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동방기독교의 중국 유입설(3~7C)-(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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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B.C. 259~210)의 통일 중국으로 인한 실크로드 개통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사도행전 8장 1절)
고대 동방기독교의 중국 유입설(3~7C) (The theory of the inflow of Eastern Christianity into China) » 기독교가 태동하기 전, 서쪽에서는 로마 제국(Roman Empire)이, 동쪽에서는 중국이 거대하게 발전 중이었다. 물론 육상과 해상의 길이 열려있긴 하지만, 이 둘의 만남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진시황(秦始皇 B.C. 259~210)의 통일 중국(B.C. 221)으로 인한 실크로드 노선이었다. 당조이전(A.D. 618~907), 이 길은 동서양 문명의 교착지로 하서지역의 첫 관문도시는 돈황(敦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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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은 동서양의 문화와 무역의 거대한 장터와 같은 곳이었다. 당시 탐험가에 의하면,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하여 중국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7개월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 노선이 바로 실크로드이다. 이 길은 B.C. 2세기부터 상당히 발전을 이루어 당시 헬라와 로마인들은 중국을 “세레스”(Seres)라 칭했다. 이는 헬라어 “Ser”에서 유래 되었다. 실크(Silk)가 중국에서 생산되었기에 그렇게 불렸다. 이처럼 서역의 길이 열린 후 천 년간,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각국의 대상들(Caraban)이 실크로드를 통해 왕래가 있었다.
그렇다면, 당대 이전에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온 적이 있는가? 그동안 학자들마다 다양한 추측을 제기하지만, 아쉽게도 정확한 사료가 뒷받침되지 못했다. 아래는, 그동안 중국의 사료에 나타난 당대 이전의 기독교 접촉설이다.
1. 사도 도마 전래설(A.D.1C)
초대교회 역사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사도 도마(Thomas)가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또한, 안디옥의 감독이며 유세비우스(Eusebius)의 스승인 도로데우스(Dorotheus, 254~?)에 의하면, 사도 도마는 파르티아인(Parthia), 메디아인(Medua), 페르시아인(Persia), 루만인(Ruman), 박트리아인(Bactrian), 마기인(Magi)에게 복음을 전한 후 자신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인도 카라미나(Caramina)에서 순교했다고 말한다.
도마의 노래
도마 티루반시쿨란(Tiruvancikulan)에서, 유대인과 원주민 개종시키고,
왕까지 개종시켜 안드레라 칭했다네.
다시 또 왕의 조카 켑파(Keppa)에게 안수 주어 교부로 세웠다네.
그 후 도마 남하하여 퀼론(Quilon)에서 일여 년, 거기서 복음 전해 1400명 세례 주고,
그들이 예배할 십자가 세워줬네. 이것이 사도의 영원한 임무라.
다시 또 북상하여 팔라유(Palayur)로 가서는, 사람들이 예배할 십자가 세웠다네.
그후 도마 또 동쪽 땅 칼라(cala) 왕의 영토, 미랄포르(Mylapore)로 갔다네.
거기서 도마는 왕의 궁전 짓겠다며 건축비 받아 내어 구제비로 다 썼다네.
진노한 왕의 처벌을 도마가 기다릴 때, 왕의 아우 나타나 왕에게 고한 말,
사경에서 깨난 자기 하늘 궁전 보았다고.
이 말 듣고 놀란 왕 도마를 용서했고,
트라반코르(Travancore)로 온 도마는 모교회를 방문했네.
도마 다시 여러 곳에 예수교회 세워주고 교사들 임명하여 성령 은사 전했다네.
도마 다시 돌아와선 캅파(Kappa)에게 서품 주고 교회를 위임하여 자기 후계 삼았도다.
도마 다시 기적 행해 얻은 신자 만 칠천 명, 그 중에는 왕이 둘, 브라만도 일곱이라.
말라바(Malabar) 교회의 도마의 전승을 위한 기도예식문
“성 도마로 말미암아 인도에서 우상숭배가 사라졌다.”
“성 도마로 말미암아 중국과 에티오피아가 진리로 돌아왔다.”
“성 도마로 말미암아 그들이 세례를 받고 성부, 성자, 성령을 믿고 고백하였다.”
