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불도저를 막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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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이 지혜를 주셔서 알게 하는 것 “명철의 말씀”...
<1:3>은 <1:2>에 나온 “명철의 말씀”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지혜롭게 실행한다고 하는 건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의 성격을 잘 알고 처리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의 반대가 맹목적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며, 성경에 근거가 전혀 없는 신념을 복음이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사이비ㆍ이단입니다.
[정이신 칼럼] 6. 불도저를 막는 법 »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때로 세상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면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아포리즘(aphorism)이나 서점에 가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처세술 관련 서적이 있는데도, 굳이 우리가 성경의 <잠언>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따라가다 보면, 주님이 보여주신 창조의 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 있고, 성령님의 기적을 불러오는 능력이 있기에 사람이 모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걸 얻기 위해 <잠언>을 읽습니다.
<잠언>을 통해 “훈계(히브리어: 무사르)”를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1:2), 훈계는 잘못된 길을 가려는 걸 바로잡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해 보면 겉보기에는 핸들을 가만히 잡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조금씩 핸들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조금씩 핸들을 움직여 자동차가 바른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조정해야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른길에서 조금씩 이탈해 죄악의 길로 가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로 잡아줍니다.
자동차의 속도가 느릴 때는 이런 핸들 조작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동차의 속도가 빨라지면 핸들 조작이 엄청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으면서 핸들을 조작하지 않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마음속에서 늘 죄의 충동이 일어나고,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 인간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핸들을 조작하는 일이 겉보기에는 조그마한 일 같아 보여도, 시간이 흘러 삶의 속도가 빨라졌을 때는 대형 사고를 막는 중요한 예방책입니다.
아직도 어린이들이 타는 세발자전거를 타는 사람에게는 핸들 조작 능력을 가르쳐 주는 훈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를 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능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게다가 차 안에 여러 명의 승객을 태운 버스를 운전하는 일은 소형차를 운전하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잠언>은 “명철의 말씀(히브리어: 비나)”을 깨닫게 한다고 했습니다(1:2).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이미 우리 몸에 체득돼 구체적인 분별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자녀들의 진학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고 배우면서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매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동업하자고 하는데 해야 할지, 어디에 이윤이 많이 남는 투자처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 투자해야 할지, 이런 걸 성경은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령님이 지혜를 주셔서 이런 걸 알게 하십니다. 이게 “명철의 말씀”입니다.
<1:3>은 <1:2>에 나온 “명철의 말씀”을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지혜롭게 실행한다고 하는 건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의 성격을 잘 알고 처리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의 반대가 맹목적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며, 성경에 근거가 전혀 없는 신념을 복음이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사이비ㆍ이단입니다.
이걸 좋게 말하면 신념이 강한 것이지만, 성경적 근거가 없는 신념에 함몰됐어도 그게 옳다고 주장하는 건 유사종교에 중독된 것입니다. 불도저를 들이댈 곳에 들이대야지 아무 곳에나 들이대면 많은 사람이 다칩니다. 코뿔소ㆍ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밀어붙여야 하는 곳이 어딘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야 할 때만 혼자서 가야 합니다. 아무 때나 혼자 간다고,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확증편향에 중독된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길을 혼자 가야 할지, 다른 사람과 함께 가야 할지 분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잠언>입니다.
불도저가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불도저 앞을 가로막으면 사람이 크게 다칩니다. 길을 잘못 들어선 불도저는 그냥 옆으로 비켜서서 엔진에 조그마한 바늘을 몇 개만 집어넣으면 멈춥니다. 불도저 엔진에 바늘 또는 침이 몇 개 들어가면, 그 불도저가 더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길을 잘못 들어선 불도저는 이렇게 막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도저 앞을 가로막고 ‘너 죽고 나 살자!’란 식으로 덤벼들면 안 됩니다. 이게 <잠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지혜입니다. <잠언>은 불도저를 막는 바늘ㆍ침 같은 말씀입니다.
불도저가 아니라 코뿔소ㆍ멧돼지처럼 누가 돌진해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진하는 사람 앞에 바늘을 몇 개만 뿌려놓으면 발이 바늘에 찔려 더는 저돌적인 공격을 하지 못합니다. 저돌적인 습성에 중독된 사람과 맞붙어 싸우는 건 최후의 수단이고, 가장 격(格)이 낮은 대응법입니다. ◙
글 정이신 목사/ 본지 칼럼니스트/ 아나돗 공동체 위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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