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고대 기독교 역사 유물관 연 김규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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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대학교, 김규동 박사 수집 유물로 실크로드 고대 기독교 역사 유물관 개관
최근 광신대학교는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역사유물관을 개관했다. 그 주인공은 중국에서 28년간 선교사로 활동한 바 있는 김규동 박사이다. 그는 지난 4월 7일 광신대학교 중앙도서관 2층에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역사유물관’을 오픈했다. “개문견산(開門見山: 문을 열어 산을 본다)”이라는 중국 성어를 인용해, 문을 여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김 박사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만류에도 부르심과 사명에 의해, 지난 수년간 실크로드의 사막길과 초원길을 정탐하며, 기독교 역사를 탐사했으며, 그 결과로 수많은 유물을 발굴했다”며 그 결과물을 수집해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역사유물관을 개관하게 됐다. 본지는 김규동 박사로부터 실크로드 고대기독교연구소와 역사유물관에 대한 의미를 함께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편집자 >
[대한민국, 광주=유크 본지] 실크로드 고대 기독교 역사 유물관 연 김규동 박사 » 인터뷰
그 동안 고대 기독교의 일부인 “경교”에 관련된 부정확한 시각들에 대해 고고학적 입장에서 좀 더 쉽게 이해를 돕고자 한다. 경교의 “景”은 “비추다”라는 뜻으로 “널리 두루 비추는 종교” 즉, 동서남북 창조주의 섭리를 그대로 반영하여 칭한 명칭이다. 그래서 경교의 교리에 “사방에 비추다(四方照亮)”이라는 말이 나오게 됐다.
금번에 개관하게 된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역사유물관”은 어떤 곳인가?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어렵겠지만, 그동안 아시아 역사는 서구적 사고에 의한 교육과 연관되어서 전반적으로 이뤄졌다고 본다. 실제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도 이러한 정황이 가득하다. 즉, 복음의 서진이 강조됐다.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이라는 강력한 다이너마이트가 터졌는데 그 폭발로 인한 파편이 어찌 서구만을 향해 갔느냐! 이러한 의문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거의 일방적으로는 서구적 역사 인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끄럽게도 우리가 가지는 역사 인식이란 게 얕을 수밖에 없고, 스스로 자문화를 낮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 왔다”며,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사도행전의 역사가 서구 쪽의 시각으로만 전수되어 온 현실을 개탄스러워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우연이 아니란 사실을 체험하게 됐다. “다행스럽게 여기는 점은, 제가 부르심에 순종하고 실크로드 현장에 가보니, 뜻밖에, 과거 기독교가 동진한 사실들을 보게해 주시고 그 현장에서 고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됐었다. 그 결과물들을 모아서 금번 전시관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동안 학계에서 이뤄지지 않았던 기독교 동진의 증거와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뿐만아니라, 문서와 유물을 통해서 한층 더 가깝게 역사적 진실에 다가설 수 있도록 준비된 장소라 하겠다”며 금번에 개관한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역사유물관에 대한 자긍심을 역설했다.
김 박사는 한중수교 이전부터 중국에서 유학을 시작했다. 그리고 28년 동안 사역해오다 지난 2018년 12월 9일에 철수했다. 중국에서는 태권도 기술고문 자격 비자를 받아 전문인 선교사역을 했다. 주로 교회개척, 신학교수사역, 이단/사이비종파연구, 1500년 전 실크로드따라 동진해 온 고대 기독교(경교)를 연구했다고 한다. 그는 열심히 선교사역을 담당했다고 밝힌다.
“비즈니스를 통한 전문인 사역을 10년 이상하면서 평일 새벽과 저녁, 주말에는 성경공부와 소그룹을 인도해 왔다. 피부미용샵을 운영하면서 더 폭넓은 만남이 이뤄졌고, 이야기식 전도를 통한 사역이 점차 열리기 시작했다. 사모는 피아노를 지도하며 반주자를 양성했고, 저는 태권도, 스포츠, 유화그림을 지도하며 더많은 현지인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또한, 운영하는 에스더선교센타의 지체들이 실크로드 선교에 동참해주면서 북방 5개 지역 사역을 하게 된 것”이 결정적으로 그동안 개신교에서 이단아로 취급받던 초대교회의 이탈자인 ‘사막교부’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김 박사는 동방기독교사를 연구하게 된 동기가 자연스러운 사역의 흐름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된 배경을 “10여 년 전부터 중국 이단/사이비 종파에 관한 연구에 심혈을 올리고 있었다. 중국 신학생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단 종파 강의로 이해를 도울 때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형태와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었다”라며, “그러면서 그동안 개신교에서는 이단으로 취급받던 초대교회의 이탈자인 ‘사막교부’들에 관심을 두고 접근하다 보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놀라운 사실은 막상 동방기독교에 관한 연구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해보니, 생소하기도 하고 또 너무 방대했다. 또한,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에 편중되어 학습되어 온 사실과 내 주변 문화권의 역사에 관해 소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며, “동방 기독교인들의 경건한 삶의 여정과 복음에 관한 역동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처음 동방기독교를 접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그 마음이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의 달음질처럼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속히 알려야겠다는 흥분과 기쁨이 온통 들끓었고, 상식을 초월한 그들의 복음 행정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당시의 경험을 술회했다.
