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종교 지형을 바꾸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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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칼럼=Dr. Elijah Kim]지구촌 종교 지형을 바꾸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재고 » 2023/03/10 »
미국 무슬림 인구, 2017년 345만명에서 2050년 810만명 두배 이상 증가
미국 CNN뉴스는 퓨 리서치의 연구 결과를 보도하면서 미국의 무슬림 인구 2017년345만명에서 2050년이 되면 810만명으로 두배 이상 증가하며 기독교 다음으로 큰 두번째 종교 집단이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CNN의 A J Willingham의 분석에 따르면 2050년이 되면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과반을 훨씬 초과하게 되고 기독교 공동체는 그만큼 축소되면서 이슬람이 두번째로 큰 종교 인구를 차지하게 된다고 한 점…
글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무슬림들은 중동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무슬림들은 아랍인입니다.
무슬림 최대 국가들은 모두 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에 있습니다.
무슬림들은 예수(이사)를 믿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무슬림들은 다 같으며 그들은 수니파 아니면 시아파입니다.
위의 사항들은 모두 다 “아니요”입니다. 우리는 지구촌에 가장 큰 도전 가운데 있습니다. 이러한 도전은 자세히 보아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성장세는 너무나 놀랍고 빠르고 정교하고 조직적이어서 얼마 되지 않아 기독교 전체 공동체를 능가하게 됩니다. 저의 애기가 아닙니다. 세계적인 유수 기관들인 Pew Research나 Barna Poll, 미국 언론인 CNN과 뉴욕 타임즈가 관련 기사들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많은 논문들은 기독교가 도저히 이슬람을 능가할 수 없는 절망적인 현재의 기독교 상태에 대한 분석을 논하며 연착륙을 한다 해도 지금의 속도로 지구상에 기독교의 힘은 약해지고 이슬람은 새로운 제1대 세계종교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 예측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슬람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된 계기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한 참 하던 즈음 주님께서 기도 가운데 제목을 놓고 기도하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앞으로 이슬람을 연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슬람에 대하여 보통 사람이 아는 정도의 상식 밖에 없던 당시의 저는 유럽 최초로 이슬람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더군다나 1400년 동안 이슬람과 기독교의 관계를 다루는 Christian Muslim Relations을 연구하고 가르쳤던 영국 버밍엄 대학교에서 접하고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일반을 말할 때, 성경과 교회, 교회사와 전승, 문화와 문명, 기독교 예술과 문학, 신학과 영성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대양을 이루었듯이 이슬람은 한 종교이면서도 동시에 거대한 문명 자체였습니다. 코란 형성사, 이슬람 기원, 이슬람 탄생과 메카의 다종교 상황, 시리아 정교회 및 이디오피아 아비시니안 교회와의 관계, 유대 종교와 이슬람 초기 공동체 움마와의 관계, 에비온(유대계 이단)파가 미친 코란의 형성과 초기 이슬람, 우마야드(Umayyad), 아바시드(Abbasid),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화와 안달루시아, 이슬람 재정복이 주는 리콩키스타, 발칸 이슬람화와 오스만 투르크, 중앙 아시아 이슬람 정복사, 북아프리카 및 중동의 세속주의의 도래와 현대 정부, 식민주의 시대와 이슬람 부족주의(민족주의가 아님), 서구 문명과 오리엔탈리즘, 이집트 형제단(Brotherhood) 과 지하드, 하마스(Hamas), 히즈볼라(Hizballah), PLO(Palestine Liberation Front), 이스라엘 건국과 관련한 중근동 근현대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관계, 수차례에 걸친 중동전쟁, 십자군 전쟁사, 기독교 무슬림 관계사, 코란과 과학 관계사,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 이슬람 사법제도, 샤리야와 세속정부, 이슬람 원리주의, 정말 공부는 끝이 없었고, 파면 팔수록 제가 모르는 것 뿐이었습니다. 마치 저는 갓 태어난 갓난애기에서 영유아로, 어린아이로, 소년으로, 청소년으로, 청년으로, 장년으로 그리고 중년으로 급성장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고, 청년기에 이르러서는 뭘 좀 아는 것처럼 느끼다가 종국에서는 저는 이슬람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무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쓰는 이 글은 학문적인 접근과 이슬람 관계된 수많은 사건과 내용들을 열거하기 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스쳐 지나가는 무슬림 이웃을 보면서 느끼는 단상을 적듯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저의 글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지만 이슬람을 연구한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기독교가 난공불락으로 여기는 거대한 선교의 대상에 대한 순례자의 독백임을 말하면서 저의 논지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슬람의 도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950%를 성장하는 이슬람의 도전 앞에 기독교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위기는 “재난의 시작”이기도 하고 또한 “축복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거대한 쓰나미로 밀려 오는 이슬람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으며 반드시 이 도전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노도처럼 밀려오는 이슬람의 물결을 어떻게 우리 시대의 기독교가 대응하느냐?