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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저널=조용선 목사] 사울 왕을 닮은 기독교인 » 삼상 15:30절 »
내가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설교로 삼은 것에는 또 하나의 의도가 있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 내에서도 사울과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속했는데 사울과 같은 유형의 사람이라면 이것은 정말 비극이며 고통이다. 주님을 알았지만 자신의 탐욕에 빠져 결국은 자신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표면으로는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믿지 않으며 오직 왕의 권세를 좆는 사울처럼 자신의 권력과 세력과 돈과 이름을 내는 명예를 좆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마 20:3, 개역)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마 20:4, 개역)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마 20:5, 개역)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삼상 15:30, 개정)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1Sm 15:30, NLT) Then Saul pleaded again, “I know I have sinned. But please, at least honor me before the elders of my people and before Israel by coming back with me so that I may worship the LORD your God.“
扫罗说,我有罪了,虽然如此,求你在我百姓的长老和以色列人面前抬举我,同我回去,我好敬拜耶和华你的神。
1장 성령에 의한 설교
2023년 1월 1일의 주일 설교는 사실 2022년 12월 31일에 작성한다. 이것은 시간으로는 하루이지만 의미로는 1년의 변화를 뜻한다. 무엇을 설교해야 할까? 사실 목사들은 주일 예배의 설교가 끝나고 나면 다시 1주일동안 무엇을 설교할까? 하는 것을 생각하고 기도하게 된다.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주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나는 이즈음에 사무엘상 성경을 읽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는 기독교 신자라면 매우 익숙하다. 그러므로 설교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다 아는 이야기를 또 설교한다면 신자들이 지루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다 아는 이야기에서도 신자들에게 큰 은혜를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라고 하는 것은 사실 설교 현장을 뜻하기 때문이다. 설교가 주님의 은혜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성령에 감동된 목사와 설교원고와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신자의 신앙에 의하여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별로 설교를 전하는 기술도 없다 하더라도 만일 그가 정말로 주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라면 그의 설교는 신자에게 큰 은혜가 되고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로서의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있고 그 삶이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은 그래도 설교의 내용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고 주님의 뜻을 전하고자 해야 한다. 이렇게 기도하며 준비하면 성경 말씀은 틀림없이 설교하고자 하는 목사가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하신다. 목사가 이렇게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면 마치 광부가 금광을 발견하듯이, 혹은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하듯이 큰 기쁨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자만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발견한 것은 그 목사에게나 새로운 것이지 사실 대부분의 것은 이전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발견하고 기록해 놓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실망할 것도 아니다. 여하튼 그 목사가 발견한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것이고 그 목사에게 속한 신자들도 그 목사를 통하여 새롭게 듣게 되는 주님의 말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장 사울과 다윗의 동일한 과제
1절 블레셋으로부터의 방어
사울과 다윗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주 큰 틀에서 보면 사울과 다윗은 둘 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이다. 두 사람에게는 동일한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할 수도 있는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사실 사울이 왕이 된 것도 블레셋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정치 구조는 12지파 공동체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철기문명을 갖고 있는 블레셋의 침략을 막을 수 없었다. 이전에 삼손이 사사로 있으면서 방어했지만 그는 가사의 다곤 신당에서 두 기둥을 무너뜨려 3천 명 가량의 블레셋 인을 죽이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그 후에 사무엘이 사사로서 활동했지만 블레셋과 대치하는 정도였다.
2절 정치체제를 바꾸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과 맺은 시내 산 계약에 따른 정치 구조를 버리고 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왕정제도를 추구(追求)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좋게 여기시지 않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선택해주셨다. 그가 바로 사울이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가장 작은 집안의 사람이었다. 당시 정치적 힘을 발휘하던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와 유다 지파였다. 적어도 왕이 나온다면 그것은 당연히 두 지파 중에서 나와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장 작은 지파에서 왕을 정하셨다. 그리고 왕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과 겸손이었다.
3절 나귀를 잃어버린 사건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그 집에서 나귀(驴)를 잃어버렸다가 찾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왕이 될 사울이 겸손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나귀의 의미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상반된 것은 말(horse)인데 말은 전쟁과 두려움을 뜻한다. 요한계시록에도 말을 탄 천사들이 이 세상을 멸하는 장면들이 기록되어있다. 물론 나귀는 이스라엘인이 살던 산악(山岳)지대에서 재산이 넉넉하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타던 교통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나귀는 고귀함을 뜻하기도 하지만 말과 대비해서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한다.
