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신학 이슈와 초림 예수 즉위 연구-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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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f the Issue of Replacement Theology & the Enthronement of the First Coming Jesus
목 차
- 들어가는 말: 대체신학 이슈
- 유다왕국에 대한 예언과 그 성취
- 초림 예수의 세 번에 걸친 즉위식
- 나가는 말
III. 초림 예수의 메시아 왕국의 등극(즉위, 대관)식
다윗의 세 번에 걸친 등극식, 나단 신탁, 다윗의 등극식, 종말의 메시아, 그리고 “인자 같은 이”의 등극식은 초림 예수의 메시아 왕국의 세 번에 걸친 등극식을 이해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또한, 다윗의 등극식들은 예수의 등극식들을 위한 그림자가 되고 예표가 되고, “인자 같은 이”의 등극식은 초림 예수의 메시아 왕국의 등극식에 대한 예언이 되었다.
1. 예수의 1차 등극식과 그 전후의 세례 요한
회개의 설교와 세례가 세례 요한의 주 사역이었다.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기 위하여 그 앞에 나오셨다. 그가 세례를 받은 직후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내리는 가운데 하늘로부터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그의 1차 등극식이 거행되었다. 얼마 후에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의 제자들이 되도록 이른바 제자 양도식을 거행하였다.
1) 세례 요한과 예수의 세례
누가복음(1:15-17)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자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할 자로 구별되었다. 누가복음 1:39-56에 따르면, 그는 예수와 친족 관계로 그의 모친의 복중에서부터 동정녀 마리아의 복중에 성령으로 잉태된 태아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고 기뻐하며 반겼다. 그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1) 회개의 설교와 세례
세례 요한의 사역은 유대 광야에서(마 3:1) 다음과 같이 설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 3:2-4; 막 1:2; 참조, 눅 3:4-6).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그에게 나아와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회개의 징표로 그로부터 물로 세례를 받았다(마 3:5-6; 막 1:5).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그를 대적하며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자칭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7-10; 참조. 눅 3:7-9)라고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그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이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였다(눅 3:15). 그리하여 그가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참조, 눅 3:16).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그는 자신은 회개를 목적으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가 예비한 길을 밟고 오실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 3:10-11; 눅 3:15-17).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문맥에 따르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회개의 징표로 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메시아의 성령세례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 회개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아 물로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메시아의 불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이 메시아의 불세례는 곧 그의 심판이다. 이는 불세례가 언급되기 전과 후에 언급된 “불”이 각각 심판의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입증된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 3:10; 눅 3:9).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 눅 3:17).
한편,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메시아의 성령세례만 언급되고, 불세례는 언급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물로 세례를 받게 된 신자들만 등장하고, 불신자들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막 1:8; 행 1:5). 정리하자면, 회개하여 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성령세례를 받고 심판 날에 알곡으로 분류되어 곡간에 들어간다. 한편, 회개하지 않아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곧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이 되어 도끼에 찍혀지는 나무 또는 쭉정이와 같이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진다.
(2) 임박한 메시아의 출현 예고(요 1:19-28)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단강 건너편 마을 베다니의 세례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라고 묻도록 하였다(요 1:19, 28). 그들에게 자신은 메시아나 엘리야가 아니라고 그는 답하였다. 또한,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함으로써 제2의 모세로 일컬어지는 메시아(신 18:15, 18)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라고 하였다(요 1:23). 또한,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왜 그가 메시아도 아닌데 세례를 베푸는지에 대하여 질문하자, 그는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더라”(요 1:26)라고 답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이 앞에서 공관복음에도 소개되는데(마 3:11; 막 1:7; 눅 3:16), 거기에는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라는 문장이 없다.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임박한 상황이 더욱 고조된다. 이는 곧 세례 요한 자신이 현재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에 메시아가 곧 출현한다는 뜻이었다.
(3)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갈릴리 또는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마 3:13-17; 막 1:9-11; 눅 3:3, 21-22).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보도가 요한복음에는 없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요단강 건너편의 마을 베다니에서 맞이한다(요 1:29-39). 그때 그는 하나님께서 메시아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주신 명령과 약속의 말씀에 대해, 그리고 그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 직접 보고 확인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이 일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요 1:28)라는 구절과 그들의 만난 시점을 알려주는 “이튿날”(요 1:29)을 통합하여 해석하면, 예수의 세례 터는 곧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에 위치함이 밝혀진다. 그런데, 이 베다니가 공관복음에 전혀 소개되지 않는다. 한편, 요한복음은 이 베다니가 세례 요한과 예수의 공생애 사역 기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을이다(요 1:19-51; 3:26; 10:40-42).
(4)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
요한복음에는 세례 요한이 그를 찾아오신 예수를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소개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 위에 머물렀더라”(요 1:29-32). 이는 곧 세례 요한이 적어도 사십일 이상 전에 일어났던 예수의 세례 사건을 떠올리는 장면이며, 그 소개의 목적은 그의 제자들이 그를 떠나 예수를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그 세례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먼저 주셨던 명령과 약속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요 1:33)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과 더불어 특별한 약속을 주셨다(요 1:33하). 그 약속은 메시아가 그에게 나아와 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그 위에 머물게 하여 그를 구별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그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고 일컬으셨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기초하여 나사렛 예수께서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을 때를 간절히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5) 예수의 세례
마침내,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 도착하신 후 그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고자 요청하셨다(마 3:13; 막 1:9; 요 1:28).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동안 줄곧 선포해 왔던 설교 가운데 단 한마디도 꺼낼 수도 없었고 그가 요청한 세례도 베풀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하였다(마 3:14). 마치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명령과 약속의 말씀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것 같이 처신했다. 사실, 그가 그동안 선포하였던 설교의 주제는 회개였고, 그의 물세례는 죄인들이 회개의 징표로 받는 세례였다. 한편,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로 그 앞에 나타나신 예수께서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죄인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셨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바와 달리 자신이 예수께 세례를 받겠다고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a)
이는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 요한을 위하여 특별히 주셨던 말씀이다. 예수의 첫 설교의 청중은 단 한 사람으로 세례 요한밖에 없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 그들이 공식적으로 처음 만나 “우리”가 되었다. 하나가 된 “우리”를 통해 “모든 의”를 이루어야 했다. 마침내, 그는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가 되어 거행하였던 예수의 세례식이 어떻게 “모든 의”를 이루었는가?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예수의 세례식 직후에 그들의 행적을 각각 따라가 보자.
2) 예수의 1차 등극(즉위, 대관)식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크게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세례를 받으신 예수 위에 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다. 이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가운데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성자 예수님의 등극식이 거행되었다.
(1) 하늘이 열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렸다(마 3:16; 눅 3:21). 마가복음은 “하늘이 갈라짐”이라고 표현한다. 김세윤은 그 점에 대하여 “하늘이 ‘갈라짐’은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마가의 표현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셔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비는 이사야 63:19 하반 절(70인역: 맛소라 텍스트에서는 64:1)을 연상케 하는데, 이는 예수의 세례가 이 예언서의 기도를 성취하게 하는 것으로 마가가 암시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라고 설명한다.14)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환상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소명 받을 때 주어지는 것으로(겔 1:1), 곧 하나님의 계시가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다. 하늘이 갈라지는 현상은 유대 묵시문학과 신약(요 1:51; 행 7:56; 10:11; 계 4:1)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2) 성령이 예수 위에 내림
예수께서 세례를 받은 후 하늘이 갈라지는 가운데 성령이 예수 위에 가시적으로 임하였다.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시며 주셨던 약속에 대한 성취적 사건이었다. 또한, 이는 그가 하나님의 사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15)
예수 당시 유대교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와 더불어 성령 역사는 단절되었고 종말에야 성령이 다시 임한다고 믿었으며(욜 2:28-32), 이사야 42:1이나 11:1을 메시아적으로 이해하여 종말에 주께서 그의 ‘종’이나 다윗의 ‘가지’에 성령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사 48:16; 6:11). 그 점을 기초하여 성령이 예수 위에 내린 사건에 대해 김세윤은 세 가지 주장을 펼친다.
