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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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저널=정이신목사] 연을 쫓는 아이 » 할레드 호세이니(Khaled Hosseini) 지음, 왕은철 옮김/ 출판사: 현대문학 »
‘그러나’ 나는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도 두 팔을 벌리고…
“장군님, 제 아버지가 하인의 아내와 동침을 해, 하산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하산은 이제 죽고 없습니다. 소파에서 자고 있는 저 아이는 하산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저 아이는 제 조카입니다. 사람들이 물으면 그렇게 답하시면 됩니다.” 모두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장군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제 앞에서 다시는 저 아이를 하자라인 아이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저 아이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소랍이라고 합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 [책 내용 중에서]
소설의 배경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주인공 아미르는 카불에서 살던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 하인 알리의 아들 하산과는 제일 친한 친구면서 주인이었습니다. 아마르의 아버지 바바 역시 하인 알리와 형제처럼 컸기에, 그를 가족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들 관계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책의 후반부에 바바의 가까운 친구이자 사업 동반자로 글쓰기를 좋아하는 어릴 적의 아미르를 격려해줬던 라힘 칸에 의해 새로운 비밀이 알려집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아미르에게 속죄를 위한 장치가 제공됩니다.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후 결혼했고, 바바가 죽은 후 미국에서 작가 생활을 하던 아미르에게 연락해 파키스탄에서 그를 만난 라힘 칸은, 그가 몰랐던 그의 아버지 바바에 관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때 아미르는 어릴 적에 자신의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그가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의 이면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냅니다.
라힘 칸의 권유를 받아들여 하산의 아들을 찾으러 아프가니스탄으로 간 아미르가 그곳에서 본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식당 근처에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교수형에 처해 진 모양이었다. 대들보에 묶인 로프에 젊은 남자의 시체가 매달려 대롱거렸다. 그의 얼굴은 붓고 새파랬다. 너덜너덜한 옷은 피범벅이었다. 아무도 시체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식당과 시체의 대비! 식당은 생존을 위한 곳이고, 매달린 시체는 정치적 반대 세력을 죽음으로 징계하겠다는 경고로, 죽음이 일상화된 현실입니다.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한 후 사람이 다니는 식당 근처에 있는 시체를 보고서도, 사람들은 무감각한 것인 양 행동합니다. 이게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저자가 축약해서 묘사한 문장입니다. 자기가 태어나고 자랐던 조국이 변해서 이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곳이 된 걸 본 아미르, 아니 이 책의 저자 할레드 호세이니는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소설로 돌아가 라힘 칸이 알려준 비밀을 알고 번민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낸 아미르는 하산의 아들인 소랍을 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입양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주인이면서 친구인 체했던 관계에 숨겨져 있던, 어릴 적 하산에게 부끄러운 빚을 졌던 기억을 이복형제로 돌아가 갚으려고 합니다. 또 하산이 죽었지만 소랍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자신의 주변 인물에 대해 예전과 다른 관계를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기회주의적 탈레반으로 변신한 아세프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일종의 반동 인물인 그에게 어릴 적 하산에 이어 그의 아들인 소랍까지 동성강간을 당했다는 게 알려집니다. 소설은 이런 사건의 배열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에 남아야 했던 이유로 탈레반에게 학살의 대상이 된 하자라인의 고통과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책임이 서로 이어져 있다고 합니다. 떠난 사람이나 남아 있는 사람이나 여전히 그들만의 아픔인 ‘조국 아프가니스탄’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형제여, 공개적인 처형은 가장 위대한 쇼지. 극적이고 긴장감이 있고, 무엇보다도 집단적인 교육의 기능을 하거든.” 탈레반으로 변신한 아세프가 아미르에게 한 말에는 총살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그동안 공개총살형이 갖는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북향민 제자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보고 독재와 공개총살형이 서로를 보완하며 지탱해주는 게 뭔지 생각해 봤습니다.
인간사에 우정과 배신에 관한 이야기처럼 진부(陳腐)한 게 없지만, 이걸 속죄와 구원에 관한 메시지로 얽어낸 저자의 내공이 꽤 깊습니다. 게다가 이걸 가족사 및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와 연결했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속죄를 위한 희생과 소랍을 입양하며 아미르가 발견한 구원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용기를 얻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의 백미를 다음 대목이라고 봅니다.
“한 차례에 걸친 미소였을 뿐이다. 그 이상은 없었다. 그것에 모든 걸 정상으로 돌려놓지는 않았다. 어떤 것도 정상으로 돌려놓지 않았다. 그저, 한 차례의 미소였을 뿐이다. 자그마한 것, 놀란 새가 날아오를 때 나풀거리는 숲속의 나뭇잎 하나 같은 것. 그러나 나는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 두 팔을 벌리고 말이다. 봄이 오면 눈이 한 번에 한 조각씩 녹듯, 어쩌면 첫 조작이 녹기 시작한 걸 목격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도 두 팔을 벌리고. 여러분에게 두 팔을 벌리고 ‘그러나, 그러나’를 외치며 받아들여야 할 소식이 있습니까? 이 책을 통해 그걸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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