3장 왕권의 변질
사울은 왕이 되어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왕의 책무를 잘 이행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이 늦게 오자 사울은 자신이 제사를 주관했다. 이 일은 왕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을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겸손은 교만이 되었다.
또한 사울은 아말렉(亚玛力)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건강한 가축(家畜)들을 남겨두었으며 어쩐 일인지 왕도 살려두었었다. 이 일은 사울이 전투에 임한 군사들을 생각하여 그들에게 전리품을 주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하튼 이 시기에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왕의 권세가 사람들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의 지지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할 왕이 불순종으로 변질되었다. 이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사무엘상 15장 30절의 말씀이다.
4장 사울과 다윗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
1절 사무엘상 15장 30절의 상황
(삼상 15:30, 개정)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1Sm 15:30, NLT) Then Saul pleaded again, “I know I have sinned. But please, at least honor me before the elders of my people and before Israel by coming back with me so that I may worship the LORD your God.“
扫罗说,我有罪了,虽然如此,求你在我百姓的长老和以色列人面前抬举我,同我回去,我好敬拜耶和华你的神。
이 말씀을 읽으면 사울에 대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한국어 성경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다시 간청했다고 썼다. ‘pleaded again’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면 좋겠는데 사울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인 장로들과 지지 세력인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명예를 높여 달라고 말했다. 그 방법으로는 제사장인 사무엘이 왕인 자신과 함께 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사울이 어떤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안다고 했다. 그런데 용서를 구할 사울의 하나님이 이 말씀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사무엘의 하나님만이 등장한다. 즉 사울은 나의 하나님 혹은 우리의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당신의 하나님’께 경배하게 해달라고 했다. 사울은 자신의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2절 사무엘하 12장 13절의 상황
이 말씀과 사무엘하 12장 13절의 말씀을 비교해보자. 사무엘하 12장 13절의 배경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투를 통해 간교하게 죽인 후였다. 선지자 나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다윗에게 이와 같은 죄악을 드러냈을 때에 다윗의 마음과 태도가 이 말씀에서 보인다.
(삼하 12:13, 개정)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2Sm 12:13, NLT) Then David confessed to Nathan, “I have sinned against the LORD.” Nathan replied, “Yes, but the LORD has forgiven you, and you won’t die for this sin.
大卫对拿单说,我得罪耶和华了。拿单说,耶和华已经除掉你的罪,你必不至于死。
3절 영어 성경 표현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께 저항하여 죄를 범했다고 고백했다. 사울과 다윗이 죄를 범했을 때에 마음과 태도는 정말 다르다. 한국어 성경에서는 잘 표현이 안 되는데 영어 성경으로 보면 조금 더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사울과 다윗의 말은 영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I know I have sinned. 我有罪了。
I have sinned against the LORD. 我得罪耶和华了。
사울은 자신이 죄를 범했음을 안다고 했다. 그런데 이 표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 죄를 지었는지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죄를 지은 것을 안다고 했다. 이 표현은 죄를 지은 것을 내가 안다고 표현하여 마치 죄를 지은 것이 자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거나 무관하다는 인상을 갖게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문제를 표현할 때에 ‘유체이탈(有體離脫)’이란 비평을 많이 들었었다. 그것은 어떤 사건과 자신은 거리가 있거나 무관한 것처럼 표현했기 때문에 언론으로부터 많은 비평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울의 표현이 바로 그와 같다. 반면에 다윗은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직접 표현했다. 즉 ‘I know I have sinned’ 가 아니라 ‘I have sinned’ 였다. 그리고 죄를 지은 대상이 ‘against the LORD.’임을 분명히 했다.
만일 사울이 다윗과 같은 고백을 했다면 그가 사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다. 그의 눈과 마음과 영혼은 이미 변질되었고 하나님이 없이 왕의 권세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실패와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이스라엘에는 블레셋과의 대응하는 네 명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삼손과 사무엘과 사울과 다윗이다. 그런데 삼손은 여자의 꼬임에 넘어가 블레셋의 땅에서 죽었고 사울도 하나님이 없이 왕권을 추구하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사무엘과 다윗은 블레셋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과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다윗의 시대에는 블레셋을 속국으로 삼고 다윗의 나라가 제국이 될 수 있었다.