첫째로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하나님 자신의 종말의 사자로 불러 성령으로 기름 부었으며, 셋째로 하나님 자신의 종말론적 과업을 수행하도록 성령의 힘으로 무장시켰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16)
성령은 본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일 수가 없는데 비둘기 같은 가시적 형상으로 임하셨다.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주관적인 일인데, 세례 요한을 위해 객관적인 일이 되게 하셨다(참조, 요 12:30).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세례와 더불어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셨다.17)
(3)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 하나님이 비둘기같이 성자 예수 위에 내렸고 하나님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막 1:11, 마 3:17; 눅 3:22). 이 말씀은 시 2편 7절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와 이사야 42장 1절의 “내 기뻐하는 자라…”가 통합 인용된 것이다. 18)
시 2편은 다윗이 그의 후손들을 위하여 기록한 등극 시이다. 다윗의 후손들이 등극할 때 두루마리 성경이 펼쳐져서 시 2편이 낭송되는 가운데 선포되었다. 그렇지만, 성자 예수의 등극식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성부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그 등극식의 주인공인 나사렛 예수가 곧 그의 아들이라고 친히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나사렛 예수가 자신의 진정한 아들이요 메시아이심을 밝히는 가운데, 그를 곧 이 땅에 임한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등극시켰다. 이제 이사야 42:1이 인용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로 시작되는 말씀에 담긴 메시지를 살펴보자. 이사야 42:1부터 시작하여 53장 끝 절까지 계속되는 말씀 속에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이 나오고 있는데 그 내용을 김세윤은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주의 종은 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되고, 성령으로 무장되어(사 42:1; 61:10, 그의 백성을 구원하여 모으며(사 42:7; 49:5-6; 61:1 ff), 새 언약을 세우며(사 42:6; 49:8),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자신을 드리며(사 52:13-53:12),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전달하는(사 41:1; 61:1) 등의 임무를 가진 것으로 그려져 있다. 19)
예수께서는 세례식 직후에 종말의 메시아로 등극하셨다. 하늘이 열리는 가운데 베풀어진 등극식을 통하여 그는 종말의 메시아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고, 특별히 이사야가 선포하였던 그의 백성들을 대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드렸던 여호와의 종으로 선포되었다.
3) 1차 등극식 후의 예수와 세례 요한
예수께서는 그의 세례식과 등극식이 끝난 직후 어디서 무엇을 하셨는가? 또한, 그의 등극식을 지켜보았던 세례 요한은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가?
(1) 예수의 광야 생활과 세례 요한의 투옥?
예수께서는 그의 세례식과 등극식이 끝난 직후 광야로 가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시는 가운데 그의 공생애를 준비하셨다. 사십일 째에 마귀가 그를 찾아와 세 번 시험하였다. 예수께서 그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각 이긴 후 하늘에서 온 천사들한테 섬김을 받으셨다(마 4:1-11; 막 1:12-13; 눅 4:1-13). 이 부분에서 우리가 공관복음만 의존하면, 예수의 광야 사십일 기간에 세례 요한이 투옥된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다. 한편, 요한복음은 예수의 광야 사십일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요 3:24)라는 구절이 있다. D.A. 카슨은 이 구절의 기능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여기에서(요한복음 2-4장 전체에서) 보도한 예수의 사역이 공관복음서들에 기록된 그 어떤 예수의 사역보다도 그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 기록자들은 마가복음 1:14를 기준으로 삼아서, 세례 요한이 체포된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묘사하고, 그 이전에 유대에서 행한 사역에 대해서는 전혀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20)
한편, 리차드 보컴은 “요한복음 3:24의 기능은 마가복음의 독자에게… 마가복음 1:13과 14 사이에 ‘요한복음 1:19 –4:43의 사건들’을 배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께서 갈릴리호숫가에서 그의 첫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마 4:17-22; 막 1:16-20; 눅 5:1-11)을 요한복음의 어디에 위치시킬 수가 있겠는지에 대하여 질문한다. 그에 대한 카슨의 답은 요한복음 4장과 5장 사이가 되고, 보컴의 답은 요한복음 4:43과 44절 사이가 된다(요 1:32). 21)
이는 곧 예수의 두 번째 표적 전이냐 아니면 후이냐가 되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다섯 명을 그의 첫 파트타임 제자들로 부르신 직후에 그의 첫 표적을 행하셨고, 그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중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풀타임 제자들로 부르셨으며, 그 시점은 곧 그의 둘째 표적 전에 또는 후라고 정리할 수가 있겠다. 22)
(2) 세례 요한과 예수의 재회
세례 요한은 그가 세례를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그를 다시 찾아오신 예수를 맞이하였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다시 찾아오셨던 목적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서 그의 제자들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주제로 두 번에 걸쳐 선포하였다. 한 번은 첫 번째 “이튿날”(요 1:29-34)이었고, 또 한 번은 두 번째 “이튿날”(요 1:35-40)이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요 1:29-34).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5-36)
카슨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주제로 직접 설교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성경학자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에 대해 아주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적하며,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기사 전체는 복음서 기록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서를 쓰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러한 이해를 세례 요한에게 투영해서 마치 세례 요한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창작해 내었다는 것이다.23)
카슨은 “이러한 회의주의적 경향은 오늘날의 일부 해석자로 하여금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칭호를 어떻게 이해했을 것인지를 묻지 않고(그들은 그러한 칭호를 사용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단지 복음서 기록자인 요한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그런 표현을 사용했는지만을 묻게 만든다”라고 비판한다. 24)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사실, 그 주제로 진행된 그의 설교가 공관복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공관복음에 소개된 설교들은 그가 예수께 세례를 베풀기 전에 선포되었던 것들이다.
앞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사건이 어떻게 “모든 의”를 이루는 사건이 되었는지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보자고 했다. 예수께서 사십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고 계실 때, 세례 요한은 그가 친히 거행했던 예수의 세례식과 하나님께서 친히 거행하셨던 예수의 등극식에 대한 회상과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요 1:29-34; 36)라는 주제의 설교를 준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예수의 등극식 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선포되었다. 그는 예수께서 인류의 죄 짐, 즉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시는 예식으로서 세례식을 그가 집행하였고, 그렇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신 예수를 곧 그의 등극식을 통해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셨음을 진지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첫 번째 “이튿날”(요 1:29)이 연대기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바로 그 “이튿날”에 세례 요한은 그의 설교를 통해 적어도 사십일 이상 전에 거행된 예수 세례 사건을 기억하며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시고 그를 시험하는 마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고 천사의 수종을 받으며 회복하신 후에 베다니 마을을 다시 찾아오시기까지의 전 과정이 “이튿날”(요 1:29)이라고 언급된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심에 대하여 두 번에 걸쳐 선포하였다. 한 번은 첫 번째 “이튿날”(요 1:29-34)이었고, 또 한 번은 두 번째 “이튿날”(요 1:35-40)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이튿날”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 양도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산드라 윌리엄스는 첫 번째 “이튿날” 세례 요한은 그의 설교 현장에 그의 제자들이 없이 설교를 독백으로 진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5)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 준비를 얼마나 철저하게 하였는지에 대한 그의 탁월한 관찰력이 엿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요 1:29)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제 우리는 첫 번째 “이튿날” 그 현장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없었다는 윌리엄스의 주장에는 동의하고, 그 현장에 예수께서 친히 오셔서 세례 요한과 함께 계셨다고 해석하여 보자. 이는 곧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 양도식을 위한 리허설로서 설교를 하였다는 뜻이 된다. 또는, 첫 번째 “이튿날” 거행된 양도식 현장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 아무도 예수를 따라가고자 하는 자들이 없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이튿날” 또 한 번의 제자 양도식이 거행되었다는 뜻이 된다.
