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저항의 민족시인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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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안준배 박사] 순수와 저항의 민족시인 윤동주 »
윤동주의 삶, 스물일곱
순수와 저항의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명동중학교의 교원인 윤영석과 민족운동가이며 교육자였던 김약연 목사의 누이동생인 김용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윤동주는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았다. 아명은 해환, 아동 잡지<어린이>를 밤새워 읽으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1925년에 윤동주는 민주국 간도성 화룡현에 있는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명동소학교는 당시 동만주의 정신적 지주인 외삼촌 김약연이 설립하여 경영하던 규양서숙을 후에 산학문의 명동소학교와 명동중학교로 발전시켜 민족주의 교육을 시행하던 학교였다. 명동소학교 4학년 되던 1928년에 고종사촌 형 송몽규와 함께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와 <아이생활> 등의 아동 잡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했다. 그는 연극 활동을 통하여 문학적 재질과 정서를 닦았다. 1929년에는 급우요 형인 송몽규와 함께 <새 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만들어 동요와 동시를 발표하였다.
명동소학교 6년간을 윤동주, 송몽규와 한 교실에서 배우며 뛰놀았던 문재린 목사의 아들 문익환이 있다. 문익환은 학생 자치회가 조직되어 초대신문사 사장이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내는 벽 신문에 윤동주가 시를 발표하였다. 그 후 은진중학교, 숭실학교, 광명학원 중학부를 다니면서 윤동주와 문익환은 함께 수학하면서 상호 영향을 받았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해 1년간 다녔는데, 이 시기에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패, 경, 옥 등의 이국 소녀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중국인 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32년에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계 학교인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윤동주는 그 시기에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웅변을 하기도 했다.
그 시기엔 웅변이 대유행이었다. 용정에서도 학생 웅변대회가 자주 열렸는데 1등은 동급생이던 강원용이 차지했다. 그 웅변대회에 윤동주도 참가하여 ‘땀 한 방울’이라는 웅변 제목으로 3등을 하였다. 강원용과 윤동주는 동갑이고, 젊은 시절 간도 용정에서 공부도 같이 했고, 같은 기독교 신자였다. 윤동주는 1934년 은진중학교 시절에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라는 세 편의 시를 썼다. 윤동주는 은진중학교 3학년이 되자 갑자기 평양 숭실중학교로 유학을 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윤동주는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 <조개껍질> 등 시작을 바표하였다. 1936년에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윤동주는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수학하였다. 그 시기에 연길에서 발행하던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발표했다. 1937년에는 동시에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 등의 동시를 발표하였다.
윤동주는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고종사촌 형 송몽규와 함께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며 <새로운 길> <아우의 인상화> 등 시와 동시 <산울림> <고추밭>을 썼다. 1939년에는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 학생란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에 각각 발표하였고, <자화상> <달같이> <소년> 등의 시작품을 썼다. 1941년 25세 되던 해에 <서시> <또 다른 고함> <십자가> <별 헤는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등 불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42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의 릿교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가 그해 가을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1943년 일제에 의해 징병제가 공표되고, 그 이듬해 1943년 7월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무렵 필자의 장인 구호림은 도쿄 주오대 법학부에 재학 중 학술연구 단체로 위장한 비밀결사 ‘고문’(高文) 그룹을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1940년 6월부터 1942년 5월까지 11 차례에 걸쳐 독립 쟁취 방법을 논의하였는데 방학 때 일시 귀국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구호림은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해방 다음 날인 8월 16일에 출옥하였다. 그 시대 일본 유학생들은 비록 남의 나라 일본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는 있지만, 이심전심으로 조국의 독립을 도모하였었다.
윤동주는 송몽규와 주도적으로 결사한 ‘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1944년 2월 22일에 기소되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로 송치되었고 1945년 2월 16일, 민족 해방의 날을 6개월 앞두고 윤동주는 짧은 스물일곱 살에 숨을 거두었다.
매달 초순에 고향 집으로 배달되던 윤동주의 엽서가 2월 중순에 끊기고 대신 ‘2월 1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부친 윤영석과 윤동주의 오촌 당숙 윤영춘은 후쿠오카 교도소를 찾았다.
윤영춘은 윤동주보다 다섯 살 위로서 가수 윤형주의 부친이다. 윤영춘은 1934년에 월간지 《신동아》 현상 문예에 1등으로 당선된 적이 있는 시인이다. 필명 활빈으로 소설 <간도의 어느 날>, 시 <무화과>, 장편 서사시 <하늘은 안다>, 《백향목》 시집 등을 냈다. 윤영춘은 경교장의 백범 김구가 마지막 순간에 읽고 있었던 시집인 1947년 출판된 《현대중국시선》의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들은 송몽규부터 면회했는데 매일 이름도 모르는 주사를 맞는다는 매우 여위어 있었고, 윤동주도 마찬가지로 주사를 맞아 왔다고 하였다.
일본인 간수의 말에 따르면 윤동주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조선말로 외마디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어쩌면 조국의 독립 만세를 울부짖으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사인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가 생체실험의 제물이 되었다는 주장도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의 생체실험은 당시 일본의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에서 전상자가 속출하는데 수혈용 피가 턱없이 부족하자 식염수를 혈액 대용으로 쓸 수 있는지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윤동주를 민족시인으로 부르는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윤동주의 비극은 험악한 일제 말기와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민족의 긍지를 잃지 않고 순수와 아름다움으로 삶을 이어 나가려고 한 데 있었다. 우리말로 시를 쓴다는 행위가 단순히 시를 쓴다는 것 이상을 의미했던 그 시대에 있어서 그것은 반역을 의미했던 것이다. 자유와 인간 존엄과 순수를 용납하지 않았던 시대적 조류 한가운데에서 윤동주는 여러 몸짓으로 고고하게 홀로 서 있으려 했지만, 일제는 무참하게 그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단지 억압과 굴종의 큰 흐름에 합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대의 물살은 그의 몸에 세차게 부닥쳐 왔고, 그는 생을 마감하면서 ‘저항’과 또 다른 차원의 ‘순수’라는 한국적 정서의 황금률을 세상에 남겼다.
일제는 그처럼 잔혹하게 스물일곱 살의 젊고 순결한 영혼의 시인 윤동주를 앗아 갔지만, 윤동주는 그 일제 말기 암흑기 찬란하게 빛나는 문화유산을 남긴 마지막 한 사람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삶과 죽음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과 비극을 상징하고 있다. 그의 시는 민족의 아픈 상처와 한을 드러낸 세월의 강을 넘어 언제나 겨레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숨결이고 맥박이다.
사진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윤동주
윤동주/ By 미상 –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7448,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95187848
윤동주의 생가/ By Ffggss – 자작,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6038993
친구들과 함께/ 가운데 문익환, 오른쪽 윤동주/ By 미상 – http://www.amn.kr/sub_read.html?uid=1986&section=sc7,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6766724
서시 육필 원고 (1942년)/ By 윤동주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90019, https://ko.wikipedia.org/w/index.php?curid=682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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