에 있습니다. 20세기 여명에 그 누구도 주목할 세력이 되지 않았던 이슬람은 기독교를 대체할 세력으로 성장하여 전세계를 이슬람화할 목적으로 이슬람 선교인 다와(DAW’AH)를 기치로 전지구촌으로 무서운 속도로 점령하고 있습니다. 필사 몽골 고원으로부터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과 유럽까지 단시간에 점령해 버린 몽골 제국의 기세로 몰려 오는 듯 합니다. 중동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끼고 시작된 3대 종교는 영적 영토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 종말의 시계 침 완성을 위해 달려 가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유대인 공동체 때문에 큰 골머리를 앓았던 로마 제국의 디도(Titus) 장군은 “유대인을 삽으로 떠서 지중해 묻어버리라”고 말하고 지긋지긋한 유대인 공동체(?)를 제거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함락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예언의 성취이지만 예루살렘이 이방인에 의해 밟힐 것이라는 말씀에는 무시무시한 이슬람의 도래가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110만명에 이르는 유대인은 비참한 학살 가운데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화려했던 스룹바벨의 성전, 헤롯이 중건한 제2 성전은 무너지고, 그곳은 들짐승들의 처소가 되었고, 그 후 그 자리에 초대 교회, 로마 천주 교회, 비잔틴 교회가 차례로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7세기에 시작된 꾸라이시(Quraysh, Arabic: قُرَيْشٌ) 부족의 문맹(Unlettered)이었던 한 상인이었던 가난한 청년 모하메드는 한 종교를 일으키게 되고, 그 종교는 이슬람이 되어 예루살렘을 점령한지 1400년을 지납니다. 무너진 예루살렘을 이슬람 최대의 성지로 삼을 뿐 아니라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그 곳에 알 아크사(Al Aqsa) 모스크를 짓고 맙니다. 이슬람 세력의 등장으로 예루살렘 성지 순례 감행하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인류사에 씻을 수 없는 증오의 불씨를 남겨둡니다. 그리고 이슬람 제국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해방된 후 그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독립 선언을 기점으로 성경 예언 성취의 중심 무대에 재등장합니다. 이곳의 중심이 예루살렘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2000년 동안 헤매던 유대인이 치고 들어온 팔레스타인은 중동 화약고에 불을 붙이게 되고 이는 여러 차례의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빼앗고 2000년 염원이던 통곡의 벽에 그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고, 라헬과 레아의 애곡(Tikkun Rachel, Tikkun Leah, 시편 137편, 89편) 기도인 한 밤중의 기도(Tikkun Chatzot)를 마음껏 목놓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통곡의 벽 안 쪽에 위치한 알 아크사 (Al Aqsa) 사원과 황금 돔 (Dome of Rock) 사원은 이슬람의 3대 성지로 솔로몬과 스룹바벨 제2성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자리입니다. 2000년 전 무너진 그 성전에 언제 솔로몬의 성전을 세울 수 있을까 고심하던 유대인들에게 성전 재건 계획은 차근 차근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아랍 리그(League of Arabs)가 버티고 있는 인근 중동 국가들, 이제 새롭게 지도자를 뽑고 힘을 발휘하는 EU 에는 후에 인류 마지막 전쟁의 기운을 감지케 하는 평화의 중재안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3대 종교가 세워지고 세 종교는 제각기 다른 신앙체계를 갖고 존재해 왔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주신 구약, 즉 토라(모세의 율법), 다윗의 시, 그리고 역사서를 바탕으로 오신 메시야에 대한 이견은 3대 종교의 근본적 성격과 본질을 가르게 되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신 것을 받아 드리지 않는 유대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메시야임을 믿는 기독교, 예수님은 메시야(그리스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모하메드는 알라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이슬람은 부분적인 예를 제외하고는 결코 함께 갈 수 없는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의 무슬림 인구는 기독교인 교회 출석률을 앞서간지 오래되었고, 스웨덴의 Malmo, 남부 프랑스 Marseilles (마르세이유), 벨기에의 Brussels, 영국 Birmingham, 덴마크의 Copenhagen 과 런던과 파리는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상당한 무슬림 인구가 점유하여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쇠퇴가 가속화되고 있는 유럽(동유럽 포함) 에만 4천 4백만명의 무슬림이 있으며, 이는 유럽인구의 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인구가 영국을 포함하여 북유럽 및 서유럽에 6%도 채 되지 않는 국가들이 즐비한데 전체적으로 무슬림 인구가 이미 기독교 인구를 상회하고 있게 된 것입니다.
현재 이슬람 인구가 다수인 나라는 이미 50개 나라를 넘어섰습니다. 무슬림이 다수가 넘는다는 의미는 인구의 90% 이상이 무슬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인구의 50%에서 80%에 달하는 국가는 이미 20개나 됩니다. 이를 다 합치면 전세계에 70개 나라가 다수 무슬림 인구를 가진 국가가 되었습니다. (참조: https://www.nationsonline.org/oneworld/muslim-countries.htm#:~:text=There%20are%20about%2050%20countries,between%2050%25%20and%2080%25.)