두 번째 “이튿날”에 마침내 그의 두 명의 제자가 그 제자 양도식이 진행되는 현장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그 둘이 그의 설교를 듣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요 1:35-40). 하나는 안드레이고 다른 하나는 무명이다(요 1:35-40). 세례 요한은 그의 설교와 세례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였다. 그렇게 준비되었던 구체적인 그의 열매가 바로 예수께 양도해드렸던 안드레와 그의 무명의 친구였다. 그 무명의 주인공은 역사적으로 여러 학자에 의해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라 추정되고 있다.
(3) 예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예수께서는 그의 처소로 안드레와 요한을 맞이하여 상당 시간 함께 보내셨다(요 1:39). 그리고 안드레는 요한과 함께 그의 형 시몬을 찾아,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하여 그를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시몬과의 첫 만남에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라고 하셨다. 게바는 아람어로 반석이라는 뜻인데, 헬라어로는 베드로이다(요 1:41, 42). 세 번째 “이튿날”에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 벳세다 사람 빌립과 그의 친구 나다나엘이 가세가 되어 예수의 최초의 제자들은 모두 다섯이 되었다(요 1:43-51). 빌립이 어떻게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인도했으며, 예수께서 그에게, 그리고 그를 비롯한 다섯 명의 동료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 다음 단락 “참 이스라엘 사람”에서 자세히 논의하고자 한다. 헤르만 리더보스(Herman Ridderbos)는 다섯 명 모두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예수의 제자들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들이 베다니를 방문하였던 이유는 모두 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요 1:44)의 관점에 볼 때, 빌립, 안드레, 베드로, 그들 모두 한 그룹으로 세례 요한을 만나기 위하여 함께 출발하여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려고 결정하실 때 (그의 새로운 추종자들과 함께: 참조 : 2:11), 빌립을 만나 그를 따르도록 권유하였던 것은 그에게 그 그룹에 합류하도록 한 셈이었다. 또한 빌립이 그 그룹에 속하였다는 사실은 나다나엘을 찾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요 1:45)라고 복수 주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될 수가 있겠다. 여기서 다시 찾는 것 (44, 45 절)은 우연한 만남 이상으로 오히려 그것은 한 사람을 찾아 의도적으로 그에게 가는 행동을 뜻한다.
여기서 세례 요한의 제자 안드레가 그의 형 시몬을 찾아,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하며 그를 예수께로 데리고 왔던 점에 대한 존 칼빈의 설명을 들어보자. “안드레가 그의 형 시몬을 향하여 손을 펼쳤다. 이는 그가 시몬도 그와 함께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그와 함께 동료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26) 칼빈은 그리스도의 학교라고만 하였는데, 우리는 세례 요한의 학교라는 표현도 덧붙여서, 다섯 명이 세례 요한의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학교로 전학하였다고 이해할 수가 있겠다.
예수께서는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에서 모집한 다섯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 마을에 개최된 혼인 잔치에 참석하셨다. 그런데, 그의 모친과 형제들도 거기에 함께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의 모친으로부터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통보받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훗날 십자가에 달리신 가운데서도,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고든 벤함은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고 마무리하시면서, 그의 모친과 자신을 각각 원시 복음(창 3:15)의 두 주인공, 즉 여자와 여자의 후손으로 일치시킨 사건이라고 해석한다.27)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 그가 사역할 대상을 야곱의 혈통적인 후손들로 제한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전 후손들로 확장하셨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표적을 행하셨다(2:1-11). 그의 제자들은 그 표적을 통해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 예수께서는 그의 가족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4)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이는 빌립이 안드레와 요한과 시몬과 더불어 예수를 메시아로 영접한 후에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그를 메시아 예수께 데려가기 위해 했던 말이다. 이는 나다나엘과 빌립 둘 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던 구도자였다는 뜻이다. 나다나엘은 공관복음에서 아람어로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돌로매로 나온다(마 10:2-4; 막 3:16-19; 눅 6:14-16). 그는 갈릴리 가나 출신이었다(요 21:2). 그는 메시아와 나사렛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정하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빌립에게 냉소적인 답을 했다(요 1:46). 그렇지만, 빌립은 그에게 “와서 보라”라고 종용했다. 마침, 그는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에 와 있었기에 같은 마을에 와 계시는 예수를 빌립과 함께 찾아뵈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향하여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다(요 1:47).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른바 브니엘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주셨던 이름이다(창 32:28; 35:10). “간사함”은 야곱을 특징짓는 말이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두 번씩이나 간사하게 속였다. 그리하여, 그에게 생명의 위험을 느껴 도망가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장인 라반과 더불어 속고 속이는 일을 계속하였다. 나다나엘은 예수께서 자신을 “참 이스라엘 사람”(요 1:47)이라고 하시자, 자신을 그의 조상 야곱과 비교하며 칭찬하신 줄 알고 크게 당황하여, “나를 어떻게 아시나이까?”(요 1:48a)라고 반문하였다. 예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라고 답하셨다(요 1:48b). 그리하여,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요 1:49)이라고 신앙 고백을 하였다. 이것은 나단 신탁(삼하 7:12-14)에 기초한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아사상의 뿌리에서 기원한 것이다.28)
예수께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 1:50)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그에게 이미 보여주셨던 ‘큰 일’보다 앞으로 보여 줄 ‘더 큰 일’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에게 이미 보여주셨던 ‘큰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을 불러일으켰던 일, 즉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예수께서 그를 우연히 보신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지식으로 공간을 초월하여 보셨던 일이다.29) 구약에서 무화과나무는 종종 집이나 번영을 위한 상징이 되기도 하고(예, 왕상 4:25; 사 36:16; 슥 3:10), 랍비 문서에서는 그 그늘이 명상과 기도를 위한 장소로 연결된다.30) 이는 곧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어떤 말씀을 묵상하고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까지 초자연적으로 아셨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어떤 말씀을 묵상하며 어떤 제목을 기도하였는지 심히 궁금하여진다. 그 점에 있어서는 당시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예수께서 그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더 큰 일은 무엇일까에 대해 심히 궁금하였을 것이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만이 아니라 그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 모두에게 ‘더 큰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논의하여 보자. 하나는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또 하나의 사항과 함께 논의하여 보자. 또 하나는 곧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야곱의 벧엘 사건(창 28:10-22; 35:1-15)과 브니엘 사건(창 32:13-32) 등을 묵상하며 야곱처럼 복을 받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점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묵상과 기도의 내용을 초자연적으로 정확히 파악하시고, 나다나엘에게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다. 사실, 야곱은 그의 형을 속인 후 그의 어머니 리브가의 지시를 받고 밧단 아람에 사는 그의 외삼촌 댁으로 도망가던 중에 잠을 자다가 아주 특별한 꿈을 꾸었다. 그는 꿈속에서 아래와 같은 장면을 목격하였다.
