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유럽비전트립, “유럽의 jew 흔적을 찾아”
Share This Article
[서울=유크] KIM 유럽비전트립, “유럽의 jew 흔적을 찾아” »
하나님 아버지 마음으로 유대인 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
유럽의 Jew 흔적을 찾아(독일, 폴란드, 체코 프라하)라는 주제로 시작된 KIM 유럽 비전트립팀은 지난 7월 11일부터 19일까지 일정을 다녀왔다. KIM 한국 이스라엘선교회 팀(대표 이향숙 목사)과 영국 웨일즈 셀러브레이션 모바일 팀(리더 정석광 목사)이 한 팀을 이뤄 유대인 잔혹의 역사 속 감동적인 쉰들러 리스트의 공장 유대인 박물관, 오쉬비엥침 (아우슈비츠) 수용소 앞에 세워진 기도의 집 (마크 & 케씨), 프라하 게토,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회복을 바라본 모라비안 공동체 헤른후트의 지저스하우스, 베를린 메모리얼 파크 등을 방문했다…
연합팀으로 구성된 유럽 비전트립팀은 각각 영국 웨일스에서 19시간 운전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까지 온 모바일 셀레브레이션팀(2명의 목사와 4명의 예비선교사)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해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내린 한국팀과 합류한 독일 참가팀은 다시 베를린까지 DB(독일 ICE)로 4시간을 이동해 베를린에서 모두를 만나 한 팀을 이루었다.
2대의 9인승 미니벤에 나눠 탄 일행은 독일, 체코, 폴란드를 경유하며, 크라쿠프의 쉰들러 리스트 박물관과 아우슈비츠 학살 장소, 이 어둠을 이기는 것은 기쁨과 찬양뿐이라는 마크(아우슈비츠 기도의 집), 아우슈비츠 옆의 릭의 조각상을 통해 유대인의 고통과 죽음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됐다. 특히 이 처참하고 잔혹한 현장을 둘러볼 때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날 것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마틴 루터 보다 100년 앞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프라하의 프라하 게토, 얀 후스(1372-1415)의 베들레헴 채플, 얀 후스를 따르는 후예들이(보헤미아 모라비안) 이주하여 정착한 진젠도르프 백작의 헤렌후트(뜻: 하나님의 보호하심)지저스하우스, 베를린 메모리얼 파크, 베를린 화해교회(분단과 평화의 상징으로 동독에서 탈출하다 희생당한 138명의 사람을 기리는 곳이자 분단의 희생자를 기리는 곳) 등을 방문하며, 반유대주의(참고: *반유대주의 Anti-Semitism은 유대인들을 인종적, 종교적, 경제적인 이유에서 배척하고 멸절시키려는 사상)를 위해 기도하며, 아버지 마음으로 유대인을 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조1: 진젠도르프 백작은 자기 재산을 다 내어놓고 가톨릭으로부터 핍박받는 전도인들을 도왔으며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각 처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피부의 색깔이나 종파를 초월한 모임이 되어 버렸다. 공동체는 숫자가 많아지면서 형제단으로 발전되었다 모라비안들은 금식과 기도 중에 성령을 체험하고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 한다. 최초로 1732년에 개신교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이들은 다 자비량 선교이다. 그 후 이 공동체는 150년간 2,20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 이들은 선교의 가장 위대한 전략은 기도라고 생각하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 100년간 1년 365일 매일 24시간 쉬지 않고 릴레이 기도 운동을 하였다. 이 결과로 개신교 선교의 황금 시기가 19세기에 도래하였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 정부와 영국 국회를 움직여 ‘형제단’을 승인하도록 했으며, 해외 선교하기가 지극히 어려웠던 그 당시에도 수백 명의 선교사를 세계 각처에 파송하였다. 특히 영국의 위대한 부흥사 요한 웨슬레가 이 모라비아 교파를 통해 구원받은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참조2: 얀 후스(Jan Hus)는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으로 성서를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서방교회 교황 지지자들과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1415년 발표된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7월 6일 화형에 처했다. 하지만 그가 화형당한 이후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보헤미안 공동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의 주장은 마르틴 루터 등 알프스 이북의 종교개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현재에는 18세기 이후에 설립된 모라비아 교회 혹은 체코 개신교라는 명칭으로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다음은 이번 KIM 유럽 비전트립에 참가했던 5명의 간증문이다.