기독교 진영은 이슬람의 본질과 세력 확장에 대해 모르거나 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코란이 마틴 루터가 언급한 것처럼 투르크(이슬람 세력 지칭)인들을 통해 “단순히 하나님의 채찍”으로 사용했다고 하는 너무나 안이한 대응을 해 왔다는 점입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투르크가 우리 주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으로 사용되고, 분노하는 마귀의 종이 된 이래, 투르크의 주님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채찍을 취하였다.” (Since the Turk is the wrathful rod of our Lord God and the servant of the raging devil, it is necessary first of all to overcome the devil himself, the Lord of the Turks, and thus to take the rod out of God’s hand.)” 라고 하였습니다. 단순한 이단 세력으로 이슬람을 규정한 서구의 관점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져서 우리는 이슬람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한 연구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기독교의 안방이었던 초대 교회의 모든 중동, 소아시아, 동유럽 일부, 북아프리카, 중앙 아시아가 그들에게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지구촌 빅 이슈들
우리가 기독교와 이슬람, 불교와 힌두교와 같은 세계 종교를 말할 때 종교에 다 담을 수 없는 다른 요소가 있음을 봅니다. 예를 들면, 서구식으로 말하면 정교일치의 이슬람 공동체, 경제, 문화, 사법 제도, 결혼, 문명 그리고 삶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와는 너무 다르다는 점입니다. 9/11 사태 이후에 전세계는 새롭게 이슬람에 대한 이해와 접근 방식의 새로운 시도를 노력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복싱의 룰 만을 알던 선수가 축구장에 들어가 복싱 방식의 경기를 하는 것처럼 서구 기독교 문명에 물들어 서구의 눈으로, 서구 기독교 방식으로 이슬람을 대하고 접근해 왔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이슬람은 서구를 이미 이해하고 들어 오는데 서구인들은 무슬림의 배경이나 당위성을 모른 채 받아 들이다가 안방을 내어 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슬람이 발흥하여 이슬람화 한 역사를 추적해 보면 거의 모든 지역이 원래 기독교 지역이었습니다. 중동, 지중해, 북아프리카, 심지어는 중앙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화된 지역이었지만 모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고 기독교 세력은 와해되거나 또는 소수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18억에 달하는 무슬림 인구를 갖고 있는 이슬람 선교는 큰 영적 돌파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슬람은 시작부터 기독교 공동체를 파괴하도록 접근되어 있는데 반하여 기독교는 이슬람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코란은 성경의 무오성을 훼손하고 공격하기 이해 쓰여졌지만 기독교 공동체는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아브라함 종교(Abrahamic religions)인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의 공통점과 유사성 그리고 차이점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의 본질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며 더불어 이슬람 선교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이슬람의 이사(예수)와 재림 그리고 종말론에 대한 견해는 근본적인 견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접근 가능성의 통로를 제공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기도 공동체였으나 이를 벤치 마킹한 이슬람은 더 강한 기도 공동체가 되었으나 제도화되어 기독교의 생명력을 상실한 기독교 공동체는 스스로 무장해제하여 이슬람에게 안방을 내 주었다.
정교일치가 Caesaropapism 즉 세속권력과 교회 권력의 합일에서 오는 잘못된 교회론(천주교회)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고 이는 이슬람 공동체에 앞으로 다가 올 복음에 대한 원천적 차단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이 보았던 이슬람 이단론은 게임의 룰이 전혀 다른 종교에 대한 근원적 문제를 보지 못하고 서구 사회에 주는 이슬람 포비아 확산의 원인이 되었다.
이슬람 공동체 지역에 생존해 있는 기독교 공동체의 화석화와 고립화를 깨는 것이 이슬람권 선교 돌파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
무슬림에 대한 접근이 이해와 논쟁 그리고 정당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 그리고 죄에 대한 구원의 기쁨을 주는 접근이 되어야 한다.
이슬람 선교의 통로가 되는 다와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 선교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1400년이 넘는 기독교와 이슬람 교류사는 같은 실수를 여전히 반복하는 우를 줄일 수 있으며 도리어 새로운 돌파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슬람의 개종과 기독교의 개종의 차이
기독교에 있어서 종교는 믿음의 문제이기에 국가의 체제와 정치, 군사, 문화, 경제, 그리고 사회전반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릅니다. 하지만 이슬람에 있어서 종교는 무슬림대 비무슬림, 선택 사항이 아닌 조건 없는 운명적 굴종을 요구합니다. 일반적으로 비이슬람권에 있어서 종교와 정치 그리고 문화와 삶은 별개의 문제라는 등식은 상식으로 통합니다. 하지만 이슬람권에 있어서 이러한 상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독일의 어떤 크리스찬이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지역에서 무슬림이 기독교나 기타 종교로 개종하는 일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이는 코란이 무슬림이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개종하는 가족 일원에게 명예 살인하지 않는 것도 신성모독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만든 것은 비단 코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와 가족, 공동체와 삶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개종이 관계된 복잡성은 너무나 깊고도 끈질깁니다. 어떤 무슬림이 개종하는 순간 국가가 경영하는 종교 경찰의 심문부터, Hadith 과 샤리아, 정치, 인권유린과 명예살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개종자가 당할 법적 지위의 박탈 즉 Muslim 에서 Dhumi(이슬람의 입장에서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을 지칭할 때 쓰는 말) 인 비무슬림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살아있는 순교의 현장이 됩니다. 너무나 행복하고 편안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우리의 환경과 모든 삶의 영역을 다 걸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 하는 무슬림의 선택은 선택의 순간부터 그 간격이 엄청납니다. 이슬람에서 의미하는 개종이라는 영역의 의미를 우리 기독교들은 주시해야 합니다.