야곱이….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고…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창 28:10-13).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on it) 오르락 내리락 하고”(창 28:12b)와 “여호와께서 ‘그’ 위에(on it) 서서”(창 28:13a) 라고 번역한다. 즉, “그”는 “사닥다리”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히브리어 문법적으로는 “‘사닥다리’ 위”(on it)와 “‘야곱’ 위”(on ‘him)라는 번역이 둘 다 가능하다. 한편, 세 종류의 탈굼들과 유대 랍비들은 “그”라는 대명사가 ‘야곱’을 지칭하는 인칭 대명사로 해석하였다.31)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시며, 탈굼들과 랍비들의 주석처럼 “그”를 ‘야곱’을 지칭하는 인칭 대명사로 해석하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과 그의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천사들이 야곱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였던 것처럼,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가운데 자신을 인자로 칭하셨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마을에 나타난 메시아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36),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요 1:33), “하나님의 선택자”[아들](요 1:34)라고 칭하였고, 안드레와 요한은 “메시아”라고(요 1:41),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요 1:49)이라고, 예수는 그 자신을 “인자”(요 1:51)라고 각각 칭하셨다.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에 의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던 메시아 또는 메시아에 준하는 여러 칭호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다. 김세윤은 예수님의 자기 칭호인 ‘인자’를 정확히 옮기자면, “그 인자” 또는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라고 다니엘이 본 환상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다니엘이 환상 중에 보았던 “그 ‘사람의 아들’이다”. 즉 예수는 자신이 환상 중에 다니엘에게 “인자 같은 이”로 나타난 그 천상적, 신적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인자 같은 이”를 “그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 번역한다면 이는 예수의 독특한 자기 칭호에 담긴 예수의 의도에 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인자” 칭호가 공관복음에 69번, 요한복음에 13번 나온다.32) 그런데,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 최초의 인자 칭호 사건이 바로 그가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선언한 후에 일어났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비롯한 그의 최초의 다섯 제자에게 말씀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라고 하신 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라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F.F. 브루스가 주장한 것처럼, 51절에서 2인칭 단수 “네”가 2인칭 복수 “너희”로 바뀌는 것은 예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의 내포적 대표자로 세워 그를 통하여 형성되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수 그 자신이 내포적 대표자가 되어 그를 통해 창조되고 형성될 나다나엘을 비롯한 “참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하여 비교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겠다.33) 천사들이 야곱을 방문한 것은 그가 앞으로 형성될 이스라엘의 내포적 대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세윤은 이 점에 대하여 탈굼들과 유대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에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야곱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는 내용과 함께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늘나라의 천사들이 그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 너무나 거룩하여 그 보좌에 새겨져 있는 야곱의 형상을 직접 보지 못하여, 심히 궁금히 여기고 있다. 그런데 야곱이 그의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그의 아버지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천사들이 동행하였다. 야곱이 루스라는 곳에 이르러, 돌베개를 하나 취하여 잠을 자게 되자, 그 천사들이 곧바로 그 루스라는 땅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보좌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동료 천사들에게, 야곱을 보려면 빨리 내려와서 보라고 하자, 천사들이 내려와서 보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34)
또한 야곱이 천사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았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모든 천사는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14) 천국 천사들의 관심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진정 비교하고자 하였던 두 인물이 나다나엘과 야곱이 아니라, 예수 자신과 야곱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예수께서 나다나엘과 대화를 시작하셨지만, “너희에게”라고 하시며 그를 비롯한 다섯 명 모두에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야곱을 통하여 형성되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 자신을 통하여 창조되고 형성될 “참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하여 비교하기 위함이셨다.35)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순간 그는 이스라엘(사람들)의 “내포적 대표자”가 되었던 것처럼, 예수는 참 이스라엘(사람들)의 “내포적 대표자”가 되시고 왕이 되신다는 말씀이다.36)
2.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의 2차 등극식
베드로의 고백 사건(마 16:13-28; 막 8:27-9:1; 눅 9:18-27)과 예수의 변형 사건(마 17:1-13; 막 9:2-12; 눅 9:28-36)이 각각 일어났다. 두 사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엿새 후에”로, 누가복음에서 “팔 일쯤 되어”로 각각 연결된다. “일주일 전쯤”이라고 이해될 수가 있겠다.
1)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의 약속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먼저 묻고 나신 후(마 16:13),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마 16:15). 시몬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마 16:16). 이에 대해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7-18상).
예수께서 시몬이 그의 신앙고백을 하게 된 연유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시몬은 동생 안드레가 요한과 함께 와서 그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하자, 그들과 함께 처음으로 예수를 만났다. 그때 예수께서 그를 장차 “게바”라 하겠다는 첫 약속을 하셨다(요 1:42). 게바는 아람어로 반석이며, 헬라어로 “베드로”이다. ‘게바’를 살려 번역하자면, “…너는 ‘게바’이다. 그리고(그래서) 내가 이 ‘게바’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가 된다. 그러나 헬라어로는 ‘게바’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게 된 시몬이 여성이 아니고 남성이었기에, ‘페트라’(Petra)라는 말의 남성형인 ‘페트로스’ Πέτρος가 사용되었다.37) 예수께서는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마 16:18)라고 하시며 그와의 첫 약속을 성취하신 후 그와 또 하나의 약속을 하셨다. 그것은 곧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는 약속의 말씀이다.38) 왜 예수께서 시몬에게 두 번에 걸쳐 각각 약속하셨겠는가? 신현우는 “이사야 45:4(‘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에서는 이름을 새로 지어 바꾸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된다.”라고 주장한다.
개명은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이름을 받는 사람을 위한 계획과 관련되기도 한다(창 17:5). 그러므로 시몬에게 Πέτρος(페트로스)라는 이름을 주신 것에도 신적인 선택이나 계획, 약속이나 임무 부여 등의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쿰란 문헌 4Q164에서는 돌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표들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Πέτρος(페트로스)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대표로서의 지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39)
예수께서는 자신을 아브람과 사래를 아브라함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그들의 이름을 바꾸어주셨던 여호와 하나님과 일치시키셨다. F. F. 브루스(Bruce) 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하시고, 그를 반석으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을 세우셨다고 선언하시는 이사야 51장 1-2절의 말씀을 예수께서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한다.40)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퍼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사 51:1-2).
1절의 “너희는 반석… 생각하여 보라”와 2절의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 생각하여 보라”가 평행을 이루어, 반석이 곧 아브라함이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반석으로 하여 이스라엘을 세우셨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시몬을 반석으로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곧 회복되는 이스라엘이요, 참 이스라엘이요, 새 이스라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만이 아니라 열두 사도 모두가 다 새로운 반석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신현우는 “새 아브라함 또는 새 이스라엘의 역할을 하는 시몬을 비롯한 열두 명의 새 족장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종말론적으로 재창조하시기 위한 예수의 의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41) 베드로는 그의 동료 제자들을 대표하는 자일뿐이다.42) 물론, 당시 그는 그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쯤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겠는가? 이에 대해 다음 장에서 자세히 논의하고자 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셨다(마 16:20). 그리고 그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처음으로 설명하였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다(마 16:22). 예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다(마 16:23). 그 후에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 24-28).
이제 일주일쯤 후에 이른바 변화 산에서 거행되는 예수의 2차 등극식에 대해 논의한 후, 이 말씀(마 16:14-28)과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도 살펴보자.