추연실 (웨일즈 셀레브레이션 모바일팀)
영국 웨일스 클라네클리에서 새벽 5시에 이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차를 타고, 페리를 타고,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 여정을 시작하는 첫날 기도했던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이번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듣기를 원하고, 기도하며 나아갔다. KIM을 독일 베를린에서 만나면서, 그날 묵상 말씀(행15:39)을 읽다가 처음 만나는 이 두 팀 가운데 연합이 있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게 되었는데, 정말 즐겁고 기쁜 여정이 되게 하셨다. 이렇게 시작된 여정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기도에 대해서 알려주시기 원하셨다는 마음이 든다.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오스카 쉰들러 박물관을 둘러보며, 유대인들이 거주하던 게토에서 매일 기도하던 모임이 있었던 사진과 설명을 보게 되었다. 또 눈물의 샘을 방문해서는 기도를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눈물의 샘도 기도를 통해서 씨앗이 심어지고, “Pay back”을 하나님께서 작가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이 생명이었던 것이 놀라웠다. 그래서 나도 기도의 씨앗을 심고, 그것이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에 생명을 나누는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주일날 설교 말씀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께 듣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더욱 커지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을 찾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독일 베를린에서는 화해의 교회를 방문하며, 교회가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되었을 때 큰 역할을 했던 것을 보면서, 나의 기도와 예배가 그렇게 사용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시간을 지나오면서, 사람들의 삶의 모양은 다 다르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았고, 헌신한 사람들을 보았다. 하나님께 자신과 자신이 가진 것들을 드린 삶을 보았다. 그래서 이 여정이 끝나고 돌아오는 동안 내 안에 작은 촛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보게 해주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작고 작은 내 안에서 열정으로 타오르고 계신다. 유대인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 시대를 위해서 생명을 나누는 기도를 하기 원하는 마음과 나 자신과 내가 가진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삶을 배웠다. 정말 귀한 여정이었고,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와 기쁨이 가득한 여정이었다. 2023년 7월, 10일간의 이 여정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를 드린다.!
빅유정 (웨일즈 셀레브레이션 모바일팀)
안녕하세요! KIM팀과 유럽비젼트립을 함께 한 박유정입니다. 저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마음에 품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럽비젼트립을 가기 전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마음을 열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제 마음속에 들어오고 나서 세상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방인인 제가 사도행전 15장을 묵상하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방인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느꼈기에 이방인으로서 유대인들이 학대와 학살을 당했던 땅을 밟으며 위로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그들을 제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었고 ‘내가 향기롭게 받을 수 있는 제단을 쌓고 오라’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아픔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향기롭게 받으시는 제단을 쌓으며 그들을 위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유럽비젼트립을 갔습니다.
쉰들러 박물관, 비르케나우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돌아다니며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이곳에서 유대인들의 삶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제단을 쌓으려고 했지만 쌓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제단을 쌓기엔 유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구나.’ 그들의 고통조차 헤아릴 수 없는 저를 보며 먼저 유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 많이 품어야겠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수용소가 보이는 곳에 세워진 기도의 집에서 기도하고 찬양을 부르며 ‘이곳이 바로 내가 마음 받고 온 제단’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제단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향기롭게 받으시는,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제단이 세워져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비젼트립을 하는 내내 끝없이 펼쳐진 밀과 보리밭을 보았습니다. 독일과 폴란드, 체코의 땅에 영적인 어둠이 있지만 끝없이 펼쳐진 밀과 보리밭을 보며 그래도 그 땅에 생명이 심겨 있음을 느낍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더 사랑으로 품으며 제단을 쌓고, 그 땅에 심겨 있는 생명의 밀과 보리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를 지내야겠다는 마음을 받고 이번 유럽 비젼트립을 마무리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최규리 (KIM) 사랑의 교회
이번 비전트립을 통해 유대인 선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동안 홀로코스트를 통해 유대인들이 겪었던 고난, 핍박과 아픔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유대인으로 오셨는데 유대인들이 현재까지도 안티세미티즘으로 고통받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주 안타깝습니다. 요한복음 15:20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 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도 살아생전에 많은 핍박과 고통을 받았지만, 그에게 divine calling이 있었던 것처럼 홀로코스트를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인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고, 예수님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세야 4:6 말씀처럼-“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틴 루터의 사상을 인용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분별력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뺏긴 물품들, 그들의 머리카락과 그들이 썼던 침대 등을 보면서 인간의 잔혹함에 놀랐지만, 히틀러의 죄가 우리의 죄라고 이향숙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죄는 wild fire같이 퍼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라비안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헤른후트 지역에 가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메시지를 실천하면서 겸손하게 살았던 모라비안들의 흔적들을 보면서 새로운 도전을 받은 것 같아 좋았습니다.