실크로드(비단길)란 말은 1877년 독일의 리히트호펜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중국의 장안에서 로마까지의 동서양 교역로를 가르친다. 비단, 도자기, 향료, 차, 황금, 보석, 거울, 약재 등 셀 수 없이 많은 물품이 낙타나 말의 등에 실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사막길을 오갔다. 이 길을 따라서 교역뿐만 아니라 문화, 종교(불교, 기독교, 이슬람,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천문학, 지리학, 수학, 의학도 동양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으로부터는 나침반, 인쇄술, 화약이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야말로 실크로드는 동서 간 문명교류의 대동맥이었다.
김 박사는 “이 실크로드는 크게 3가지 길이 존재했는데, 유라시아 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동서교류 통로인 북쪽의 ‘초원길’과 중앙아시아 사막지대의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오아시스길’로 나누어서 보통 실크로드라 하면 이 길을 말하며 로마에서 중국 장안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해상루트’이다. 낙타와 말을 이용해 도자기를 대량으로 안전하게 육로로 운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생긴 루트이다. 그래서 세 번째 실크로드를 도자기의 길, 향료의 길이라고도 불렸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실크로드를 통해 기독교가 어떤 양상으로 세계로 퍼져나갔는지에 대해서 김 박사는 “사도바울에 의해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었다는 점은 익히 알듯이 ‘서방’으로 향한 루트이다. 그러나 동시에 동방으로 전해진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배우질 못했다. 바울이 유럽의 빌라델비아 해변에서 사역을 펼치고 있을 때, 복음이 동쪽으로도 움직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동방교회는 안디옥 학파의 정통신학 사상을 이어받아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하는 것을 반대”하고 “십자가 외의 다른 형상은 사용하지 않고”, ‘사후의 속죄론을 부인“하는 점에서 오늘날의 개신교와 상통하다.” 며, “특히 소아시아에 자리 잡았던 ‘동방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도 더 선교적인 교회였다”고 말했다.
김 박사가 연구한 자료에 따르자면, “동방교회는 로마제국의 관리들과 서방교회(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의 박해를 피하여 시리아,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반도까지 가게 됐다. 그러나 그곳에서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자 다시 더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의 인도, 아프가니스탄, 티벳 등지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 지역은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가 된다”고 한다. “거기로부터 동방교회는 신학교와 수도원을 세워 젊은 청년들에게 신앙적 훈련을 지도하고 선교사역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성경과 의학 등을 가르쳤다”고 설명했다.
“당시 동방교회는 27개 대교구가 있었는데 주로 실크로드 전역에 걸쳐 분포하였고, 10만 명 이상이 되어야 대교구로 인정받았다. 즉, 1500년 전 실크로드는 그야말로 기독교 왕국이었다 해도 절대 과장되지 않을 것”이라며, “635년부터 1370년까지 근동 중앙아시아에서 동방교회의 활약은 적어도 500년의 번영기를 지냈다. 동방교회는 중앙아시아로부터 더욱 동진하여 7세기경 당나라에 들어왔으며, 여기에서 다시 한반도와 일본 등지까지 진출했다. 13세기경에는 27명 이상의 대감독과 200명 이상의 감독들이 중국과 그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캄보디아는 5세기 때, 동방 기독인이 6만 명이나 되었고, 태국과 베트남에도 전파되었고, 심지어 극동인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사할린까지 전파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고 동방 기독교의 선교가 순탄한 것 만은 결코 아니었다. 톈산산맥과 파미르의 설산이 동진을 좌절시키기도 했다.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반도까지 가게 된 동방교회 선교사들은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강력한 핍박에 부딪혀 20~30만 명이나 순교하게 됐다 한다. 이러한 박해를 피해 더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티벳 등지에 자리 잡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수 천 미터의 높은 설산을 만났다. “만년 설산의 고봉을 넘어가기가 너무 힘들고 동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칠고 험난한 환경이 그들의 열정을 꺾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복음의 사명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이쯤에서 갑자기 동서무역에 뛰어든 ‘소그드인’을 만나게 됐다. 그들은 무예가 뛰어나고 후일 신라까지 오게 된 사람들이다”고 극적인 반전의 드라마를 설명했다.
