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기독교의 십자가 연구-마지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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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김규동 박사] 동방기독교의 십자가 연구-마지막회 »
4. 동방기독교 십자가에 나타난 기타 문양(紋樣)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Symbols in the Cross of Eastern Christianity)
景敎는 당조 때 서아시아에서 전래 되어왔고, 일정한 부흥의 시기를 지낸 후 핍박기에는 잠시 변방으로 피했다. 그 후 뜻밖에 변방 민족과 내몽골 족속 간의 혼인관계를 통해 景敎는 몽골 전역에 널리 퍼질 수 있었기에 따라서 역사적 자취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북쪽의 내몽골 경내와 중부의 북경, 그리고 남부의 천주와 양주 등에 남아있는 묘석과 묘비, 석비를 통해 景敎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널리 퍼졌는지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내몽골의 景敎 묘비명의 십자가 외에, 눈에 띄는 또 다른 세련된 문양이 많이 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가장 분명한 특징은 바로 십자가 밑에 연꽃이 있는 것으로, 중국 景敎가 사용한 연꽃은 바로 사생(寫生)과 사의(寫意)에 의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방의 景敎 석비에 새겨진 연꽃은 연잎이 적고 사의를 더 좋아했던 반면, 남방의 석비는 사생과 사의의 간격 차가 없는 연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과 서양은 십자가 밑에 있는 연꽃의 의미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는데, 먼저 서양에서는 연꽃을 불교를 숭배하는 중국을 의미하고, 연꽃 위에 있는 십자가가 서양기독교가 중국에 터를 잡아 넓게 퍼뜨려진다는 의미로 생각했다. 그리고 중국은 연꽃이 불교를 의미하고 “꽃이 피면 불성(佛性)을 볼 수 있다”는 의미를 두고, 그 말이 바로 연꽃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람이 연꽃의 심경이 생기면 불성의 심경이 된다는 것이라 하였다.
이로서 景敎가 꽃잎을 두는 것은 중원에 있는 불교의 꽃이지만, 그 열매는 기독교의 열매라는 것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景敎는 불교의 의미를 빌려 자신의 신앙을 전했다. 또 다른 말로 연꽃은 순결하고 정직한 성품을 상징한다.
중국은 자고이래로 연꽃을 찬미한 자가 많았고, 지은 시가 천고에 전해졌다. 예를 들어 양고조(梁高祖)의 소연(蕭衍)이 지은《江南弄 采莲曲》중에 기록된 “世所希,有如玉”는 연꽃을 옥에 비교하여 순결하고 고귀함을 찬미했다. 그리고 북송 학자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애련설(愛蓮說) 중에 기록된 “出淤泥而不染,濯清漣而不妖”의 아름다운 시구에는 연꽃을 군자로 비유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景敎徒들의 개인적 영성과 내세를 향한 갈망의 부분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연꽃 위의 십자가는 이런 순결한 십자가를 의미하고, 세상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와 연꽃이 갖는 상징적 의미의 결합은 필연적인 것이다. 비록,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십자가에는 연꽃이 없었지만, 동아시아의 십자가에는 연꽃뿐만 아니라 불교적 의미를 담아, 만세무성(萬歲茂盛)을 의미하는 덩굴과, 중국 전통 길상(吉祥) 문양과 파랑무늬 관복, 그리고 제사 중에 사용했던 상, 이슬람 건물에서 자꾸 보일 수 있는 화창으로 테두리 무늬가 있었다. 이런 형태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바로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인 것이다.
이에 따라서 景敎 십자가는 예술적 가치에 의미를 두었기에 포용적인 당대와 몽·원시기의 특징에 잘 맞아 떨어졌다, 이러한 “토착화”로 인해 동방기독교는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와는 달리 동방 색채를 가진 독특한 景敎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景敎 유물 중에 있는 여러 가지 십자가 모양을 탐구해 보았다. 시리아 자모와 돌궐어가 景敎 석비에 그대로 차용한 것을 통해, 몽·원 시기에도 景敎徒들은 돌궐어와 회홀어를 그들의 교류용어로 삼았고 고대 시리아어를 거룩하고 신비한 것으로 삼았다, 이것은 당시에 景敎徒 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돌궐족의 후손들이라 그랬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리고 또 景敎 십자가의 변형과정이 언급되었는데,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비교했고 중국 남방과 북방을 비교해 보니 연꽃이 두 가지 형태로 나뉘었고 또 화창으로 테두리 모양은 송·원 시기에 나타남을 알았다.
5. 결론(Conclusion)
景敎는 당조 때 서아시아에서 전래 되어왔고, 일정한 부흥의 시기를 지낸 후 핍박기에는 잠시 변방으로 피했다. 그 후 뜻밖에 변방 민족과 내몽골 족속 간의 혼인관계를 통해 景敎는 몽골 전역에 널리 퍼질 수 있었기에 따라서 역사적 자취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북쪽의 내몽골 경내와 중부의 북경, 그리고 남부의 천주와 양주 등에 남아있는 묘석과 묘비, 석비를 통해 景敎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널리 퍼졌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것은 당시에 안전한 정치 상황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당대 景敎 유물을 통해 동·서양 문화교류의 깊이와 넓이가 나타났고, 이 전체적인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서양 문화의 충돌과 교류를 통해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것이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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