5장 사울을 향한 다윗의 태도
1절 두 사람의 분기점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에 사울을 향한 다윗의 태도이다. 사울이 다윗을 적대시 한 것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자들이 사울에게는 천천을 돌리고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는 노래가사(扫罗杀死千千,大卫杀死万万)에서 시작되었다.(삼상18;7~9) 사울에게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惡靈)이 들어갔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손에 든 창을 던졌다. 다윗은 두 번이나 창을 피했다.
2절 다윗의 성공가도(成功街道)
다윗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죽이면서부터이다. 한편 악령 때문에 정신이 어지러운 사울은 다윗의 수금(弹琴) 소리를 들으면 평안을 되찾았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울의 집에서 수금을 연주했다. 그럴 때에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현상만 보면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성경은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한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18:12)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扫罗惧怕大卫。因为耶和华离开自己,与大卫同在) 이 사건 이후 사울은 다윗을 군대의 천부장으로 삼고 자신의 곁을 떠나게 했다. 아마도 군대에서 전투 중에 사망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오히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명성과 더불어 더욱 많은 인기를 얻게 했다.
3절 사울의 사위
사울과 다윗의 긴장관계는 더욱 증폭되어 갔다. 사울은 그의 딸 메랍(米拉)과 미갈(米甲)을 이용하여 다윗을 블레셋과의 전투에 몰아넣어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도 실패했다. 사무엘상 18장 29절은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Saul became even more afraid of him, and he remained David’s enemy for the rest of his life.就更怕大卫,常作大卫的仇敌)’ 하고 기록했다.
4절 침상 채 들고 오라
사울은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 때에 요나단의 중재로 다윗은 다시 사울 왕 앞에 있게 되었으나 다윗이 수금을 연주할 때에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다윗은 다시 집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울의 결심이 강하여 군사를 보냈다. 그리고 다윗이 병을 핑계로 사울 앞에 오지 않자 군사들에게 다윗의 침상 채 들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삼상19:15当连床将他抬来,我好杀他) 그러나 다윗은 미갈의 도움으로 집을 빠져 나갔다.
5절 아들에게도 던진 창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조금 이상하게 보는 것은 앞서의 상황을 겪고서도 초하루에는 사울과 다윗이 함께 식사를 하는 예식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사울의 정신이상으로 보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괜찮은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성경을 보면 사울과 다윗의 관계가 이와 같이 살해의 위기와 긴장 해소로 진행되고 있다. 다윗이 계속해서 보이지 않자 사울은 다윗의 근황을 물었다. 요나단이 답하기를 다윗은 성읍에서 가족의 제사가 있어서 보냈다고 했다. 그러자 다윗이 탈출한 줄 알고 사울은 요나단에게 큰 화를 냈다. 그리고 심지어 다윗처럼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까지 했다.(삼상20:33扫罗向约拿单抡枪要刺他)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참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로서 사울은 아들 요나단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다윗에게 있는 줄을 알고 있다. 게다가 요나단마저 다윗을 돕고 있으니 사울로서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사울은 다윗을 ‘죽어야 할 자’라고 표현했다.(삼상20:31他是该死的) 그런데 지금 사울의 감정은 왕위계승자인 자신의 아들 요나단마저 죽이려고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6절 대화가 필요해? 그러면 회개가 필요해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현재 한국의 적지 않은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대화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나도 요즘은 위기를 느낀다. 자식들은 이미 다 성장했고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데 아버지로 내가 무엇을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 나의 집에서는 어려서부터 어떤 토론 주제를 정해서 함께 토론해 오는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도 가끔 토론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함께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단히 신기해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자식들과 대화를 하느냐? 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한국의 가정이 정말 큰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줄어들고 있을까? 큰 이유는 세대 간에 경험하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급격히 변하는 세상이기에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가치관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집안은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이 모두 성경이 전해주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는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정확하게 되어 있다면 부모와 자식 세대 간에 대화가 차단된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부모가 성경의 관점과 다른 인생을 산다든지 자식이 그렇게 산다면 아마도 대화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하냐?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사느냐? 하는 것이 가족 간의 대화에서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본다.
