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나는 문학, 음악, 이야기로 성경을 전한다” 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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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포럼=김덕현 박사] 소강석 목사의 “나는 문학, 음악, 이야기로 성경을 전한다” 논찬 »
소강석 목사의 설교 시연은 성령이 만든 페르소나…
논평자가 보기에는 발제자가 추구하는 극화된 설교는 인문학적 현학성을 통해서 발견된 신학적 명제적 내용이 설교라는 언어 사건으로 실행되는 과정에서 고유한 설교자의 지위와 관련된 정형성(定型性)을 가진다. 정형성은 복음의 현전성(現前性)의 작동의 유무를 알려주는 판별식이다. 즉 설교자가 성령의 페르소나가 된 것이다. 진지한 내용을 설교하지만, 설교자 자신이 진지해지지 않음으로 복음이 실제로 구현되는 것을 청중들에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현학성이 복음의 현전성으로 극화되었다…
김덕현 박사 칼빈대신학대학원장, 예배설교학 교수

1. 공헌에 대한 감사: 논문의 내용 정리 및 논문의 공헌
먼저 그동안 간과됐던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극화된 설교에 대해 잘 정돈되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실제적인 발제문을 작성해 주신 소강석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 요약
발제자의 논문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 발제자는 성경 말씀을 전하는 자신의 설교방식을 “말씀을 전달하되, 좀 더 효과적이고 감동적으로 성경을 전하기 위하여 말씀에 문학과 음악의 옷을 입혀 이야기 형식으로 말씀을 전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극화된 이야기를 말한다” 라고 진술한다. 논문은 극화된 설교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 발제자가 실제 시연한 설교원고를 예를 들어 극화된 설교의 3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가. 나는 문학의 옷을 입혀 성경 말씀을 전한다.
나. 음악의 옷을 입혀 성경을 전한다.
다. 성경을 이야기로 전한다.
그러나 발제자는 극화된 설교가 “문학과 음악과 이야기체로 극화적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방법론이나 원리”로만 굳어지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더 나가 극화된 설교가 또 하나의 정형화된 설교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엇보다 설교자 자신이 중요하다.”라고 주장하면서 설교자가 갖추어야 하는 3가지 진정성이 담긴 변화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설교자 자신이 먼저 바보스러움과 어리석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애틋함과 애절함이 있어야 한다.
셋째, 자기 부인과 비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후 발제자는 논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바보스러운 설교자와 세상에 감동을 주고 있는 역설적이고 바보스런 공동체인, 발제자가 말씀으로 섬기는 사역 현장을 소개함으로 논문을 마치고 있다.
2) 논문의 공헌
이 논문은 한국교회에 아직 적극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설교학을 비롯한 최근의 신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주제들과 과거 신학적 유산을 구체적으로 설교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논문에서 언급된 언어 행위 이론을 통한 설교언어의 이해는 최근 설교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한국교회 목사님들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단순발화층의 연구를 강조하는 설교적 견해는 최근의 설교학에서는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언어행위 이론은 온전한 의사소통을 하나의 언어적 사건으로 연구한다. 언어행위 이론에서, 언어란 말을 하면서 동시에 실행되는 행동이다. 즉 언어란 단순한 명제적 진술이 아닌 수행적 행동 그 자체다. 언어가 수행하는 행위는 다음과 같은 3가지 행동 양식이다.
가. ‘단순발화 행위’: 음성이나 문자로 표시된 언어 행동
나. ‘의미수반발화 행위’: 단순발화 행위를 하면서 행하는 행동
다. ‘효과수반발화 행위’: 의미수반발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행동
말하자면, 어떤 집 대문에 ‘개조심!’이라는 문구가 있다고 하자. 이 문장 자체는 ‘단순발화 행위”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경고’라는 ‘의미수반발화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 만약 이 문장을 읽은 사람이 단순발화 가운데 수행되고 있는 ‘경고’라는 ‘의미수반발화 행위’를 인식하고 그 집 대문을 열지 않았다면 ‘효과수반발화 행위’가 수행된 것이다. 이때, 언어행위 이론이 주장하는 언어 철학의 기본적인 논지는 말하기 혹은 글쓰기는 일종의 의미 있는 행동이다.