김 박사는 “비즈니스에 뛰어든 대다수의 소그드인이 복음화 되는 데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척박한 산간지역이 그들의 주거지였다. 동방교회 선교사들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설산을 넘어 더욱 동쪽으로 향하게 됐다. 7세기 돌궐족(지금의 신장지역)은 어마어마한 복음화를 이루었다. 무역하는 소그드인들의 영향으로 논농사 밭농사하던 중국인들이 장사를 알게 되었으며, 소그드인들 역시도 복음화 대열에 동참하여 극동까지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역사가 이를 밝혀준다. 몽골사막 무덤에 누인 그들을 한결같이 동쪽을 향해 누워있을 정도로 땅 끝 선교를 향한 사명이 느껴졌다”라며 가슴 뭉클한 감동을 드러냈다.
하지만 선교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기독교가 당나라 유입 전, 복음에 대한 그들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행보와 당대 이후 식어버린 행보가 대조적으로 구분된다. 이는 한국교회의 선교적 대안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는 김 박사는 “첫째, 이들은 불교 유교 도교의 관용어를 사용했다. 지금의 우리 시각으로 평가절하해서는 안될 것이다. 둘째, 주로 특권층에 포커스를 맞췄다. 당 태종의 아버지 고조 이연의 어머니가 터키계 돌궐족으로 기독인이었다. 셋째, 불교는 이미 대중화된 상태이고 당나라의 국력 또한 이미 부강했기에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다. 넷째, 불교 경전 번역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불교 토착화의 성공을 답습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다섯째, 교의학상 충효를 강조하는 등 토착화의 종교를 따라했다. 여섯째, 전국에 100여개의 예배당을 세웠다. 일곱째, 의술로 소문났다. 중국은 전염병이 많아서 중의학 발달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며, 당나라 시대 기독교가 어느 만큼 자리를 잡았는 지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활동의 정점에서 결국 동방 기독교는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실패의 첫째 원인을 찾아보면, 당시 당나라가 부강해지면서 모든 종교가 세속화 되고, 종교는 단지 악세사리에 불과해졌다. 둘째, 정치에 밀착했다. 황제의 종교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타종교는 영향을 받았는데, 동방 기독교는 이에 대한 안목이 없었다. 셋째,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중앙아시아에 전파됐을 때 만해도 순수했는데 유목민이던 그들이 중국에서 정착하고 비즈니스로 풍요해지자 현실에 안주하면서 사명감이 시들해졌다. 또한 당나라가 부강해지면서 외세를 배척했다. 넷째, 주도권 이양을 하지 않았다. 경교비를 보면 현지인 이름은 없고 시리아인 선교사 이름만 있다. 다섯째, 감독과 수도사 등 주교는 결혼을 못하게 했다. 중국은 농경사회라 가족 중심이었는데 독신의 삶은 선교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여섯째, 불교는 중국인들이 인도 현지까지 가서 번역을 해오는데, 경교는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서둘러 토착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일곱째, 동방기독교는 끝까지 현지화 되지 못하고 외래 종교로 남았다. 여덟째, 이슬람이 아랍지역에서 팽창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할 때 동방기독교는 돌아갈 길이 막혀 결국 중국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시류를 보고 판단하는 안목이 없었던 것”이 쇠퇴의 원인이 됐다고 말했다.
김박사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이 반면교사로 삼기에도 아주 좋은 모델이 될 것이라며 사실상 안목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동방기독교를 끝까지 괴롭힌 장본인은 다름 아닌 로마 가톨릭이었다. 바타칸의 집요한 음모는 동방 기독교 선교의 발목을 잡았는데, 이단시하며 내쫓는데 앞 장을 선 것도 그들인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방기독교는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끝까지 아람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기도문과 찬송은 시리아어를 고집했다. 그들이 주거했던 곳마다 돌 십자가가 발견된다. 이곳에 비치된 유물들은 주로 원나라 시기의 것으로 몽골제국이 강력한 위용를 자랑할 때의 것으로 작은 십자가 팬던트들이 그것이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당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니고 다녔던 표식이다. 7세기 이슬람의 팽창으로 인해 중국인들에게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그리고 서로 간의 신앙공동체임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인 셈이다.