이슬람을 읽는 담론들
A라고 쓰고 B라고 읽는다. 이 말은 특히 일본어를 읽을 때 우리가 자주 쓰는 말입니다. 예를들면 “宇宙」と書いて「そら」と読む”라고 쓰고 읽는 것은 다르게 읽습니다. 이는 후리가나라는 독특한 방식 때문입니다. 일본 15대 천황 오진(또는 오우진, 應神, 당시의 백제 표기 음가와 비슷함)때 백제의 아직기(阿直岐)가 불교 경전을 가져왔고 이를 읽어야 하는 법을 몰랐던 일본인들을 가르치면서 생긴 것입니다. 이후 백제의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가져와서 오진의 아들 우지노와끼이라쯔꼬(道稚郞子)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왕인 박사가 당시 상용하던 이두식 표기법을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신사를 비롯한 많은 곳에 사용하게 하였고 더불어 가타가나 와 히라가나를 창시에 큰 영향을 주면서 백제에서 자주 사용하는 숙자훈(熟字訓)의 응용에서 나온 말이 후리가나입니다. 즉 한자로 우주(宇宙)라 쓰고 하늘(そら)이라 읽고, 한자로 백제(百濟)라고 쓰고 구다라(큰나라)라고 읽습니다. 이슬람을 읽는 방식이 일본의 후리가나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일본어에는 이외에도 칸지와 요미가나도 있습니다. 후리가나라는 이 말은 적어도 이슬람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코란 읽기, 하디드(Hadith) 이해하기, 이슬람의 사법 제도, 이슬람의 신학 대부분은 당시 기독교 공동체를 이룬 유럽인들에게는 그것을 해독하거나 이해할 수 여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유럽인들이 아무리 코란을 읽어도 성경과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이루었던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는 이슬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커다란 간극이 코란에 여지없이 나와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해, 부활과 승천에 대한 부분 등 매우 많은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1,400년 동안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교차로에서 전쟁과 정복과 재정복, 자발적 개종과 강제적 집단 개종, 그리고 무역과 상업을 통한 이슬람의 확장 가운데 이슬람을 읽는 담론들은 계속 변화되어 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화약고(powder keg of Europe) 또는 발칸 화약고(Balkan powder keg)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빗대어 이슬람의 화약 제국(Islamic Gunpower Empire)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슬람은 저기 있는데 이슬람을 읽어 나가는 방식과 관점이 반영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슬람을 이해하는 관점의 변화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삶의 방식
움마 공동체
이슬람 포비아
리콩끼스타
발칸의 발톱
이슬람 이단론
서구 문화 종속론
오리엔탈리즘
이슬람 문명론
이슬람 패권론
삶의 방식으로서 이슬람
이슬람을 종교로 보기보다는 삶의 방식으로 보는 것이 훨씬 이슬람을 이해하는 도움이 됩니다. 기독교 진영은 기독교는 종교라고 생각하지만, 무슬림은 이슬람이 단순한 종교의 영역을 넘어 삶의 방식(A Way of Life ), 문화와 관습과 국가와 정치를 포괄하는 총체적 체재입니다. 이슬람은 삶의 방식(A Way of Life)이기에 종교와 정치를 분리할 수 없으며, 문화와 삶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창조의 질서인 총체적 체재(Holistic System)를 창조한 유일신 알라의 명령과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바로 “Islam” 의 진정한 의미가 됩니다. 중동 어디를 가도, 한국에도 이제 곳곳에 서있는 모스크에는 어김없이 초승달이 달려 있습니다. 모하메드가 메카에 위치한 히라 동굴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첫 계시를 받은 날 밤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다고 하여 수도원의 십자가를 떼어내고 초승달로 대체하게 되었고, 이제 초승달은 이슬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모하메드 이전에도 초승달 무늬는 3세기부터 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이라크 일부와 와 이란 지역을 통치했던 사산 왕조의 왕권의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모하메드가 속한 쿠라이시 부족은 달신을 섬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달신이 이슬람의 상징으로 바뀌어 무슬림의 형제애를 가르치는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이 기독교 지역에 살고 있다 해도 그가 드리는 행위인 예배와 십일조, 구제, 그리고 순례가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는 기독교적 행위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슬람 체재가 한 번 세워진 곳에는 세대와 세대를 거쳐 종교, 정치, 문화, 교육, 군사, 경제 행위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의 총체적 체재에서 벗어 날 길이 없도록 무조건 이슬람 체제에 순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무슬림이 되는 순간부터 꼭 지켜야 되는 몇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이슬람권 아래의 무슬림은 선택의 여지없이 반드시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지켜야만 합니다. 이 다섯가지가 바로 신앙 고백, 예배, 구제, 단식과 성지 순례입니다. 무슬림이 지켜야 하는 기본 행위 다섯가지를 이슬람의 다섯 기둥(Five Pillars of Islam)이라고 부릅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다른 게임의 룰
기독교는 각개 격파식 신앙을 요구합니다. 한 개인 개인의 신앙과 믿음 그리고 회심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이라면 이슬람은 개인의 개종이 우선이 아닌 비록 무슬림이 소수라 해도 살아가는 공동체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즉 기독교식으로 애기하면 선교가 됩니다. 그럼으로 비무슬림에서 무슬림으로 개종시키는 것도 궁국적으로 이슬람의 통합적 시스템 구축을 가능케 하기 위한 전략적 단계에 불과합니다. 이슬람화를 위한 시스템 구축은 다양합니다. 문제는 기독교에서는 이를 선교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개인의 개종, 국제 결혼, 도시 건설, 금융 시스템 구축, 대규모 이민, 인구의 자연 증가, 무역의 증대, 교육과 문화를 통한 다와(Daw’ah)의 구축, 방송 매체, 그리고 정치 통합을 통한 체제 구축이 우리의 용어로 이해하는 이슬람 선교입니다. 이슬람 선교는 모든 영역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전도가 없는데 이슬람은 지난 120년동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950% 이상을 성장했습니다. 1900년의 무슬림은 2억이었습니다. 2023년 지금 19억의 무슬림이 있습니다. 도리어 기독교는 성장이 아니라 정체를 겪고 있고 기독교의 지축이 서구권에서 다수 세계로 옮겨졌지만 이슬람은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엄청난 세력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선교와 이슬람 선교의 근원적 차이
기독교 선교과 이슬람 선교의 근원적 차이점은 개인의 회심과 통합적 시스템 구축입니다. 이슬람의 통합적 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라면 구제, 회유, 한시적 거짓말(이는 포교를 위한 수단으로), 전쟁(지하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단을 불사합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오로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슬람에 있어서 이슬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개인의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이슬람을 받아 들이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으면 비이슬람으로서 평생을 굴종과 굴레에 묶여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비무슬림으로서 이슬람권에 사는 사람의 문제는 매일 매일 드려지는 아잔의 기도로부터 시작해서 마치는 시간까지 법과 제도, 국가와 군사, 경제와 문화, 교육과 인간의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움직이는 통합적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처절한 삶의 문제인 것입니다. 어떤 지역이 일단 이슬람 지역이 되는 순간에 각 개인의 자유와 상관없이 세금과 병역의 의무, 법과 제도 그리고 공동체(움마)의 울타리를 세대와 세대를 걸쳐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슬람 지역에서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으로 세대를 거쳐 생존해야 할 가능성은 차라리 참담함에 가깝습니다. 기독교 진영이 이슬람의 선교 방식을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들은 기독교의 안방을 이전에도 그리했듯이 지금도 밀려 들어 오고 있습니다.
