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敎와 불교와의 관계 <3회>
Share This Article
[역사저널=김규동 박사] 景敎와 불교와의 관계 <3회> »
the Relation between Jing-Jiao and Buddhism
불화 요소가 이 두 종교 사이에 줄곧 존재했지만, 불교보다 늦게 중국에 오게 된 景敎는 어쩔 수 없이 불교적 어원을 빌어서 景敎교리를 전파해야 했다. 이는 景敎의 비문, 중국어 경전, 그리고 예술품에서도 많이 나타났다. 우선, 景敎의 교리를 표현하는데 많은 불교 용어를 빌려 썼다는 선행연구의 성과를 참조…
세계 3대 종교에 속한 기독교와 불교는 현재 중국에서도 많은 신도들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7~11세기에 초대 기독교 종파의 하나인 景敎가 중국에 유입되기 전부터 불교는 이미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불교는 동한 말기 중국 본토로 전래된 후, 오백 년 이상의 발전을 거듭하고 나서야, 景敎가 중국으로 전입되었고, 이때쯤, 불교는 이미 토착화의 과정을 거의 다 이룬 상태였고, 심지어 유교와도 견줄 만큼 세력이 확장되었다.
불교의 성공은 당연히 景敎의 모델이 되기도 했지만, 같은 외래종교로서 조만간 둘 사이의 경쟁관계가 불가피했다. 발견된 역사사료를 통해 보면 불교의 景敎에 대한 태도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景敎 비문과 역사문헌으로 봤을 때, 둘 사이의 불화가 줄곧 존재하였다. 비문에서 “聖歷年釋子用壯騰口於東周(성역년석자용장등구어동주)”라고 기록하였는데, “聖歷年”이란 武周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석자(釋子)”란 불교 신도를 말하는 것이다.
무측천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불교의 공이 컸었다. 때문에 武周 시기에 불교가 유불도 三敎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비문에서 기록된 것이 바로 득세한 불교가 景敎를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담까지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당 圓照의 저서인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敎目錄)에서도 유력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好心既信重三寶請譯佛經。乃與大秦寺波斯僧景淨依胡本。六波羅蜜經譯成七卷。時為般若不閑胡語複未解唐言。景淨不識梵文複未明釋教。雖稱傳譯未獲半珠。圖竊虛名匪為福利。錄表聞奏意望流行。聖上浚哲文明允恭釋典。察其所譯理昧詞疏。且夫釋氏伽藍大秦僧寺。居止既別行法全乖。景淨應傳彌屍訶教。沙門釋子弘闡佛經。欲使教法區分人無濫涉。正邪異類涇渭殊流。若網在綱有條不紊。天人攸仰四眾知歸”。
위 내용으로 알 수 있는 것은 景敎碑를 기재하는 경정이 景敎를 전도하기 위해 불교의 힘을 빌려 반야삼장(般若三藏)과 함께 육파로밀경(六波羅蜜經) 등의 경전을 번역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승려집단이 경정의 번역작업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심지어 석가모니가 “正”이고, 景이 “邪”라고 여겨, 경정이 불교의 법에 접근하면 안 된다고 여겼다.
한 가지 더 설명해야 되는 부분은 석찬녕(釋贊寧)의 저서인 송고승전(宋高僧傳)에 般若三藏의 전기가 있는데, 그가 경전을 번역하는 상황을 기록하였지만 경정도 함께 작업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기록은 아예 없었다. 아마도 釋贊寧이 경정과 경전 번역작업에 함께 참여했다는 소문이 불교계에 알려짐은 그리 보기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증거는 바로 서원여(舒元與)가 하는 중암사비문(重岩寺碑文)이다. 비문에서 “亦容雜夷而來者, 有摩尼焉, 大秦焉, 祆神焉.合天下三夷寺, 不足當吾釋寺一小邑之數也(역용잡이이래자, 유마니언, 대진언, 오신언 합천하삼이사, 불족당오석사일소읍의수야)”라는 표현이 있다. 비록, 비문에서 三夷敎라 불렀지만 서원여는 불교를 우두머리로 여기는 “자부심”이 그대로 나타났다. 다른 말로 하면 景敎가 중국에 있는 또 다른 2개의 夷敎와 더불어 불교 승려들의 경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景敎 경전 내 “불교 고유명칭” 통계표
景敎 경전 내 “도교 고유명칭” 통계표
비록, 불화 요소가 이 두 종교 사이에 줄곧 존재했지만, 불교보다 늦게 중국에 오게 된 景敎는 어쩔 수 없이 불교적 어원을 빌어서 景敎교리를 전파해야 했다. 이는 景敎의 비문, 중국어 경전, 그리고 예술품에서도 많이 나타났다.
우선, 景敎의 교리를 표현하는데 많은 불교 용어를 빌려 썼다는 선행연구의 성과를 참조해, 景敎 경전 7편의 시간과 순서에 따라 불교 용어를 도표로 작성하여 더 직관적으로 景敎가 불교에 대한 의존을 표현한다. 이것은 景敎의 토착화를 위한 몸짓으로 해석되어지기도 한다.
그다음으로는 불교 경전 문장 구성에 대한 응용이다. 가장 전형적 대표는 바로 景敎 경전 중국 번역본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이다. 불교 경전의 구성, 특히 대승불교의 경전 구성이 도입 부분에 보통 여러 천신(天神), 보살(菩薩) 등이 佛의 주변에 앉아 아난(阿難)의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하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여러 천신 보살 “聞佛所說, 皆大歡喜, 禮佛而退(문불소설, 개대환희, 예불이퇴)” 등 용어로 마무리한다.