2) 예수의 2차 등극(즉위, 대관)식
예수께서 약 일주일 전에 그의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와 그의 두 동료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기도하던 중에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 하늘로부터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 예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피곤하여 졸고 있던 제자들이 온전히 깨어나게 되었다. 그들이 예수의 영광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다. 그들이 예수와 대화를 마치고 떠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급히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곳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울렸다.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마 17:5; 막 9:7).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눅 9:35).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벧후 1:17a)
앞 장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늘의 소리를 예수의 1차 등극식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선언으로 이해하였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의 소리도 그의 2차 등극식에 선포된 하나님의 선언이다. 예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구약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베드로, 요한, 야고보로 대표되는 신약의 백성들을 위한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셨다. 그 후 모세와 엘리야는 다시 하늘로 돌아가고 예수와 그의 세 제자는 산에서 내려왔다. 그때 예수께서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 17:8; 9:8)라고 하셨다.
(1) 예수의 2차 등극식과 모세
이 세상을 이미 떠난 모세와 엘리야가 얼굴이 해같이 변형되신 예수 앞에 각각 나타난 후, 예수와 더불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別世)하실 것”에 대하여 말했다(눅9: 30-31). “별세”는 헬라어로 EXODUS(엑소도스)이다. 그 말은 모세와 그 백성의 출애굽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었다.43) 모세는 두 번에 걸쳐 엑소도스를 하였다. 한번은 그 혼자서 하였고, 또 한번은 그의 백성과 함께하였다. 모세는 예수님의 엑소도스라는 메시지를 선포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였다.44) 바울은 모세와 함께 엑소도스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자들”이라고 했다(고전 10:1, 2). 한편, 사도 베드로는 노아 홍수 사건을 노아와 더불어 그의 가족 8명이 물로 세례를 받은 사건으로 해석하였다(벧전 3:20-21). 그들은 모세와 함께 엑소도스를 경험하였지만, 애굽의 바로에게 속한 자들은 모두 다 홍해 바다에 빠져 죽었다.
요한계시록 15장에 따르면, 모세에게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던 것처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참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인 홍해라고 할 수 있는 유리 바다를 건넌다.46) 이 유리 바다는 짐승에게 속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바다가 되지만,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바다가 된다. 모세와 함께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의 홍해라고 할 수 있는 유리 바다를 건너서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른다(계 15:3).47)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에 의해서 거절당했던 모세를 사용하시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유대인들에 의해서 거절당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사용하시어 참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요한계시록 15장은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에 상응하는 순교를 통해서 하늘로 들어가는 순교자의 본문이다.
출애굽기 15장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한 심판과 구원행위가 이방 민족에게 두려움이 되지만, 요한계시록 15장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즉 열방들이 회개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는 것이다(계 14:7).48) 요한계시록 15장의 모세의 노래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출애굽을 하나님께서 그 대적들을 심판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사건으로 보지 않고 만국(의 백성들)이 참 하나님을 알게 되는 사건으로 재해석하고 있다(계 15:3,4).49) 순교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죽음과 정당함의 입증을 통해 성취하신 승리를 찬양하는데, 자신들의 순교를 통해 열방에 가져온 효과, 즉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 것을 송축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모든 열방으로부터 한 민족을 구원해내고 그들을 하나님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으며(계 5:9),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 백성들이 순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함으로 열방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주적인 왕국이 도래하게 되는 방법이다.50) 유대교는 종말(Endzeit) = 태초(Urzeit)의 역사이해 원칙에 따라 출애굽의 구원을 종말의 복된 상태의 회복으로 보고 금송아지에 대한 우상숭배를 아담의 원죄와 비교했으며, 종말의 구원은 제2의 엑소도스로서 종말의 복된 상태의 회복으로 기대하였다.51) 김세윤은 이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신약성경도 예수의 죽음을 제2의 출애굽 구원으로 해석함으로써 그것이 종말론적 구원의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예수를 제2의 모세(아니-또는 모세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자)- 구원자 – 로 해석하고(마 5:1f, 21-48; 요 6장; 히 3장), 그의 죽음을 “유월절 양”으로 해석하고(고전 5:7; 요 1:29; 19:14), 시내 산 언약(출 24:8)을 대치한 새 언약을 세운 제사로 해석하며(막 14:24; 히 10장), 그의 죽음이 가져온 구원을 출애굽의 구원이 시사한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으로 선포한다(롬 10:4ff; 고전 10:4ff; 고후 3:1ff; 갈 4장).52)
구약의 많은 인물 중에서 모세와 엘리야만이 예수의 이차 등극식에 참여할 특권을 가졌다. 도날드 거스리는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각각 대표한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53) 하워드 마샬은 둘 다 이 세상을 신비적인 방법으로 떠났으며 종말론적 기대의 안목에서 다시 나타날 자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54) 도날드 해그너는 둘 다 시내 산(또는 호렙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누었던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55)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처럼 부활의 몸을 덧입게 될 두 부류의 사람을 각각 대표한다는 것이다. 모세는 죽은 자들을 위하고 엘리야는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세가 선택되게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엑소도스를 위한 주인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엑소도스를 논할 수 있는 최적격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선택되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3) 예수의 2차 등극식과 엘리야
구약 성경에 따르면, 메시아가 와서 그 백성들 곧 참 이스라엘을 창조하여 메시아 왕국을 세우는데, 이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게 된다(말 4:5-6). 예수의 제자들이 변화산 사건 현장에서 엘리야의 출현을 목격하고 입을 모아,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마17:10)라고 질문하였다. 그들은 메시아 되시는 예수는 이미 오셨는데, 왜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는지에 대해 궁금히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때마침 엘리야가 온 것을 보고 엘리야가 메시아보다 더 늦게 온 것이 아닌지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엘리야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는 것이 마땅하며, 엘리야는 이미 와서 고난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마 17:11, 12). 이에 그들은 다름 아닌 세례 요한이 곧 엘리야임을 깨닫게 되었다(마 17:13). 만약 베드로의 제안대로 초막 셋이 지어졌더라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어느 초막에 제일 먼저 들어가고자 하였을까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면, 그 답은 엘리야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첫 번째 등극식인 세례식 때 귀히 쓰임 받았던 자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두 번째 등극식에서 세례 요한이 곧 엘리야임을 밝히셨다.
(4) 예수의 2차 등극식과 베드로
베드로의 고백 사건과 예수의 2차 등극식은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 둘은 세 가지 면에서 연결된다. 첫째, 베드로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받았던 예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17:5; 막 9:7; 눅 9:35; 벧후 1:17)라고 확증하셨다. 둘째, 예수께서 시몬의 고백을 받고 난 다음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는데(마 16:21), 모세가 엘리야와 함께 등장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장차 별세하실 것이라고 확증하였다. 셋째,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고 난 다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마 16:21)과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겠다고 하셨는데(마 16:27), 예수께서 산에서 2차 등극식, 즉 변형 사건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그의 재림을 미리 맛보도록 하는 사건이 되었다(마 16:27; 막 8:38; 눅 9:26). 예수께서 죽기 전에 자신이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하신(마 16:28; 막 9:1; 눅 9:27) 말씀은 약 일주일 후에 있게 될 변화 산에서 거행될 그의 2차 등극식을 염두에 두고 하셨던 말씀임이 분명하다.56)
3. 베다니의 나사로와 예수의 3차 등극(즉위, 대관)식
예수의 3차 등극식의 경우에는 총 49일이 걸렸다. 이는 곧 수난 주간 중의 6일, 무덤에서 3일, 그리고 부활하여 승천까지의 40일의 통합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감람산 기슭 베다니 마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린 후에 한동안 숨어지냈다. 그런데, 그가 유월절 엿새 전에 이 마을에서 진행된 잔치 중에 마리아로부터 향유를 부음을 받았다. 마침내, 그의 수난 주간이 시작되었다.