마호메드 사후에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슬람은 엄청난 속도로 주변 지역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마호메드가 죽은 지 불과 몇 년 안되어 아라비아 반도를 이슬람의 초승달에 평정되었습니다. 마호메드의 후예들이 페르시아(지금의 이란)를 정복하고자 벌인 치열한 전쟁은 이슬람 팽창사에 기폭제가 됩니다. 그 전쟁의 핵심에 선 장군 누아만은 크테시폰 전투에서 다음과 같은 선포를 한다. 무타구치 요시로가 쓴 중동의 역사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옵니다!
“우리들은 과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알라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예언자 한 사람을 보냈다. 그는 우리들의 동포이며 게다가 가장 고귀한 집안의 분이다. 그는 우리들을 이교도이 어둠에서 진실한 가르침의 빛으로 이끌어 주셨다. 이미 그는 돌아 가셨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가르침에 속하지 않은 자 모두와 싸우라고 유언하셨다. 즉 그자들은 가르침에 귀화하든지, 공물을 바치든지, 아니면 무기를 들고 저항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만약 가르침을 믿으면 우리들은 그대들에게 왕국을 남길 것이다. 믿고 싶지 않으면 공물을 바쳐라. 모두 원하지 않는다면 싸울 준비를 하라”
상기의 글은 이슬람 선교와 전쟁의 조건을 잘 말해준다.
가르침에 귀하하라! 즉 무슬림으로 개종하라!
개종하지 않으면 세금을 내라!
아니면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겠다!
위의 세가지는 인류 역사 가운데 왜 이슬람이 그토록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단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그 제자들에게 주시고 이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영혼을 그리스도 예수 앞에 이끌기까지 죽음도 불사하고 전하지만 개종을 위한 강요나 또는 세금 부여나 또는 국가와 국가, 그리고 지역과 지역을 가르는 전쟁을 일으키라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천국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천국은 죄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진리만이 영원히 함께 하는 영광의 나라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이 땅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라는 미명 하에 기독교에서 이슬람의 영역으로 개종이나 믿음이라는 영역에 가면 그것을 바라보는 개념과 세계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슬람에 있어서 종교는 개인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슬람의 공격 가운데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공동체(Duhmitude)로 살아온 중동의 기독교인들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 교육과 정치, 문화, 그리고 종교 행위에 이르기까지 불평등 대우를 받아 왔습니다. 이집트 정교회 출신으로 1400년 동안의 처절하고 비참하리만치 아프고도 서글픈 이슬람권 기독교인들의 역사를 담은 “Bat Ye’or 의 “Islam and Dhimmitude: Where Civilization Collide” 을 글을 읽노라면 등골이 오싹하리 만치 돌진해 오는 이슬람의 도전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천년을 넘게 질기고도 질긴 기독교 신앙을 지켜온 중동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모래폭풍 일으키며 그 잔악무도한 말발굽에 숨소리 죽여야 했던 기독교인들의 초라함이 그녀의 책에서 묻어 나옵니다. 여오르(Ye’or)의 책은 이슬람의 두 전략 평화와 정복, 그 대답은 복종(이슬람) 또는 전쟁(지하드)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시스템 구축, 움마 공동체의 실현 그리고 체재를 통한 이슬람 사회 건설이 시간이 아무리 많이 걸려도 결국에는 이슬람 사회가 됨으로 일어나는 이슬람 선교 방식은 게임의 룰이 다른 기독교 선교가 마땅히 대응할 수 있는 방안들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무슬림 선교를 위한 방안 모색을 멈출 수 없기에 먼저 이슬람의 도전이 무엇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은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근원적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화해할 수 있을까요?
전기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을 공통 종교적 기원으로 삼는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은 그 뿌리가 같은 것인가요?
그 뿌리가 같다면 무엇이 같으며, 다른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다른 것일까요?
유대교의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 그리고 이슬람의 알라가 과연 같은 하나님일까요?