김박사는 “그동안 미진했던 기독교 고대사에 관한 학문적 검토가 활발히 이뤄져야 하겠고, 일부 재검토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우리가 기존에 서양식 사유체계와 학습에 편중되다보니 우리의 문화권에 대한 이해감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오해와 편견이 자리잡기 시작해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상당한 저해가 있었다. 또한, 개신교에서는 고대사에 관한 충분한 자료확보와 연구가 병행되지 않았을 뿐더러, 고고학적인 측면에서도 마땅한 증거자료가 불충분하여, 균형잡힌 기독교 교회사가 정착되지 않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무엇보다도 우리가 속해 있는 범아시아권에서 이뤄졌던 복음화의 현장을 좀 더 발굴하여 연구발전 시킬 의무가 있다”며, “금번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유물관은 향후 이러한 측면에서 균형잡힌 학문으로서 자리매김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연구소는 고서확보와 번역수집, 국제포럼을 통해서 기독교 고대사에 대한 좀 더 방대한 지적 창고를 넓힐 계획”이라고 앞으로도 꾸준히 고대 기독교 역사를 발굴하고 학문체계를 넓혀갈 계획임을 밝혔다.
김 박사는 곧, 대만으로 출발할 계획이다. “저는 선교사이고 다만 2년전 중국에서 추방 당해서 잠시 대만으로 사역지를 옮기는 곳이지만 조만간 다시 대륙을 깃점으로 실크로드에서의 활동을 미리 내다보고 있다. 대만은 제가 신학과 목회를 해왔던 곳이기도 해서 익숙한 나라이고, 대만의 화련에 있는 선교로 소문난 교회의 초대받아 가게 되었다”면서, “그곳은 원주민들이 주로 사는 고산지역이고 지진이 잦은 곳이고, 복음화율은 높은 편이지만 신앙형태가 무속적이어서 정통복음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고 싶다. 현지에 교회개척과 신학교 강의를 병행하고 또한 대내외 선교동력화를 위해 사역을 진행하려는 계획을 가졌다” 며, 자신을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 박사는 금번 광신대에 개관한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유물관의 역사적 의미와 취지에 대해서 되짚었다. 그동안 고대기독교의 일부인 “경교”에 관련된 부정확한 시각들에 대해 고고학적 입장에서 좀 더 쉽게 이해를 돕고자 한다. 경교의 “景”은 “비추다”라는 뜻으로 “널리 두루 비추는 종교” 즉, 동서남북 창조주의 섭리를 그대로 반영하여 칭한 명칭이다. 그래서 경교의 교리에도 “사방에 비추다(四方照亮)”이라는 말이 나온다. 특히 이 말은 그들이 소유하고 다녔던 신앙인의 표식인 청동 십자가에 자주 등장하는 “卍”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불교의 상징적인 심벌을 가져다 사용한 게 아니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고대 당시 어느 특정 종교의 심벌이 아닌 문화 예술 종교 등 석기시대부터 자주 사용되어 “빛”과 “동서남북”을 가르키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이렇듯 자칫 지금의 안목으로 고대사를 평가한다는 건 참으로 위험스런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대 동방기독교는 안디옥교회의 전통과 사명을 이어받아 복음전파를 최우선 사명으로 받아 자연스럽게 이 로고를 사용했으며, 당시 이슬람교도와 이단 사이비 사이에서 자신들의 신앙공동체인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한 증표로 사용했다. 앞으로 우리 보수 진영 신학에서 특히 고대 교회사에 대한 연구와 수정이 지속되기를 소망해 본다”는 바램을 피력했다.
김규동 박사/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연구소 소장(광신대), 실크로드 고대기독교 유물관 관장(광신대), 중국 사이비 & 이단 대책 연구소 소장, 광신대학교 초빙교수(고대아시아선교역사), GMS선교사:중국, 대만… <저서> 사막교부 연구(성 안토니우스, 에바그리우스, 카시아누스를 중심으로), 중국 이단&사이비종파 총람, 내가 죽은 십자가 , 장안의 봄: 基督敎東傳史(쿰란출판사, 2019)이 있으며, <역서> 동방교회의 잃어버린 역사(The lost history of Asian churches): Samuel H. Moffett, 1992, 중동의 동방기독교(Eastern Christianity in the Middle East): Andrew Thompson, 2014, 실크로드의 기독교 예술(Christian art on the Silk Road): Hans-Joachim Klimkeit, 1993 등이 있다.
인터뷰 이창배 발행인 ◙ Now&Here©유크digital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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