1) 베다니에서 시작됨
예수께서 감람산 기슭 베다니 마을에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후에 거의 즉시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빈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으로 가서 머무셨다(요 11:54).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 이름으로 예수 체포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요 11:47-53; 참조, 7:32). 요한은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 11:50)라고 말한 바를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 11:51-52)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한편,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요 11:56).
예수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나사로의 마을인 예루살렘 감람산 기슭 마을 베다니에서 개최된 잔치에 참여하셨다(요 12:1). 그날 이 마을에서 개최된 잔치에서 예수께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에 의해 향유로 부음을 받았다(요 12:1-3). 그 이튿날에는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를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 왕이시여”라고 외쳤다. 그들은 곧 예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신 것을 직접 보았거나, 그 사건에 대한 증언을 들었던 자들이었다(요 12:17-18). 이 장면은 유대의 정치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병이어 사건 직후 군중들이 예수가 바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선언하고 그를 억지로 붙들어 즉석에서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요 6:14-15). 그때는 예수께서 군중들을 피하여 혼자서 산으로 가셨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으셨다.
이튿날(유월절 닷새 전에) 예수께서는 군중들로부터,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환호를 적극적으로 받으며, 베다니에서 떠나셨다(요 12:12-13). 그런데, 그는 베다니 옆 마을인 벳바게를 거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까지 아주 희한한 행동을 하셨다. 그의 두 제자를 통해 미리 준비해 둔 나귀 새끼를 타셨다(마 21:1-11; 막 11:1-11; 눅 19:29-38; 참조, 요 12:14). 훗날 사도 요한은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 12:15)라고 구약 말씀을 인용하는 가운데, 그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예수께서 의도하신 바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요 12:16). 또한,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의 모습과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밧모섬에서 환상으로 보았다. 이는 그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백마를 타고 오셨는데, 그가 피로 물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칼로 심판을 받은 대적자들이 흘렸던 피였다(계 19:11-16). 또한, 사도 요한은 환상에서 먼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는 자들도 보았다. 그들은 곧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은 자들이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어린 양 예수 앞에서 (계 7:9),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라고 하였다(계 7:10).
2) 사탄의 폐위와 예수의 즉위
유월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몇 명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호를 받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를 뵙고자 하였다. 그 소식을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 들으신 예수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라고 기뻐하셨다. 이는 그동안 그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2:4; 7:30; 8:20)라고 말씀하셨던 점과 크게 대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땅에 떨어져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하나의 밀알이 될 각오가 되어있음을 암시하셨다(요 12: 25-25). 그러나 그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하셨다(요 12:27 상). 그 후에 그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상 –28상)라고 기도했다. 바로 그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다음과 같이 울렸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 28하). 곁에 서서 그 소리를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예수께 말했다고도 했다(요 12:29). 예수께서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라고 하셨다(요 12:30). 그리고 그는 그 소리를 다음과 같이 사탄의 폐위와 자신의 즉위 사건으로 해석하셨다.57)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1-32).
사도 요한은 예수의 해석을 “이렇게 말하심”이라 하며, 이는 “자기가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 33)라고 해석한다. 카슨은 그의 해석이 곧 예수의 수난과 영화를 통합시킨 것이라고 설명하며, 그의 해석에서 다섯 가지 강조점을 찾아내어 설명한다. 카슨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가 있겠다.58)
⓵ 예수의 수난과 영화는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의 때”이다. 이 심판이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시작되어서 그의 수난에서 정점에 달하는 것도 보여준다. 세상은 자신들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계속해서 판단하고 평가한 후에,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그에 대해 심판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사실 십자가는 그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 즉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주신 것이기도 하였다.
⓶ 예수의 수난과 영화는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는” 때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사탄의 승리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의 패배였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어린 양을 따르는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용을 이기는 것으로 묘사된다(계 12:11). 예수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고 하늘로 “들려서” 즉위한 바로 그때, 사탄은 폐위되었다. “이 세상의 임금”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힘은 “보혜사” 성령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철퇴를 맞는다(요 16:11).
⓷ 예수의 수난과 영화는 그가 “땅에서 들리는” 것에 해당한다(요 3:14; 8:28). “들리는 것”이라는 개념과 “영화”라는 개념은 이사야 52:13에 함께 나오는데, 거기에서 “들리는 것”은 여호와의 종이 높아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3)에서 ‘어떠한 죽음’이라는 어구는 일차적으로 죽음의 방식 자체(십자가형, 요 21:19)를 가리키지만, 이 대목 전체의 취지, 즉 예수의 죽음은 그의 영화로 가는 길목이자 그 구성분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암시한다.
⓸ 이러한 수난과 영화, 또는 이러한 죽음과 높아지심이 가져오는 결과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 속에서 그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이끄는 것(참조, 10:16; 11:52)을 공식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은 그의 십자가와 높아지심, 즉 그가 “들린” 것이었다. 이것은 그를 찾아왔던 헬라인들에 대한 암묵적인 대답이었다.
⓹ 이러한 이중적인 극적인 전개는 강조의 의미를 담은 “이제”(요 12:31) 아래서 진행된다. 이 부사는 이 절들을 앞에 나오는 23, 27절과 연합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임박한 사건들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세상에 대한 심판, 사탄의 멸망, 인자의 높아지심, 사람들을 땅끝에서부터 이끔 –이 모든 일은 종말의 때에 일어나게 되어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종말의 때는 이미 시작되었다. 종말의 때를 위해 유보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의 죽음과 높아지심 속에서 그 결정적인 한 걸음이 내디뎌지게 될 것이다.
3) 반어적(Ironic) 등극식
총독 빌라도는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수를 재판하면서 사면의 관습에 따라,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며, 그를 유대인들에게 놓아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였다. 그리하여,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하기 시작하였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그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종용하자, 그가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고 물었다. 대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라고 답했지만,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다.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다(요 19:19-20).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그에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하자(요 19:21), “내가 쓸 것을 다 썼다”라고 답했다(요 19:22). 게리 버지(Garry Burge)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단지 이야기의 역사적 세부 사항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분별해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빌라도에 의해 재판을 받는 동안 “왕”이라는 호칭이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 속에 있는 깊은 아이러니가 겉으로 드러나도록 이야기를 구성한다. 예수는 참으로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이것은 그의 대관식이다.59)
4) 섬김의 왕 예수와 갈릴리의 제자들
예수께서는 세 번의 유월절(요 2:13; 6:4; 12:12) 가운데 두 번의 유월절(요 2:13, 12:12), 어떤 명절(요 5:1), 초막절(요 7:2)과 수전절(요 10:22) 등에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하셨다. 그들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 중의 대화의 키워드는 ‘출세’였다. 앞에서 잠깐 언급된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는 요청 사건을 통해서 잘 드러났다. 그때, 나머지 제자들이 분개하였다는 것은 그들도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뜻이다(마 20:20-24; 막 10:35-41). 당시 그들은 모두 다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여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왕국에서 어떤 직책을 맡게 될 것인지에만 골몰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 26-28; 막 10:43-45).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섬김의 왕으로서 다스림의 본을 보이셨다. 그 다스림이 복음 진리와 사랑의 섬김,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마귀에 대한 승리 등으로 이루어진다(참조, 고후 6:4-10). 한편, 예수께서는 자신이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후, 제자들이 ‘출세’의 꿈과 기대가 사라짐에 따라 고향 갈릴리에 돌아갈 면목이 없어 몹시 당황하게 될 것을 간파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셔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세 번에 걸쳐 말씀하셨다. 첫 번째로 목요일 밤에 유월절 식사 중에 그들이 앞으로 거행해야 할 성찬 예식을 선포하시고(마 28:17-29; 막 14:22-25; 눅 22:14-23; 고전 11: 23-25), 감람산으로 찬송하며 가시며(마 26:30; 막 14:26), 그들이 갈릴리로 돌아갈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마 26:31-32; 막 14:27-28).