창조, 홍수, 출애굽, 모세의 율법,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는 이슬람은 과연 우리가 믿는 성경의 진리를 함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세 종교가 창조와 아담, 노아, 모세 그리고 다윗을 인정하기에 결국은 같은 종교이며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있어 왔습니다.
언뜻 보면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근원적으로 다르기에 세 종교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고, 도리어 그 다름으로 인해 역사상 수 없는 많은 반목과 다툼을 거듭해 왔습니다. 세 종교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종교적 기원을 동일하게 주장하면서도 너무나 다른 길을 걸어 온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 종교의 분쟁과 차이로 인해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는 순간부터 중동 지역에 전쟁의 암운이 드리우고, 예루살렘의 평화가 지연되었습니다. 일명 시간이 갈수록 폭탄 테러와 전쟁이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세 종교간 화해의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이런 세 종교의 건널 수 없는 종교적 간극을 화해시키려는 시도가 20세기 중반에 있었다. 바로 바티칸 제2공의회(Second Vatican Council)입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이는 종교다원주의로 가는 길목에서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킵니다.
녹색지대 이론(Green Belt Theory)
우리가 이슬람을 말할 때 가장 접하기 쉬운 부분은 석유와 천연자원이 풍부한 아라비아 반도이며, 이 아라비아 반도를 거점으로 북아프리카, 이란, 중앙아시아 그리고 남아시아와 동남아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부르나이로 이어지는 지도상의 푸른 지역인데 이를 Green Belt Theory라고 합니다. 시각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슬람이 다수인 국가들이 일종의 띠를 두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북아프리카 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에 해당하는 에리트리아, 소말리아, 지부티, 그리고 이디오피아, 사하라 지역 뿐 아니라 사하라를 넘어선 광범위한 이슬람 팽창 지역과 발칸과 러시아 남부 지역, 그리고 중앙아시아 및 스탄 국가들, 남아시아와 동남아 무슬림 국가들입니다.
그린벨트 이론 즉 녹색지대 이론은 식민주의 시대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서구 열강의 이슬람에 대한 인식은 십자군, 중세와 종교개혁시대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실크 로드 무역을 빌미로 지중해 무역을 거머 쥔 오스만 투르크를 철천지 원수처럼 여겼고 대체 무역을 찾는 끊임없는 노력은 대항해 시대를 열었으며 해외 식민지 쟁탈에 몰입하게 합니다. 이슬람을 선교 대상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식민지 쟁탈에 혈안이 되었던 스페인과 포루투갈은 무슬림을 무어(영어로는Moor, 스페인어로 Moro 원래의 의미는 모로코 사람)로 불렀으며 적대세력으로 도륙하고 처분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원주민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죽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인디오(Indio)를 무어라고 부르면서 무슬림을 죽일 때처럼 그렇게 대량학살을 자행한 것입니다. 특히 스페인이 필리핀에 와서도 원래 있던 무슬림들을 모로라고 불렀는데 후에 미국인들이 이를 무어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스페인은 무슬림 정착지인 마닐라를 포함한 루손 섬과 비사야 제도에서 쫓아내고 민나나오 끝자락으로 내 몰아 냈지만 저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남은 무슬림이 끝까지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식민지 쟁탈전에 뒤늦게 뛰어든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도 스페인, 포르투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무슬림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대부분의 아랍진영이 독립할 때에 콤파스와 자를 가지고 민족과 나라의 경계를 정했던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 공산주의를 완충 시킬 수 있는 녹색 지대를 창안하는데 이를 “그린벨트 이론(Green Belt Theory)”라고 부릅니다. 이슬람 정권의 강화를 도와 줌으로써 소련의 팽창과 남하를 저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린벨트 이론(페르시아어: نظریه کمربند سبز)은 페르시아 자료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외교적 가설이기도 합니다. 소련에 대항하여 강력한 예방 벨트를 만들고 사회에서 이슬람 종교를 부흥케 하자는 것입니다. 19세기부터 커존 경(Lord Curson)은 러시아의 확장을 막기 위한 방패로서 중동에 “국가들의 이슬람 연합”을 만드는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공산주의 제국이 설립되자 서구 열강은 러시아를 저지하기 위한 신생 무슬림 국가의 설립과 연합을 후원했습니다. 이 신생 국가들은 이제 갓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국가들이며 그리고 이란과 중앙 아시아와 아프카니스탄, 남아시아와 그리고 동남아로 이어지는 긴 녹색 벨트입니다. 우리가 지도에서 자주 보는 이슬람 국가들을 녹색으로 표기한 바로 그것입니다. 녹색벨트 이론 가운데 이슬람 신생국가들의 교육 기관 설립을 돕는 것은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그 한 예가 1940년대 파키스탄의 종교 정부를 지원하여 학교를 설립하게 합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인해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종교 단체가 무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서구 열강이 도입한 다양한 시도 가운데 하나는 이슬람의 술탄 제도를 세속주의 민주 공화정으로 변환케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슬람 국가들이 대부분 갖고 있는 민주 공화정 제도입니다. 입헌 군주제라 해도 정교일치의 신정정치가 아닌 정교분리의 입헌 군주제를 도입하도록 종용하였습니다.
이슬람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들
우리는 종종 뉴스를 접하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이슬람의 여러 단면을 접합니다.
왜 ISIS와 같은 테러 조직이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이란의 근본주의(원리주의)는 이라크와 시리아 그리고 레바논 뿐 아니라 중동에서 사사건건 개입하며 때론 사우디와 대립하는 것일까?