“성 도마로 말미암아 그들이 오직 한 분 하나님 만을 믿는 신앙을 보존했다.”
“성 도마로 말미암아 인도 전역에 생명을 주는 법이 생겼다.”
“성 도마로 말미암아 하늘나라가 중국에까지 퍼져갔다. 또 성 도마의 축일에 칼데아 교회는 아래와 같은 찬송을 불렀다.”
“인도인, 중국인, 페르시아인들과 또 다른 도시의 사람들이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성 도마의 축일에 찬양합시다. ”
일찍이 말라바(Malabar) 교회의 주교가 쓴 칼데아(chaldea) 기도문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중국인들과 에티오피아인(Ethiopian)들이 사도 도마의 가르침과 전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천국복음이 마치 두 날개를 가진 새처럼 신속히 중국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학자 라금성(羅金聲)은 자신의 동방교회사에서 말하기를 “사도 바울이 서방에서 전도 여행을 시작할 때, 사도 도마는 동방을 향하여 복음전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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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에 의하면, 그는 A.D. 50년경에 말라바(Malabar)의 고대 항구 크랑게노르(Cranganore)를 통해서 인도로 들어왔다. 처음에 그는 동족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나, 그들이 거부하자 원주민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의 헌신적인 복음전파의 노력으로, 힌두교 상위 카스트에 속한 브라만(Brahman)들까지 개종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퀼론(Quilon), 코까망갈람(Kokkamangalam), 말란카라(Malankara), 꼬따꺄얄(Kottakkayal), 니라남(Niranam), 차얄(Chayal), 빨루르(Palur)에 교회를 세워, 목회자들을 양성하여 복음사명을 수행했다. 또한, 그는 남인도의 동해안인 타밀나두(Tamil Nadu)의 마일라뽀르(Mylapore)에 도착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하였다. 한때, 그는 중국까지 가고자 하였으나 생각을 돌이켜서 마일라뽀르의 사역에 집중했다. 그때가 東漢의 明帝 永平 시기이다.
그가 복음전파 사역을 지속하자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이에 분노하며 적개심을 품은 브라만(Brahman) 집단의 선동으로 돌에 맞고 심지어는 창에 찔려, 마침내 마드라스에서 8마일 정도 떨어진 산에서 순교하기에 이르렀다(A.D. 72년). 그의 시신은 제자들에 의해 마일라뽀르에 묻혔고, 오늘날 그곳에 성도마교회(Roman Catholic Cathedral of San Tthome)가 세워졌다.
2. 사도 바돌로매 전래설 (A.D. 1C)
역사학자 왕치심(王治心)은 일찍이 중국기독교사강(中國基督敎史綱)에서 인도의 한 전승을 언급했는데, “사도 바울이 서방전도 시기에, 사도 도마와 바돌로매(Bartholomew)는 동방전도를 시작했다고 했다. 근거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서, 바돌로매는 중국으로 건너가서 활동했다”고 한다. 후일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순교를 당했다.
3. 기독교인 도피설-1 (B.C. 14~A.D. 49)
노득개교시말기(路得改敎始末記)의 기록에 의하면, 주후 34년에 바벨론의 로마제국에서 들어 온 유대인 탄압으로 인해, 그들이 결국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초래했는데 마원(馬援 B.C. 14~A.D. 49)이 교지(交趾)를 정벌할 때의 기회를 얻어 중국까지 들어왔다고 전하고 있다.
4. 시리아 선교사 전래설 (A.D. 25~220)
일찍이 東漢(25~220)시기에 시리아의 동방교회 선교사 두 사람이 실크로드에 도착했다. 그들이 중국에 들어온 목적은 겉으로는 실크 제작과정을 배워 볼 생각이었지만, 실제로는 선교가 목적이었다. 이를 입증할만한 근거는 로마 작가 아르노비우스(Arnobius ?~327)가 A.D. 300년 즈음 쓴 “이교도들에 대하여(Adversus Gentis)”에서 말하기를 “로마교회의 선교사업은 이미 인도와 “세레스(Seres), 페르시아(波斯), 메대(Medes)까지 미쳤다“라고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다.