언어행위의 인식은 단순한 사건의 묘사나 정보 전달의 이해를 넘어 일련의 적합한 상황 속에서 발생된 행동력과 그 에너지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언어적 표현은 일종의 에너지를 가지고 행동을 수행하며 그 에너지는 보존된다. 이때 이상적인 의사소통 행위는 단순발화의 인식을 넘어 ‘의미수반 발화행위’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적절한 반응으로써 ‘효과수반발화 행위’까지 완료되는 상황이다. 언어행위 이론은 명제적 내용(단순발화 행위)의 인식과 함께 그 내용이 진행하는 동사적 행위(의미수반발화 행위)을 연구한다. 언어행위 이론에서 의사소통이 작동하는 기본 단위는 단어 또는 문장 등에 해당하는 명시적인 명제가 아닌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수행된 암시적인 ‘의미수반발화 행위’이다. ‘의미수반발화 행위’는 언어 의사소통의 최소 단위이다.1 모든 종류의 ‘명시적’인 명제적 내용은 ‘암시적’인 ‘의미수반발화력’이 내재되어 있으며, ‘의미수반발화 행위’의 범주의 구별은 의미를 만들어낸다.2 언어행위는 언어적 요소(명시성)와 비언어적 요소(암시성)를 통합적으로 F(p)로 공식화(formulation)된다. F는 수행되는 ‘의미수반발화 행위’이며 (p)는 명제적 내용이다.3 현재 사용되는 대부분 언어 행위 이론과 관련된 용어와 이론화된 개념들은 주로 Searle의 작업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명제적 진술의 의도성은 ‘의미수반발화력’을 통해서 실행된다. 암시적인 ‘의미수반발화력’과 명시적인 명제적 진술(p)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한다면, 발제자가 말하는 설교의 입장에서 극화된 설교의 실천은 본문이 실행하는 성경적 ‘의미수반 발화행위’의 범주를 해석하고 ‘의미수반발화 행위’가 기대하는 ‘효과수반발화 행위’로써 설교행위를 실행하는 과정이다. 흥미로운 것은 논평자가 볼 때 본문에서 발견되는 발제자가 강조하는 설교자의 “애틋함과 애절함”이란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본문으로부터 경험한 ‘의미수반 발화력’이 극화된 설교를 통해서 ‘효과수반발화 행위’ 사건으로 설교적으로 명확하게 인지하며 자신의 설교 가운데 이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논평자는 발제자가 주장하는 “애틋함과 애절함”이 극화된 설교를 돕는 주해와 관련해서 중요한 설교학적 이론의 근거를 제공한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 부분은 앞으로도 발제자의 설교 철학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요구된다. 현장에서 설교학을 가르치는 한 사람으로서 어떤 이들은 발제자의 설교에 주해가 다소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같은 견해를 가진 분들의 성경주석에 대한 이해는 언어행위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단순발화층의 의미의 자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단순발화층의 연구를 강조하는 설교적 견해가 한국교회 목사님들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단순발화층의 내용만을 강조하는 설교는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있었던 계몽주의의 과학적 진보의 영향 받은 설교의 방식이다. 이런 설교를 버트릭(Buttrick)은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말하고 있다. “설교자는 연구를 위해 하나의 대상을 따로 나누는 과학적 절차를 그대로 흉내 낸 것처럼 보인다.” 4 단순발화 층만을 강조하는 설교를 위한 주해란, 설교를 논증과 동의어로 만드는 과정이다. 논증적인 설교와 강해적인 설교를 구별하기 위한 성경 해석학의 완성도는 본문이 실행하는 언어행위의 총체적 이해로 결정된다. 발제자가 말하는 설교자의 극화의 과정이 가진 설교적 전유 과정을 아래와 도표를 가지고 좀 더 자세히 평가한다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Text → Preached Text → Preacher
신학적 내용(명제) ———————————–> (언어사건)
Ⓑ Text → Preacher → Preached text
신학적 명제가 설교적 사건으로 변화되는 과정 속에서 설교자는 다음과 같은 언어적 전유에 노출된다. 언어적 사건으로 실행되기 이전의 명제적 형태의 복음의 내용은 설교적 전유 과정Ⓐ에서 설교자는 명제(설교하려는 내용)와 언어사건(설교행위)의 과정 가운데 최종적인 의미를 확정한다. 이 경우 설교자가 사용하는 설교적 자료는 복음의 내용에 대한 명제적 층에서 사용가능한 재료들이다. Ⓐ가 위치한 설교행위 타당성의 조건은 명제적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교적 행위의 완성도는 논증적 명확성의 유무로 평가된다. 설교자의 모국어는 객관적인 논리가 된다. 이 경우 설교자가 가진 인문학적 현학성은 성경 본문이 설교 본문으로 전유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마치 생물학에서 표본처럼, 설교의 대지를 구성하는 정보를 위해서 분석된다. 즉 설교 작성을 돕는 자료집처럼 명제들과 대지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해부되고 잘린다. 설교자가 사용하기 쉽도록. 기록된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 설교를 만들어내는 주어가 아닌 목적어가 되었다.