쿠르드족 독립, 시리아 내전, 이라크 사태, 예맨 내전, 사우디 아라비아와 예멘의 군사 대치에는 어떤 큰 배경이 있는 것일까?
오스만 투르크의 세속주의와 민주주의는 다른 것인가?
이슬람의 샤리아는 왜 헌법과 사법제도까지 아우르는 시스템 구축을 도모하는가?
많은 테러 조직들이 코란을 인용하는데 테러와 지하드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기독교처럼 선교사나 선교기관도 없는데 이슬람은 계속 성장하고 팽창하는 것일까?
특별히 위에서 한번쯤은 해 봄 직한 질문 속에서는 크게는 이슬람의 속성 그리고 작게는 근현대사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속 국가 출현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우디는 이슬람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 계열이며 이집트, 요르단, 팔레스타인 자치주, 북아프리카 대부분과 파키스탄, 북인도,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무슬림 인구를 갖고 있습니다. 시아파는 이란을 필두로 이라크 일부, 바레인, 레바논 일부, 시리아 일부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에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란은 대부분이 시아파이지만 이라크나 시리아나 레바논이나, 예멘에서 다수인 수니파가 있기에 이들은 전쟁이나 내전의 불씨를 지피는 요인으로서 대립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독일처럼 남북 예멘의 통일을 이루었으나 41%에 달하는 소수파인 시아파 반군 세력(후티)과 나머지는 하디 정부의 주도 아래 있던 수니파는 이란의 지지를, 시아파 후티는 사우디의 지원을 받으면서 내전의 양상은 국제적 국가 관계로 까지 얽히게 됩니다. 이점은 이라크도 마찬가지로 독재자인 사담 후세인은 수니파이지만 이라크의 시아파를 힘으로 눌렀고 미국에 의해 축출되고 사태는 역전되어 이란의 시아파가 이라크의 시아파를 지원하는 형색이 되어 이라크 사태의 해결이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점은 시리아로 가면 더 복잡 해져서 다수파인 수니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잡고 있는 아사드 정권은 시아파의 분파라 할 수 있는 알라위입니다.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의 뒤를 이어 아들 바사르 알 아사드가 정권을 잡고 있지만 그들 소수 정권이 시아파의 일종인 알라위파 무슬림입니다. 당연히 시라아 반군은 수니파이기에 시아파를 지원해 주는 이란, 시리아의 수니파를 지원해 주는 사우디, 그리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 튀르키예의 개입, 알 아사드 정권의 요청으로 개입한 러시아, 그리고 알 카에다 붕괴 이후 내전 상태에서 이라크로부터 세력을 확장해온 ISIS 그리고 이라크, 튀르키예, 그리고 시리아에 걸쳐 있는 쿠르드 족이 맞물려서 실타래가 꼬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겉으로는 같은 이슬람으로 보이지만 실제적인 대립과 내전, 그리고 국제분쟁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을 보게 됩니다. 이슬람의 기원과 역사 가운데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움마 공동체가 생기고 20년만에 칼리프제도를 통한 확장, 그리고 이어진 우마야드 왕조는 수니파가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왕조 자체가 지금의 이란 지역이며 수도는 바그다드가 된 아바시드 왕조는 우마야드 왕조하고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십자군 전쟁,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로 이어지면서 이슬람의 칼리프 제도 이후에 코란과 이슬람 신정정치를 이루는 제도는 끊임없이 에미레이트(이슬람의 대사를 보낸다는 뜻) 제도로, 그리고 술탄을 끝으로 오스만 투르크 이후에 세워진 튀르키예는 정부는 우리가 말하는 세속주의 공화정 체재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북아프리카 대부분 국가들, 예멘의 민주 공화정, 종교지도자가 수반으로 그리고 그 아래 행정 수반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이슬람 원리주의를 따르는 이란도 샤리아를 새롭게 해석한 민주 공화정을 세움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구의 반기독교화와 이슬람의 급속한 팽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해 공인되기까지는 300년이 걸렸습니다. 중동과 중앙 아시아,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의 기독교 지역이 이슬람 지역으로 되기까지는 불과 백 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유럽이 기독교 지역이 된 과정은 2천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습니다. 켈트족과 게르만족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의 후예들이 기독교를 받아 들이기까지 적게는 수백 년 많게는 천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이 비기독교화의 과정을 겪은 시간은 40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유럽의 역사적 세속화(Historical secularization)라고 부릅니다. 유럽은 비기독교화(De-Christianization)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큰 파도처럼 덮쳐오는 이슬람의 파고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총칼없이 유럽은 이슬람화의 과정”을 겪게 될 것이며 “그 기간은 수십년이 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유럽의 많은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를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무엇이 이토록 빠른 유럽 기독교의 약화”를 가져 왔으며, 반면 “이토록 빠른 이슬람의 성장”의 요인은 무엇일까?
기독교 진영이 추구하는 기독교 선교와 전도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회심과 믿음의 선택에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슬람의 선교는 전도와 포교에 있지 않고 제도의 개혁(샤리아 법이 실현 가능하도록)과 금융, 경제, 군사, 문화 그리고 정치와 종교 행위에 이르기까지 통합하는 총체적 시스템 구축에 있습니다.