5. 기독교인 도피설-2 (A.D. 58~75)
연경개교략(燕京開敎略)에 의하면, 주후 65년, 로마 황제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의 기독교인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 69년에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그때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동방으로 피난을 했다. 그 시기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될 때인데, 만일 당시 기독교인들이 중국까지 피난해 왔다고 가정해보면, 시기적으로 동한 明帝(永平 58~75) 연간일 것이다.
마라버(Maraver) 주교는 가륵저사(迦勒底史)에서 “당시에 천국복음에 도처에 확산되어 마침내 중국에 이르렀다…… 중국인과 아리아인(Aryans)들이 진리를 믿게 됨은 모두가 사도 도마에 의하여” 된 것이라고 밝혔다.
6. 서주한화상(徐州漢畵像)의 석실벽화와 구리거울 (A.D.86)
강소성(江蘇省) 서주한화상(徐州漢畵像)의 석실묘(A.D. 86)에는 성경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그 그림 중에는 예수님의 나심과 오병이어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시리아의 선교사들로 인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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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서주(徐州)에서 발견된 구리거울을 분석한 결과 “作神鏡, 尊一帝. 德母目人子. 有王赫. 志, 重, 須, 毓”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서주한화상석예술관(徐州漢畵像石藝術館)의 마환루오(馬煥躒) 연구원은 “직경 13.4㎝인 구리거울의 18개의 글자를 풀이하면 기독교의 동한 전래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며, “이 동경의 제작연도는 동한 후기, 즉 서기 200∼300년경”으로 중국에 기독교가 전해진 역사를 400년 앞당긴 것으로 보고 있다.
7. 三國시기 전래설 (A.D. 238~250)
명대의 유자고(劉子高)의 시집(詩集)과 이구공(李九功)의 진사록(愼思錄)의 기록에 의하면, 명태조 홍무(洪武)시대에 江西省 로릉(卢陵) 일대에서 철제 대형 십자가가 출토되었는데, 그 위에 삼국동호적오(三國東吳赤烏)의 연호가 새겨져 있었고, 십자가 양쪽에는 “四海慶安瀾, 鐵株寶光留十字: 萬民懷大澤, 金爐香篆藹千秋”라는 두 줄의 글귀가 있었다. 여기서 “萬民懷大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속사역을 의미한다. 만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는 십자가를 상징하는 기독교가 삼국시기 이전 중국에 들어왔다는 걸 설명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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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중국과 티벳 전래설 (A.D. 400~500)
주후 100년에 한 선교사가 에데사로부터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 서북 변경까지 갔다는 설이 있었다. 또한, 라브 훅(M. L’Abbe Huc)이 기록한 중국 역사에서의 기독교신앙(Christinity in China History etc)에서 언급하기를, 411~415년 기간 중국과 티벳의 기독교 선교역사에 실루기아(Seleucia) 주교가 주교구를 정할 때, 이미 중국과 인도를 포함했다고 한다. 만일 이 말이 맞다면, 진대(晋代, 400) 혹은 송대 이전(500)에 이미 기독교가 중국에서 활동했다는 증거이다.
9. 남북조 시기 전래설 (A.D. 464~549)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6세기 초 북조 양무제(梁武帝 464~549) 天監8년(509)에, 동방기독교가 이미 중원을 통해 낙양성에 전해 들어왔고, 이때 페르시아경교(波斯經教) 혹은 대진교(The Luminous Religion of Ta-chin)라고 불렸다. 또한, 547년 북위의 양현지(揚衒之)가 기록한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중에 설명하기를 당시 불교가 흥성하고 있는 낙양성에 百國(외국)으로부터 들어온 ’사문(沙門)‘에는 승려가 3천여 명에 달하는데, 그중에는 멀리 서역, 심지어는 대진국(로마)에서 온 승려도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6세기 초 이미 사마르칸드 대주교구(503~520)가 설립되어 중국에 대한 전도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景敎 역시도 실크로드에서 유입된 삼이교(三夷敎) 중의 하나로 중원의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 들어왔다. ◙
저자 김 규 동 Ph.D. Silk Road 고대기독교 연구소 소장, Silk Road 고대기독교 유물관 관장, 광신대학교 초빙교수, 대만 중화복음신학교 교수, 고대기독교 역사탐험가, GMS/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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