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생명을 담보로 가길 원했던 크레타섬의 뵈닉스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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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저널=김수길 선교사] 많은 생명을 담보로 가길 원했던 크레타섬의 뵈닉스 항 » 그리스 이야기(15) »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자는데 어이타 우리 님은 꿈이었나…
그리스에서 26년을 사역하면서 앞서 말했듯이 크레데 섬은 두 번 다녀왔다. 처음에는 미항까지만 갔다 왔다. 그러다 몇 해 전에 모 세미나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렸다. 그리고 학습은 크레타섬의 연구였다. 마지막 포인트는 인터넷 검색에서 학자들의 여론이 너무도 분열하여 아직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은 뵈닉스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이 일에 책임을 맡아서, 가려다 포기했던 뵈닉스를 꼭 보기로 했다…
크레타의 역사
유럽 문명의 발생지라고도 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으며 크레타섬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미노스 해양 문명을 꽃피웠다. 오늘날 남아있는 흔적은 크레타의 주도인 이라클리오(Ηράκλειο) 인근의 크노소스 궁전 정도밖에 없지만, 벽화와 도기 등 유물을 보면 무척이나 화려하고 생기 넘치는 문화를 구가했던 듯하다.
섬의 이름인 ‘크레타’도 기원전 8세기 시인 호메로스(Όμηρος)의 일리아스(Ιλιάδα)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성경에서 히브리 민족과 대치되는 불레셋(φιλιστα ο ) 인들은 이곳 크레타(갑돌림)출신 민족들이다. 그러다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 섬은 한동안 외면되기도 했다.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 시절인 826년부터 960년까지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4차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을 점령한 베네치아 공화국이 400여 년간 지배했다. 이후 17세기 중·후반 20여 년간 오스만 튀르크 제국과 공방전 끝에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1898년까지 받게 된다.
힘들게 섬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은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고 세금을 제국 내에서 가장 낮게 하여 나름 안정적인 통치를 이어나갔다. 18세기 말엽에 이르면 섬 인구 중 절반이 무슬림이 되었으나 나머지 기독교도들도 별 차별을 받지는 않았다.
이후 그리스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1821년 그리스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크레타의 그리스인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한다. 독립에 성공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중부 그리스, 끼클라데스 제도와 달리 이 섬은 오스만 튀르크에 엄청난 피의 학살을 당한다. 1895년 크레타의 그리스인들이 다시 봉기를 일으키고 섬의 대부분을 장악하자 1897년 독립을 지원하던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 사건으로 오스만 제국이 더 이상 크레타를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구열강은 크레타 문제에 개입한다. 크레타의 오스만 군을 철수시킨 후 크레타를 명목상 오스만 지배 아래의 크레타 자치국(ΚρητικΠολιτεία)이라는 형태로 독립시켰다.
크레타 자치국은 드라크마 화폐도 찍어내는 등 실제로 독립을 누리다가 1908년 터키의 케말 파샤의 혁명을 계기로 자치국 의회는 그리스와의 통합을 결의하였다. 1912년 10월 1일 그리스가 크레타와의 통합을 선언하면서 그리스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면서 크레타는 공식적으로 그리스 영토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크레타섬의 이야기들
크레타섬은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며 지중해에서는 다섯 번째로 큰 곳이다. 매년 약 삼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휴양지이다. 섬의 길이는 250km이고 너비는 가장 좁은 지점이 15km, 가장 넓은 지점이 65km까지 다양하다. 가장 높은 2,400미터 아타 산 정상의 하얀 눈과 낮은 저지대의 지중해성 기후에 나는 가끔 이곳이 섬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곤 했다.
크레타는 이야기와 전통이 깃든 섬이다. 크레타 외의 그리스의 모든 섬과 지역이 자신들만의 유구한 전설과 역사를 지녔다. 그리고 각양의 귀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에 특별히 크레타는 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 다만 크레타섬을 이야기하다 보니 크레타가 부각된 것뿐이다.