마침내, 예수께서 목요일 저녁에 체포되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일요일 새벽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예수의 무덤 문의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무덤을 지키던 로마 병사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바로 그때 무덤에 묻혀 있는 그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찾아온 여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마 28:2-4; 막 16:3-5).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뵈오리라”(마 28:5-7; 막 16:6-7). 이는 곧 예수께서 제자들이 갈릴리로 돌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고 두 번째로 통보한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여자 제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급히 빨리 무덤을 떠나 베드로를 비롯한 갈릴리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가던 중(마 28:8), 부활하신 예수께서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평안하냐”라고 안부를 물으시자, 그들이 그에게 나아가 그의 발을 붙잡고 경배를 하였다(마 28:9). 바로 그때 예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10)라고 세 번째로 통보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가 부활하신 자신을 만날 곳을 갈릴리의 어느 산이라고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셨다(마 28:16). 그 산이 곧 예수의 2차 등극식이 거행되었던 산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 산에서 내려오시던 길에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 17:8; 9:8)라고 하셨던 바로 그 산에서 그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 중에는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마 28:17),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마 28:18a).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b-20).
이 말씀(마 28:18-20)은 이른바 지상 위임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다. 여기서 다니엘이 본 “인자 같은 이”의 등극식을 회상해 보자.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예수께서는 지상 위임을 통해 다니엘이 본 “인자 같은 이”가 바로 자신이라고 확정하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는 갈릴리호숫가에서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을 또 만났다. 그는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였지만 잘 잡히지 않아 지쳐있던 그들에게 숯불 생선구이와 빵을 먹이셨다. 이는 곧 섬김의 왕 되시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이 섬기는 자가 되도록 주신 하나의 모범적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으로 그의 사명을 북돋으셨다(요 21:1-23).
5)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행 1:3). 사십일 째 되던 날에는 그와 제자들이 예루살렘 감람산에 함께 모였다(행 1:4). 그들은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로(행 행 1:11), 그들의 총수는 11사도, 예수의 어머니와 아우들로 대표되는 120명쯤 되었다(행 1:13-15a). 부활하신 예수께서 일시에 500명쯤 되는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전 15:6). 그들이 예수를 만났던 곳은 갈릴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들 중에 약 380명 정도는 갈릴리에 그대로 남고 120명 정도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감람산으로까지 이동했다. 예수께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사실,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 1:8)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선물로서 성령으로 세례를 조만간에 받게 된다고 하셨다(행 1:4-5). 바로 그때 그들이 예수께 그들의 입을 모아 드렸던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행 1:6)? 존 스토트(John Sott)는 그들의 질문은 예수를 무척 낙담시켰음이 틀림이 없다고 하였다.60) 존 칼빈(John Calvin)은 “그들의 질문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다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61) 그러나 팔머 로버슨(O. Palmer Robertson)은 스토트와 칼빈과 달리 이렇게 주장한다.
그들의 질문 속에 틀리지 않는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킬 예수는 곧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이스라엘 나라는 곧 메시아 왕국이다. 그들이 잘못 이해한 것은 메시아 왕국의 시작점과 완성점을 구별하지 못하고 하나로 보았다.62)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그 왕국이 즉각적으로 완성될 줄 믿고,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고 물었다. 그때 예수께서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라고 답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의 질문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고유영역인 메시아 왕국 완성의 때와 기한에 관한 질문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막 13:32). 예수의 제자들은 메시아 왕국의 시작점과 완성점만을 구별하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왕국의 성격과 본질이 “성령”으로 특징 지워지는 것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나면 그 왕국의 성격과 본질을 깨닫게 될 줄 믿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a)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이 왕국의 범위 또는 영역에 대해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b)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메시아 왕국의 완성의 때 보다는 그 왕국의 성격과 영역과 대상에 대하여 더욱 집중하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그 왕국의 영역과 대상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땅끝까지” 확장되어 세상 모든 족속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구약의 여러 구절(시 2:8; 19:4; 67:7; 72:8; 사 48:20; 슥 9:10)이 밝히 예언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로버슨은 메시아 왕국의 지경이 땅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선언을 그의 제자들의 질문,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행 1:6)에 대한 주변적인 답변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63)
제자들의 질문(행 1:6)과 예수의 답(행 1:7-8)은 동문서답이 아니라 일종의 우문현답이다. 예수께서 아주 적확한 답을 하셨다. 이는 다음 두 가지로 그 사실이 입증된다. 하나는 그의 승천 사건이다(행 1:9). 이에 대해 “예수의 승천과 구름의 등장”에서 자세히 논의하고자 한다. 또 하나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이 하늘로 올리어져 가시는 예수를 바라보다가 구름이 가리어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들에게 하였던 말,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이다. 이는 곧 메시아의 이스라엘 회복이 예수의 초림으로 시작되었고, 그의 재림으로 완성된다는 뜻이다. 그 회복의 장소는 이른바 가나안 땅으로 국한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이다(행 1:8). 그 회복의 주인공 또는 대상은 야곱의 혈통적 후손들로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이다(마 28:19).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는 회복되는 이스라엘이며 그의 제자들로 대표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에 걸쳐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행 1:3),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거는 바로 그의 교회 공동체의 “섬김의 사역”을 통해 계승되었다(행 8:12; 14:22; 19:8; 20:25; 28:23, 31).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행 28:31b)과 “하나님의 나라”(행 28:31a)는 바꾸어 써도 될 만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참고. 행 8:12).64)
6) 예수의 승천과 구름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구름이 등장하였다(행 1:9). 다니엘이 본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로 타고 가는 “구름”이었다(단 7:13).65) 이는 곧 예수의 등극식은 그가 승천하신 후 하늘에서 완료된다는 뜻이다. 구름이 예수를 가려, 제자들은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때마침, 그들 곁에 서 있는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라고 했다. 누가복음에는 그의 승천 장면이 이렇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0-53).
서론에서 예수의 승천 장소는 곧 그의 재림 장소이므로, 베다니 마을의 아랍인들이 유대인들로 속히 대체되어 그들이 재림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행 1:9-11)에 재림 장소로서의 “올라가신 이곳(감람산 또는 감람산 앞 베다니)으로”라는 문구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66)
또한 이 구절에서 천사들은 예수의 재림 장소로서의 감람산이나 재림 예수님의 운반체로서의 구름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재림 모습이나 방법에 대해 말하였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하늘 영역에 계시던 예수께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으로 들어오셨던 사건이 바로 그의 성육신 사건이다. 성육신하셨던 예수께서 부활과 승천으로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셨다. 그의 재림 때에는 그의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자들도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갇히지 않으신 예수와 똑같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된다(참조, 살후 4:13-18 등). 따라서, 그 재림 때에는 성자 예수의 운반체로서 구름도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가리기 위한 구름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67)
7) 예수의 3차 등극식의 완료
예수께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로 자신을 계시하신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모습까지는 그의 제자들은 볼 수가 없었다. 단지, 그 이유가 구름이 예수를 가리어서만이 아니었다. 다니엘의 경우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로 구름을 타고 나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았던 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환상 가운데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너는 나를 보고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11). 이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1주일쯤, 즉 승천하시기 약 한 달 전쯤 도마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사도 신경이 예수의 3차 등극식이 완료되는 모습을 소개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아멘.