기독교를 앞지를 이슬람의 놀라운 성장과 새로운 종교 지형도
이민을 통한 유럽의 무슬림 공동체,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에 급격히 증가하는 무슬림 인구 등 지도상에 포함되지 않는 지구촌 곳곳의 무슬림 공동체가 팽창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변화들 그리고 21세기 지구촌 공동체를 흔들어 바꾸고 있는 변화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지금 인류 가운데 이슬람을 통해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는 마치 제가 남아공 희망봉에 갔을 때 거대한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그 자리에 태어나서 그런 굉음을 처음 들었을 때 지구촌 거대한 대양의 부딪침이 일구어 내는 일종의 공포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두 대양의 충돌에도 수면의 모습은 거친 파도로만 비추어집니다. 문제는 수면 하에 대서양과 인도양이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촌에 2천년을 자리하고 있던 거대한 서구 기독교 문명이 가라앉고 있는 그 자리에 이슬람이 수면 아래로 거대한 힘으로 밀어 붙이며 물 밑 듯 밀려 들어 오고 있습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겨우 2억의 무슬림에 불과했으며 지금처럼 아랍 진영의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지도 못했고 대부분 오스만 투르크 하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2023년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는 70개 국가에 달합니다. 만약 지금으로부터 70년이 지난 2100년이 된다면 지구촌의 종교 지형도는 어찌 될까요? 그때 지구촌 인구 35%가 무슬림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참조: https://www.pewresearch.org/religion/2015/04/02/religious-projections-2010-2050/) 그리 멀지도 않은 2070년이 되면 무슬림 인구가 기독교 인구를 능가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기독교는 정교회, 천주교회, 개신교회 모든 합친 숫자입니다. 2015년에서 2060년 사이에 무슬림 인구는 70%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같은 기간 동안 세계 인구가 32% 증가한 것과 비교됩니다. 다른 종교 집단에 비해 무슬림의 젊은 중간 연령과 높은 출산율은 이슬람 인구 증가의 중요한 요인입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무슬림 인구가 이민과 난민으로 타지역의 종교 지형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연구 기관에서는 유럽 국가들 중 절반 이상이 과반 이상의 이슬람 국가로 바뀔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과 리비아의 붕괴로 뚫린 사하라 국경선을 넘어온 엄청난 난민들이 유럽 각국에 정착함으로써 서구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무슬림 공동체를 형성할 것이며 이는 자연증가 플러스 난민 유입으로 인한 영향이 무슬림 주류 유럽을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슬림이 과반수 이상이 될 나라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들이 될 것입니다. 그나마 무슬림 과반을 겨우 막을 수 있는 국가들은 예전에 이슬람 지배를 받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그리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통해 이미 이슬람화가 진행되었거나 견딘 국가들은 무슬림의 증가는 피할 수 없겠으나 서유럽처럼 과반을 넘기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미 발칸 반도에는 알바니아, 북 마케도니아, 코소보,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체르고비나와 같이 이슬람화된 국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CNN뉴스는 퓨 리서치의 연구 결과를 보도하면서 미국의 무슬림 인구 2017년345만명에서 2050년이 되면 810만명으로 두배 이상 증가하며 기독교 다음으로 큰 두번째 종교 집단이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CNN의 A J Willingham의 분석에 따르면 2050년이 되면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과반을 훨씬 초과하게 되고 기독교 공동체는 그만큼 축소되면서 이슬람이 두번째로 큰 종교 인구를 차지하게 된다고 한 점입니다. (참조: https://www.cnn.com/2018/01/10/politics/muslim-population-growth-second-religious-group-trnd/index.html)
글을 맺으며
우리의 역사는 교회가 들어서고 복음화를 이룬 지역들이 차례로 이슬람에게 정복당하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길고 긴 여정을 여과없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와 이란과 중앙아시아를 이슬람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교회는 무력했습니다. 서로마 제국보다 천년을 더 지탱한 동로마 제국의 교회는 이슬람의 화포 앞에 무너졌습니다. 발칸의 기독교 국가와 영지들은 무슬림들에게 도륙되고 약탈되어 그 후손들은 유럽인 가운데 가장 열렬한 무슬림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들에게는 기독교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소련이 무너진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 온 것은 튀르키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국가 재건이었으면 이들은 오랜 준비 가운데 스탄 국가들을 모두 다 이슬람 다수 국가로 돌려 놓았으며 샤리아가 녹아 들어 있는 헌법은 기독교 선교의 발목을 묶어 버렸습니다. 사하라로 계속해서 남하하는 이슬람 세력은 케냐, 탄자니아와 우간다 같은 동아프리카 지역 뿐 아니라 서아프리카 지역에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무슬림 최대 국가들은 인도네시아,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가 되어서 남아시아와 동남아의 무슬림은 세계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이슬람 공동체를 이루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기독교 지역이었던 그곳 무슬림 다수가 된 나라들을 재복음화할 수는 있을까요? 기독교는 엄청난 여리고 성(이슬람 세력)을 보고 두려워하고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 모든 질문의 답은 성경에 있다고 봅니다. 이스라엘을 돌이키시고 성경 예언이 성취되며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가장 큰 길목에 버티고 있는 이슬람권을 주 앞에 돌이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 준 마지막 지상 과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회복과 이슬람 권 복음화는 이제는 물러 설 수 없는 기독교인들의 마지막 남은 영적 전투 권역입니다. 여기에 효과적 이슬람 선교를 위한 영적 전투는 오직 “기도와 간구”로 주께 구할 것을 아뢰는 일입니다. 사탄의 강력한 진을 깨트리기 위해 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중보 기도의 군대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짜야 합니다. 앞으로 그러한 전략에 대한 글을 쓸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1)
이슬람권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보스톤의 김종필 목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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