크레타에는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이 거주해 왔다. 고대부터 이 섬 고유의 문화적 전통이 꽃피웠고 수많은 이야기를 낳고 낳았다. 유럽 최초의 문명이 태동한 곳도, 올림퍼스 신들의 왕 제우스가 태어나서 자란 전설도 이 섬이다. 카잔차키스가 태어나고 묻힌 곳도 이곳이다.
그의 작품 속 그리스인 조르바가 춤추던 곳도 바로 이곳 크레타섬이다. 크노소스 궁전과 신화 속의 제우스 동굴 그리고 니코스 카잔차키스 박물관 등이 고고학과 신화와 문학을 넘나드는 이야기와 역사를 품은 섬이 이곳이다.
지중해의 화창하고 쾌적한 기후, 너무도 맑은 공기와 투명한 바다는 코발트라는 색감을 실물로 보여준 곳이다. 바다와 뜨거운 태양, 깊은 계곡과 눈 덮인 하얀 산, 고유한문화와 역사적 전통, 지중해성 음식과 평화로운 해변….
나의 작은 아들이 몇 해 전 “ CBS 성탄 특집 <新성지행전 ‘바울루트’>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때 크레타를 처음 다녀온 후 내게 한 말이다. “아빠 지상 낙원이 있다면 아마 이곳일 것 같아요“ 쉼을 통해 회복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크레타는 이상적인 여행지이다. 아니 모든 그리스는…. 그런데 나는 두 번 다 일 때문에 다녀왔다.
바울의 반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겨울 지내기를 원했던 뵈닉스(피닉스Φοίνιξ)
그리스에서 26년을 사역하면서 앞서 말했듯이 크레데 섬은 두 번 다녀왔다. 처음에는 미항까지만 갔다 왔다. 그러다 몇 해 전에 모 세미나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렸다. 그리고 학습은 크레타섬의 연구였다. 마지막 포인트는 인터넷 검색에서 학자들의 여론이 너무도 분열하여 아직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은 뵈닉스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이 일에 책임을 맡아서, 가려다 포기했던 뵈닉스를 꼭 보기로 했다. 미항에서 뵈닉스로 가는 길은 구글 지도에도 힘들어 보이는 길이 나온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자는데 어이타 우리 님은 꿈이었나.
안오시뇨,
하늘이 무너져라….
별들이 쏟아져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의 전설에 나오는 불멸의 새 봉황(피닉스 Φοίνιξ phoenix)을 찾아서 뵈닉스로 가는 길은 멀었다.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 가보지 않음에 대하여, 그러나 구글 지도를 통해서 너무 보아서인지 길은 익숙했다. 아타 산 해발 2,400미터를 넘는 봉우리에 걸린 구름이 나의 마음을 흐리게 하였다. 굽이굽이 감도는 산등성을 감아 타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바다, 저곳인가 유로 굴로가 뛰놀던 바다가…. 바닷물에 부서지는 햇빛의 잔해가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속을 메스 꼽게 하는 오래된 배의 매연도 기대감에 무거운 마음을 토해내지는 못했다.
도착하여 걷기를 10여 분 작은 교회당과 죽음을 간직한 공동묘지, 그리고 나타난 우리 님은 전설의 피닉스 새처럼, 허물어져 성한 것 하나 없지만 세월을 이긴 고목처럼 나름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울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토록 머물고 싶었던 뵈닉스에는 초병의 눈초리가 느껴지는 워치타워를 중심으로 버려진 듯 널려있는 오래된 도시, 분명한 봉황의 도시 뵈닉스였다.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반기는 임에게 나는 내 마음에 벽오동을 심음을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마치 한 여름밤의 꿈같은 여정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남아있던 흔적들….
아련한 기억들….
성지가 가지는 이름들….
두고두고 보고 싶은….
다시 가고 싶은 곳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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