성경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관계는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았다면 둘 사이의 관계와 대화는 정말 좋았을 것이다. 만일 사울이 사무엘을 통해 죄를 지적받았을 때에 다윗처럼 정말로 회개했다면 아버지 사울과 아들 요나단은 잘 통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관심은 하나님이 없이 왕의 권세를 어떻게 유지하고 자식에게 물려줄 것인가? 하는 것에 가있다. 반면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이다. 그러니 이 둘 사이에는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의 말씀을 보면서 돌이켜야 한다. 아버지가 돌이키든 아들이 돌이키든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생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면 아마도 현대 기독교인 가정에서 부모 자식 간의 문제는 아마 상당히 해결될 것이라고 본다.
7절 가만히 벤 겉옷자락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에 다윗의 태도가 어떠한가? 하는 것은 그것은 사울이 단지 정신병의 문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죽이려고 하는 것이 판명되어 다윗이 사울을 아예 떠났을 때부터 발생한다. 다윗이 엔게디(隐基底) 광야로 피신했을 때에 사울이 추격했다. 사울이 볼일을 보려고 한 동굴(洞窟)에 들어갔을 때에 마침 그 안에 다윗과 그의 수하 사람들이 있었다. 다윗의 부하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여 사울을 죽이자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정도 행위에서도 마음의 찔림을 받았다. 왜냐하면 다윗이 생각하기에 사울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하들로 하여금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했다. 그 후 다윗은 사울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신이 왕을 죽일 어떤 이유와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사울도 다윗을 내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울었다.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시는 것을 고백했다(삼상24:3~22)
8절 창과 물병
아마도 이정도의 감동적인 말이 서로 오갔으면 사울의 다윗 추격은 그쳤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사울은 악신에게 그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이 충동적으로 계속 일어났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26장에서는 다윗이 십 광야에 있을 때에 그를 죽이려고 추격했다. 사울과 그의 부하들이 진을 치고 잘 때에 다윗과 그의 부하 아비새(亚比筛)가 사울의 진영에 잠입했다. 그 때 사울의 잠든 모습을 발견하고 아비새는 사울을 창으로 찔러 땅에 꽂겠다고 했다. 이것은 마치 사사기 4장에서 헤벨(希百)의 아내 야엘(雅亿)이 가나안의 장군 시스라(西西拉)를 장막 말뚝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땅에 박아 죽인 것을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삿4:21西西拉疲乏沉睡。希百的妻雅亿取了帐棚的橛子,手里拿着锤子,轻悄悄地到他旁边,将橛子从他鬓边钉进去,钉入地里。西西拉就死了) 아비새의 이 말은 사울이 다윗의 사람들에게는 마치 가나안의 장군 시스라와 같이 여겨짐을 뜻한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단지 그의 창과 물병만을 갖고 나왔다. 그리고 사울에게 자신이 다녀갔음을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윗이 말할 때는 사울을 아버지로 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아들로 불렀다. 다시 한 번 사울은 다윗의 충성스런 마음에 녹아 마음을 회복한 것이다. 그 후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해 블레셋의 땅으로 갔다. 사울은 후에 블레셋의 침략을 막다가 길보아산 전투에서 요나단을 포함한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6장 사울 왕을 닮은 현대 기독교인
내가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설교로 삼은 것에는 또 하나의 의도가 있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 내에서도 사울과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속했는데 사울과 같은 유형의 사람이라면 이것은 정말 비극이며 고통이다. 주님을 알았지만 자신의 탐욕에 빠져 결국은 자신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표면으로는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믿지 않으며 오직 왕의 권세를 좆는 사울처럼 자신의 권력과 세력과 돈과 이름을 내는 명예를 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을 참되게 믿으려고 하는 다윗과 같은 사람들을 비방하고 제거하려고 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오직 왕의 권세를 가진 사울 자신에게만 집중시키려고 하는 마음과 태도가 있으니 사울과 같은 기독교인은 결국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다윗과 같이 죄를 범할 수도 있다. 가능한 한 그런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나 성경은 인간이 갖고 있는 바닥이 어떠한지를 다윗의 행위를 통해 상세히 보여준다. 그런데 누가 기독교인인가? 하는 것을 논할 때에 다윗을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윗은 정확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회개를 통해 주님이 영이 함께 하는 것을 회복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나라를 가슴에 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천국은 그 사람 자신이 만든 착각이고 거짓된 확신일 뿐이다. 우리는 사울의 마음과 태도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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