초림 예수께서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심으로 그의 왕국이 이미 출범되었다. 사도 신경의 내용처럼 예수께서 재림하는 목적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가운데 그 왕국을 완성하신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초림 예수의 왕위 등극과 이스라엘 회복론의 옳음이 온전히 입증되었다. 다음 장에서 그 왕국의 백성이 곧 회복되는 이스라엘이며, 그들이 곧 그의 보혈로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들이라는 점도 확실하게 밝혀보도록 하자. [icon name=”expand” prefix=”fas”]Now & Here © 아이앤유크저널
각주
14. 김세윤, 『예수와 바울』, (서울: 도서출판 제자, 1995) 15.
15. 위의 책, 16.
16. 위의 책, 16.
17. “싸비이인들”(Sabaeans)은 세례 요한 추종자들로서 성령이 예수 위에 임한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에게 임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필자가 바그다드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그들의 성전에서 필자가 확인한 내용이다.
18. 김세윤, 『예수와 바울』, 25.
19. 김세윤, 위의 책, 25.
20. D. A. Carson, 『요한복음』, 박문재 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17), 375.
21. Richard Bauckham, “For whom Gospels were written?” The Gospels for All Christians, 1998. T& T Clark Edinburgh, 154.
22. Richard Bauckham, 『요한복음 새롭게 보기』, 문우일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23. D. A. Carson, 『요한복음』, 259.
24. 위의 책, 259.
25. Cartin H. Williams, “John (the Baptist): The Witness on the Threshold, Character Studies in the Fourth Gospel, (Mohr Siebeck, Tubingen, 2013), 51.
26. John Calvi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1-10, trans. Thomas H. L. Parker (Grand Rapids: Eerdmans; Carlisle: Paternoster, 1995), 72.
27. Gordon J. Wenham, 『창세기1-15』, 박영호 역 (서울: 솔로몬, 2000), 203.
28. 김세윤, 『요한복음 강해』, 46.
29. 위의 책, 283.
30.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161.
31. Seyoon Kim, “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 J.C.B. Mohr Tubingen 1983. 83.
32. David Wenhem, 『바울: 예수의 추종자인가? 기독교의 창시자인가?』,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2), 163.
33. F.F. Bruce, 『요한복음』, 서문강 역, (서울: 도서출판 로고스, 2000), 115.
34. 김세윤, 『바울 복음의 기원』, 398과 김세윤, 『그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의 아들』 (서울: 엠마오, 192), 146. 김세윤은 C.C. 롤랜드(C.C.Rowland)의 캠브리지 학위 논문 「유대교와 초대 기독교 문헌에 나타나 있는 에스겔서 1장의 영향」(The Influence of the First Chapter of Ezekielon Jewish and Early Christian Literature, 1974)의 도움을 받아 이같이 밝힐 수 있었다고 밝힌다.
35. F.F. Bruce, 『요한복음』, 115.
36. 김세윤, 『요한복음 강해』, 48.
37. ‘페트로스’(Πέτρος)가 ‘페트라’(πέτρα)의 축소 명사라는 억지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헬라어에는 성의 구별로 축소 명사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 점에 있어서는 세계 모든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38. “이 반석”이 지칭하는 말이 무엇이냐에 대한 세 종류의 주장이 있다. ①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가톨릭교회의 모든 학자, 개신교의 Herman Ridderbos, F.F. Bruce, Robert Saucy등) ② 예수 그리스도(Luther 등). ③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Calvin 등). ①은 언어의 기본 법칙에 따른 해석이다. 그러나 ②와 ③은 가톨릭교회의 교황권에 대항하기 위하여 언어의 기본 법칙을 무시한 신학적 억지 주장이다. 이에 대해 Herman Ridderbos, 『하나님 나라』, 오광만 역 (서울: 엠마오, 1988) 445-459 그리고 Robert Saucy, 『하나님이 계획하신 교회』 김기찬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4), 85. 그리고 F.F. Bruce, 『예수의 난해한 말씀들』 정명섭 역 (서울: 요단, 2000), 168-169를 참조하라.
39. 신현우, “예수의 열두 제자 임명과 새 이스라엘마가복음 3:13-19 주해”, 『신약논단』. 제28권 제1호 (2021년 봄), 85-86.
40. F.F. Bruce, 『예수의 난해한 말씀들』, 정명섭 역 (서울: 요단출판사, 1988) 168-169. 신현우, 90-91.
41. 신현우, 88.
42. Donald Guthrie, 『메시아 예수』, 정광옥 역 (서울: 아가페 출판사, 1989), 220.
43. D.A. Carson, Walter W. Wessell, & Walter L. Liefeld, Volume 8(Matthew, Mark, Luk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Grand Rapids: The Jondervan Corporation, 1984), 925.
44. 위의 책, 925.
46. 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 성서유 니온, 2002), 126.
47. 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 (서울: 이레서원, 2006), 655.
48. Richard Bauckham. The Theology of the Book of Revela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1998) 102.
49. 위의 책, 102.
50. 위의 책, 102.
51. Billerbeck, IV, 886ff; N.A. Dahl, Christ, Creation and the Church, The Background of the N.T and Eschatology, C.H. Dodd FS (Cambridge, 1956), 424-429. 김세윤의 책 『예수와 바울』, 201에서 재인용.
52. 김세윤, 『예수와 바울』, 201.
53. Donald Guthrie, 『메시아 예수』, 정광욱 역 (서울: 아카페 출판사, 1989). 227.
54. I. Howard Marshal, 384. The Gospel of Luke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8)
55. Donald Hagner, Matthew 14-28 (Dallas, Texas: Word Books, Publisher, 1995), 493.
56. John Nolland, Luke 9:21-18:34, (Dallas, Texas: WBC, 1993), 487.
57. G. R. Beasly-Murray, 『요한복음』, 이덕신 역, (서울: 솔로몬, 2001), 444.
58. D. A. 카슨, 『요한복음』, 819-822.
59. Garry Burge, 『NIV 적용주석: 요한복음』, 김병국 역, (서울: 솔로몬 2010), 658.
60. John R. W. Sott, 『땅끝까지 이르러』, 정옥배 역 (서울: IVP, 1992), 39.
61. 위의 책, 39.
62. O. Palmer Robertson, 『하나님의 이스라엘』, 159.
63. 위의 책, 159.
64. 에크하르트 J. 슈나벨, 『강해로 푸는 사도행전』, 80.
65. 이필찬, 『에덴의 회복의 관점에서 읽은 요한계시록 1-11장』,, (서울: 에스카톤, 2021), 89.
66. 이필찬, 『백투예루살렘 무엇이 문제인가』, 63.
67. 필자의 글 “예수님의 재림 지점이 요르단 남부 지역이라는 주장과 그에 대한 응답”(중동연구 제1권 2017, 페이지 216-228)에서 “예수님의 등극식과 구름”이라는 소 제목하에 다음의 구절들(① 마태복음 24:29-31, ② 마태복음 26:56-8, ③) 사도행전 1:9-11, ④) 요한계시록 1:7.)이 예수의 승천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이 각각 자세히 다루어졌다.
글 정형남 교수/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교수 및 GMS 아랍권 선교사(천안장로교회 파송. since 1989). 그의 책으로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CLC, 2009)과 아랍권 및 이슬람권 선교와 관련된 여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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