 것을 복되게 하셨고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좋게 여기셨다. 우리 인간은 말씀으로의 창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제2위 하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나타난다. (롬5:8) 또한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롬8:26) 당신은 어떤 생명나무의 길로 가고 있는가?
결론
세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설정한 학문의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현대의 학문 세계를 열어간다. 그것은 이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헬라인들도 이전에는 그들의 신들이 있었다. 신들을 향한 믿음이 약하지 않았다. 그 신들은 인간이 두려움을 갖기에 충분한 능력들을 갖고 있었다. 성경의 선지자들의 예언에 해당할만한 신탁도 있었다. 그런데 헬라인들은 그런 신들을 향한 믿음을 버리고 인간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철학의 세계를 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들은 인간이 믿고 영원히 따라갈 만한 계시가 없었다. 그 신들은 인간들의 마음이 투사되어 있었다. 다만 불멸이고 능력이 더 뛰어났을 뿐이다. 오이디푸스 왕이 겪는 삶은 문학을 위해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비극으로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으나 그것이 헬라인들의 현실이라고 할 때는 왜 그러해야하는지? 신들로부터의 명쾌한 답이 없다. 오히려 짓궂은 신들의 장난에 인간만이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결국 그 신들은 헬라인들이 순종하고 할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가야 할 그 자리를 인간의 이성이 대신한 것이다. 계시와 신앙으로 가야할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헬라인들은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잃어버렸고 포기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의 기능 중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이성을 모든 것을 판단할 척도로 택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탐색해갔다.
기독교는 이와 같은 헬라 이성의 체제와 로마제국에서 300년 동안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독교가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탄의 전략 중 첫 번째 물리적 핍박을 이겨낸 정도였다. 위협 다음에는 언제나 유혹이 온다. 그 유혹 앞에 중세의 로마교는 하나님의 계시와는 전혀 다른 교회체제를 만들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유익한 정도로 취급되었고 교황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절대 진리의 자리에 앉았다. 교황은 교회의 이름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은 로마교의 실패였다. 교황의 권위는 무너져갔고 이슬람 문화 속에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가 슬며시 유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것은 문예부흥을 거치며 서서히 거대한 이성의 해일로 바뀌었다. 그 위험을 직감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의 두 체계로 로마교를 보호하려고 했으나 이성의 해일은 로마교 신앙체제를 겉 껍데기만 남겨놓고 다 황폐화 시켰다. 해일이 쓸고 간 일본의 후쿠시마 지역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곧 이성의 해일이 쓸고 간 중세 말기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던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와 그것을 믿음을 받아 세상을 사는 진리 인식의 체계가 다시 회복되었다. 그것이 곧 개혁신학이다. 현대의 이성은 이전보다 더욱 극성하였다. 그것은 우주 끝까지 모든 것을 분석해낼 것 같은 현대 과학의 진보가 만들어 놓은 결과였다. 인간은 이제 우주창조와 생명의 신비를 풀어가고 있다. 곧 생명나무의 열매가 인간의 손에 얹힐 것 같다. 우리의 개혁신학의 진리 인식 체계는 더욱 더 범람하는 이성의 해일을 넘어설 수 있는가?
한 가지 힌트(hint)가 있다. 그것은 우주 끝까지 살피는 천체물리학자들이 우주는 우연(偶然)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하여 계획(design)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우주가 우연(偶然)이 아니라 계획된 것이라면 생명도 우연에 의한 진화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설계를 하고 창조한 존재에 의한 계획이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는 신앙으로 그 계시를 수납한다. 믿음으로 수납된 계시는 우리에게 진리의 세계관을 형성케 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은혜와 평안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삶을 살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나아간다. 이성은 생각에 민감하다. 그러나 신앙은 계시에 반응한다. 일반적으로 생각은 이성을 자극하고 잘못된 길을 만든다. 우리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을 모든 것의 판단 기반으로 삼는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한다. 이것이 개혁신학이고 전제주의 변증학으로서의 신앙이다. ◙
글: 조용선 선교사 / 교육저널 칼럼니스트/ 총신대 일반대학원 조직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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