설교적 전유 Ⓑ의 경우 설교자는 명제(설교하려는 내용)와 언어사건(설교행위)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명제가 변혁시킨 설교자의 상을 만든다. 말하자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삶이 전적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행동가’ 사울이었다.(행 9:1). 사울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때 그가 가진 인문학적 현학성을 통해서 인지한 명제적 내용은 바울의 설교를 행할 때와 동일한 명제이다. 동일한 명제를 설교자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이지 사울이 바울로 변화는 과정에서 그의 신학적 행위의 자료가 되는 명제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일한 명제 가운데 그 명제를 사용하는 사람이 변화된 것이다. 설교자가 명제를 사용해서 설교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언어로 기록된 명제적 내용을 가지고 설교자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 본문의 상(像)을 구성하기 이전에 설교자의 상(像)이 그 복음의 내용을 전달하기에 합당한 상(像)으로 재형성되는 과정이 요구된다. 설교자가 극화되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논문이 가진 공헌은 발제자의 주장처럼 문화, 음악, 이야기들의 예술적 장치로 구성된 미학적 개념을 가지고 신학이 요구하는 진정성을 구현하려는 움직임은 목회 현장뿐 아니라 설교학과 성경신학 그리고 조직신학의 영역에서도 최근 관심을 가지고 연구되고 있는 주제이다. 1998년부터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존 그레섬 메이천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대 개혁주의 잡지의 편집장인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 교수는 하나님의 드라마로서의 예배의 회복과 갱신을 주장하고 있다. 호튼 교수와 동일하게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M.Div를 수학 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미국의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조직신학자 케빈 벤후져(Kevin J. Vanhoozer) 교수는 자신의 “교리의 드라마”와 “이해를 이야기하는 믿음”이란 책에서 전통적인 신학 주제를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설명한다.
극작가 겸 제작자: 성부하나님
주연: 성자 예수님
총감독: 성령님
조감독: 목회자
대본: 성경
신학: 극작술
교리: 상연 지도
복음의 연극단: 교회
벤후져는 공동체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연극단의 거룩한 바보들의 극장이라 설명하면서 광대설교의 어색하고 불편한 내용을 복음의 진정성이 세상과 소통된다면 설교자의 모습이 경박스럽고 수치스러운 광대처럼 보여도 상관없다고 주장한다.5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최근 연구는 성경과 극장 그리고 예배 설교에 대하여 고전적 가치를 다시금 불러일으키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세상은 성령님이 만든 하나님의 눈부신 극장(theartrum illustre)이다”라고 말했다.
존 던이 버지니아 연극단을 상대로 했던 사도행전 1:8 설교 중에서 (1622년 11월 30일) “사도행전은 그리스도 예수라는 그 이름을 전달하고, 그분의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사랑하는 자들이여, 그대들도 똑같은 무대 위에 서 있는 연기자다. 이 땅의 모든 곳이 그대들의 무대다. 사도들의 연기를 시연하라”고 설교했다. 그는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었으며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 성공회로 전향할 때까지 종교적 박해를 당한 설교자이다. 존 던은 설교에서 은유적인 언어와 개인적인 경험, 성경적 주제, 그리고 서사적 형태를 탁월한 감각으로 융합시킬 줄 아는 설교자며 동시에 탁월한 시인이다. 존 던의 인문학적 재능은 이후 1920년대 초 T,S 엘리엇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세속적인 자본주의적 이념의 구현으로 나온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존 번언의 『천로역정』은 성경적 가치를 드라마적으로 잘 구현했다. 영국 근대 소설의 시조로 평가받는 그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당할 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배역을 연기하기 위해서 극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언덕 위에, 무대 위에 오른다.” 라고 「시기적절한 권고, 또는 고난당하는 자들에 대한 조언」(1684)에서 이처럼 다시금 칼빈의 표현을 상기시킨다.