志玄安樂經의 문장구성이 이와 매우 흡사하였다. 잠은승가(岑穩僧伽)의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하였고, 사람들이 “공경한 자세로 둘러앉는다”고 한다. 설교가 끝날 때 “時諸大衆, 聞是語己, 頂受歡喜, 禮退奉行(시제대중, 문시어기, 정수환희, 예퇴봉행)”이라고 한다. 구조뿐만 아니라 용어와 운율에도 일치한 부분이 많았다.
세 번째 예는 景敎의 예술품으로 불교의 예술 요소를 많이 빌려다 썼다. 위에서 언급한 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석비 머리 부분에 있는 십자가 문양이 그 전형적 대표였다. 십자가가 로마제국 초기에는 노예와 죄인을 벌하는 형틀이었는데 기독교의 발전에 따라 점점 종교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과 동방기독교의 십자가의 형태는 달랐다. 6세기부터 로마 가톨릭에서는 예수님 수난상이 달린 십자가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동방기독교의 십자가는 위에서 언급하듯이 간단한 십자 교차형태였다. 예수님이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하는 교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 현상을 초월하는 구체적 표현이다.
중국에 전입된 동방기독교의 이름은 景敎인데 “景이란 크다, 빛나다, 광명이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빛이 찬란한 종교”이다. 景敎 십자가도 이런 영향을 받아 새로운 예술적 표현 형식을 지니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머리에 있는 십자가 문양과 아래 부위에는 연꽃과 구름 문양이 있다.
그동안 연꽃은 불교 예술 작품에서 보통 부처와 동시에 나타나곤 하고, 심지어 청정, 고결이란 뜻으로 “부처”의 상징으로만 알고 있었다. 景敎碑에서 나타나는 연꽃 구름 문양도 불교 예술에 있는 연꽃의 특수의미를 빌려 자기가 광명 초탈한 뜻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원죄에서 벗어나 “흙에서 자라지만 오염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景敎가 불교의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고 학계의 정설로 전해졌다. 이는 景敎의 토착화의 표현 중의 하나였다고 여겼다.
그러나, 필자는 성경의 근거를 통해 그동안 학계의 고착화된 이해를 반박코자 한다. 심지어, 현재 불교에서 사용되는 여러 부분의 종교적 문화형태들은 이미 훨씬 이전(B.C. 1500경 추정)부터 존재했고, 생활화되었다. 다만 후일 중국 불교(B.C. 2세기경)가 이러한 문화의 일부를 취하여 종교화시킨 것은 구약성경 출애굽기를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다.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이편 가지에 살구 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가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가지를 같게 할지며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위하여 꽃받침이 있게 하되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두 가지 아래 한 꽃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며 또 가지아래 한 꽃 받침이 있어 줄기와 연하게 하고 그 꽃받침과 가지를 줄기와 연하게 하여 전부를 정금으로 쳐 만들고” (출애굽기 25:31~36)
그리고 십자가 아래 연꽃이 달린 문양은 일찍이 인도 사도도마의 십자가상에서 나타났다. 끝의 네 면에 두 개의 꽃잎이 아래로 쳐진 연꽃 봉오리로 장식되어 있는 도마의 십자가는 인도의 국화인 연꽃을 자신들의 상징인 십자가 아래에 사용했다.
원대 몽골의 야리가온(也里可温)교 십자문양에도 나타났다.
심지어 홍콩 도풍산(道風山) 기독교의 문양표시도 십자가 아래연꽃이 있는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예술 형태 역시 기독교예술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고, 자연스럽게 중국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본다. 필자가 추측해 보건데, “7~11세기에 들어 오히려 景敎가 역으로 불교의 예술 형태인 연꽃 문양을 빌리지 않았을까 싶다.
이 밖에도 위에서 언급한 돈황에서 발견된 景敎 인물화상이 돈황 시기의 불교 화상에 비하면 손 모양이나 얼굴 형태에 a Cross on a Lotus flower 대한 묘사가 거의 같았다.
영국의 한학자 웨일리(A.D.Waley, 1889~1966)는 자기의 저서인 “스타인이 돈황에서 받은 회화품 목록”에서 이 그림에 대해 “이 그림이 돈황에서는 景敎 화상이었지만, 나중에 보살 화상으로 여겨 숭배를 받았다”고 하였다. 웨일리는 이에 인정하려 않을진 모르지만 돈황의 인물 화상의 원본이 불교 화상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마지막으로는, 景敎가 불교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돈황 문서 P2566 묘법연화경묘음보살품제이십사(妙法蓮華經妙音菩薩品第二十四)에는 景敎와 관련된 찬양이 있다.
“一二三四五六七, 萬物玆生在此日, 江南鴻雁負霜回, 水底魚兒帶冰出
(일이삼사오육칠, 만물자생재차일, 강남홍안부상회, 수저어아대빙출)”.
이 찬양은 하나님이 7일간 세상 만물을 창조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왜 불경에서 이런 찬양이 나타나는지에 대해 연구할 만하다. 아마도 그때 당시에 돈황에서 유행하는 景敎가 현지의 불교 승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가능성이 매우 컸다.
◙ Now&Here©ucdigiN(유크digitalNEWS)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