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내 이웃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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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저널=정이신 목사] 48. 내 이웃은 누구인가? »
백척간두에 있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바람직한 인간관계 아니야…
<3:29>은 “너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너의 이웃”이라고 구체적인 대상을 밝혔습니다. 사람끼리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다반사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절벽에 서 있으면 그때는 그 사람과 헤어지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절벽에서 내려온 후 헤어져도 늦지 않습니다… 백척간두에 있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이는 이웃에게 해를 끼칠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기에 부부로까지 지냈던 사람들이 헤어집니다. 그런데 이 말씀처럼 배우자가 가파른 난간이나 절벽에 서 있을 때는 힘들더라도 헤어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배우자가 가정폭력이나 간음과 같은 비성경적인 행동을 해서 그렇게 됐다면, 그건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죄입니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면 친구든 부부든 절벽에 서 있는 사람과는 될 수 있는 한 헤어지지 말고, 절벽에서 내려온 후에 관계를 정리하십시오. 이것은 성경에서 그렇게 하라고 한 게 아니라 <3:29>을 통해 유추해 본 저의 해석입니다. 그러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면 안 받아들여도 됩니다. 다만 <3:29>의 말씀으로 개인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우리 사회를 비춰봤을 때, 나를 의지해 사는 이웃은 내 배우자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친구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도 그 사람과 다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싸움은 대개 그 사람과 내가 자존심을 걸고 서로의 우열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싸움은 대개 도토리 키 재기가 되고, 제대로 된 규칙이 없습니다. 게임의 규칙이 있으면 경기가 되는데 이게 없기에 경기가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런 싸움은 안 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넓은 세계를 볼 줄 알아야 이런 싸움을 안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더 넓은 세계가 있는데, 좁은 땅 안에서 서로 내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사람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둘이 헤어진 이유는 아브라함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이 서로 다퉜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비옥한 땅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미 자신에게 하나님의 복이 내려졌기에(창세기 12:2∼3) 아브라함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롯은 자기 의견대로 좋은 땅으로 먼저 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롯이 살았던 곳은 멸망했고, 그의 안해까지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창대한 복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주신 더 넓은 세상을 볼 줄 알면 굳이 불필요한 다툼을 하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이런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데,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듯이 세상은 예수님의 두 증인인 교회를 늘 반대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교회가 세상과 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반드시 성경에서 제시한 방법으로 싸우십시오.
<로마서 12:21>에서 바울은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이게 성경이 제시한 크리스천이 싸우는 방법입니다. 또 바울은 선으로 악과 싸울 때는 반드시 낙심하거나 지쳐서 넘어지지 말라고 했습니다(갈라디아서 6:9). 선과 악이 싸우면 반드시 선이 이깁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이런 모습이 잘 안 보입니다. 그래서 선으로 악과 싸우다가 지쳐서 포기해 버립니다. 그럼 악에 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신데 왜 선을 따르는 내가 집니까? 낙심하거나 지쳐서 넘어지면 선으로 싸우더라도 악에 질 수가 있습니다.
<3:32∼35>은 악한 사람에 대한 권면인데 <3:31>이 결론입니다. <잠언> 기자는 두괄식으로 먼저 결론을 이야기하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독재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국가를 통치하려고 폭력을 씁니다. 이처럼 사람이 폭력을 쓰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움직여 보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아닌 자신이 주장하는 가치를 통용시키기 위해 독재자들은 폭력을 사용합니다.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은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는 가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포학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조심스럽게 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을 존경해서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닙니다. 조폭이 존경스러운 행동을 해서 조폭을 피합니까? 그 사람이 너무 싫어서 피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언제든지 찾아와 내가 키운 나무의 그늘에서 쉴 수 있게 해야지, ‘네가 나를 도와준 게 뭐가 있냐?’라고 닦달하면서 내가 가꾼 나무의 그늘로 쉬러 온 사람을 쫓아내면 안 됩니다. <잠언>은 이렇게 해서 혼자 자기의 나무 그늘에 쉬고 있는 사람을 따라 행동하거나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3:31, 스가랴서 3:10).
이웃을 성경적 가치로 섬기기 위해서는 무력(武力)과 폭력(暴力)을 분별해야 합니다. 나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체력을 단련하는 일은 내가 지녀야 할 무력을 강화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꼭 필요합니다. 건강하게 내 몸을 지키기 위한 무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번지수를 잘못 골라서 이 무력을 다른 사람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 폭력이 됩니다.
무력만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가진 지식은 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사람을 속이는 수단으로 활용하면 내 지식도 폭력이 됩니다. 내가 지닌 특정 능력을 선을 행하는 일에 써야지 남을 억압하고 속이는 데 쓰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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