최근의 신학자들과 존 번언 그리고 존 던 의 공통점은 성경 사용에 대한 드라마적 유비이다. 성경은 분석해야 할 텍스트라기보다 오히려 연기자들로 구성된 연극단, 곧 기독교로 알려지게 될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일련의 광대들의 대본으로 이해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논문이 가진 공헌도는 설교 가운데 사용되는 곡조 있는 예화에 대한 이해이다. 실제로 논문에서 언급된 예 외에도 설교학사 연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설교문으로 소개되고 있는 사르디스의 멜리토(180년 사망)의 “부활절 설교”에서 발견되는 설교의 형식에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교리적 요약 다음으로 영광송의 형식으로 설교가 마무리된다. 논평자는 논문에서 발견된 극화된 설교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에 대한 설교학적 연구와 실천적 교육을 통해서 현대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가지고 있는 설교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대안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2. 논평과 질문
이러한 논문의 유익과 공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이 가진 설교적 고민과 부담감을 덜어주는 논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논평과 질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목사님들은 말씀을 전할 때 설교자의 우아함이나 품격을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세련되게 전달하는 모습이 한국 교회 설교자의 모습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신다. 더 나가 전통적인 삼대지 설교의 형식이 지켜지지 않는 설교는 설교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신다. 그분들은 삼대지 설교가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을 전달하는 형식의 설교라 생각하시는 것 같다 이 같은 상황 가운데 발제자가 말하는 극화된 설교는 대지 설교의 형식에서도 가능한 것의 인지 묻고 싶다. 또 한 가지는 설교학자 캠벨이 경고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지 못하는 서사 설교가 있다. 서사 설교란 솜사탕 같은 설교를 말한다. 발제가가 주장하는 극화된 이야기 설교가 솜사탕같이 재미만 주는 서사 형식의 이야기 설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떠한 부분을 고민하고 준비하지 궁금하다.
3. 총평
논평자가 보기에는 발제자가 추구하는 극화된 설교는 인문학적 현학성을 통해서 발견된 신학적 명제적 내용이 설교라는 언어 사건으로 실행되는 과정에서 고유한 설교자의 지위와 관련된 정형성(定型性)을 가진다. 정형성은 복음의 현전성(現前性)의 작동의 유무를 알려주는 판별식이다. 즉 설교자가 성령의 페르소나가 된 것이다. 진지한 내용을 설교하지만, 설교자 자신이 진지해지지 않음으로 복음이 실제로 구현되는 것을 청중들에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현학성이 복음의 현전성으로 극화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눈에 볼 수 있게 연출되고 있다. 복음의 내용은 설교자의 품세를 명확하게 실행한다. 논평자는 이 언어적 사건을 설교자, 그 성령의 페르소나(Persona)라고 말하고 싶다. 소강석 목사의 설교 시연은 성령이 만든 페르소나이다. 그러므로 예배란 정경이라는 대본을 가지고 극화된 설교자들의 설교는 교회라는 극장에서 상영하는 신령한 드라마이다. 드라마의 총감독은 성령님이다. 그러므로 설교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을 이 땅 위에서 실행하는 복음의 드라마로 이해될 수 있다. 예배 중 설교의 상연은 하나님의 임재 언어가 실행하는 성령의 드라마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면, 문학, 음악, 이야기로 성경을 전하는 소강석 목사의 극화된 설교는 투명한 방식으로 어떻게 신학과 인문학이 어리석은 구경거리와 같은 설교자의 모습을 설정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페르소나로 이해될 수 있는 문학, 음악, 이야기로 성경을 전하는 소강석 목사의 극화된 설교는 설교자 상(像)은 현실적인 목회 현장에 관한 대안을 주고 싶은 목회자의 참된 고민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논평자는 소강석 목사의 설교 철학에 담긴 극화된 설교가 가진 현장의 고민이 신학적 가설이 될 때 어떠한 학술적 좌표를 형성하게 되는지를 관찰하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된다. 바라기는 본 발표를 통해서 목회 현장과 학술 현장의 어울림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이 어울림을 통해서 극화된 설교에 대한 확장성이 당위는 많으나 실천은 부족한 오늘날의 설교적 상황 가운데 유익과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으로 논평을 갈음한다.
각주
1. John R. Searle “What is a Speech Act?” in J. R. Searle (Ed.), The philosophy of Language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1971), 39.
2. John R. Searle, “Austin on Locutionary and Illocutionary Acts,”The Philosophical Review 77 (1968): 405.
3. David G. Buttrick, “Preaching the Chriustian Faith,” Liturgy 2 (1983): 54.
4. Vanhoozer, Faith Speaking Understanding, 188.
5. Vanhoozer, Faith Speaking Understanding,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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