KIM 팀과 웨일즈팀 다들 수고 많으셨고 안전하게 여행을 마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정상길(KIM) 은혜샘물교회
유럽 비전트립을 은혜 가운데 즐겁고 행복하게 다녀오게 하신 하나님과 웨일즈CMT (Celebration Mobile Team), KIM 팀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유럽 비전트립이 있다는 소식을, 아내를 통해 들었을 때, 초등 5학년 딸을 위해 예비된 여행이라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아내에게 신청하라고 권유했었습니다. 작년 학교에서 관계의 어려움을 당해 10월부터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어야 했던 딸을 위해, 급하게 이사를 하고 전학까지 하였지만, 새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딸에게 필요한 여행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재정과 휴가 기간 때문에 비전트립을 갈 수 있을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제가 마지막 멤버로 신청하고 비행기 티켓 구매를 한 과정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한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길은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따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출발하는 날이 다가올수록, 못갈 이유가 하나씩 발생했기에, 출발하는 날까지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형의 회사가 갑자기 파산 위기를 맞았고, 회사에서 4년 동안 개발했던 일을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이 문제들은 제가 해결할 수 없음에 동의가 되었고,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께 문제들을 올려드렸을 때, 비전트립을 갈 힘이 생겼었습니다.
이번 비전트립중 받은 마음 혹은 감동을 각 도시와 상황에 따라 몇 가지 정리를 하고자 합니다.
먼저, 유대인 학살이 있었던 오쉬비엥침의 (비르케나우,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기도의 집 방문을 통해, 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유대인을 위로하시길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00년 이상 이어져 온 유대인을 향한 증오,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경험한 역사 속의 유대인들을 위로하고, 유대인을 학살하려 했던 사람들을 대신하여 유대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위로가 유대인들을 만질 수 있도록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쉬비엥침에서의 시간을 통해 유대인 복음화를 향해 마음이 열리고, 유대인을 위해 기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으로 최초의 현대 기독교 선교단이었던 모라비안과 진젠도르프 백작의 마을인 헤른후트 방문을 통해,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일들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기독교 박해를 피해 체코에서 피난 왔던 모라비안 교도들은 진젠도르프 백작의 도움으로 헤른후트에 정착했으나, 피난민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 등으로 내부 갈등과 갈라짐을 겪어야 했던 모라비안들이 한 교회에서의 기도회를 통해, 성령이 임하심을 경험하고 선교를 위해 한 가정당 한 사람의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겪는 일상의 관계 문제, 경제적 문제를 주님 앞에 가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문제를 해결하심은 물론이고 전도와 선교의 일까지 감당케 하시는 실제를 보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귀국할 때의 일을 말하고자 합니다. 귀국 비행기에서 제 옆에 2살 남자아이가 앉게 되었습니다. 비행기 이륙을 대기하는 동안 남자아이는 앉기, 서기, 앞의 모니터 리모컨 당기기 등을 하였고, 아이 엄마는 아이를 계속 말리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몸이 피곤한 가운데, 저의 마음에서 갑자기 판단과 짜증이 올라오는 순간, 비전 트립 기간 동안 웨일스 팀의 섬김과 목사님께서 문제 앞에서 찬양한다는 말, 그리고 하늘 문을 여는 찬양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던 것들이 마음을 오고 가면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찬양하겠다는 결정을 하고, 이 상황을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비행기는 이륙하였고, 한 시간 정도 흘렀을 때였습니다. 부산하게 움직이던 아이라 갑자기 잠을 자기 시작하였고, 10시간 이상 흘러 한국에 도착할 때쯤 되었을 때, 잠에서 깨어나서 순한 양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다시 한번 현실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매일 누군가 보여준 사랑과 헌신으로, 주님의 은혜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한 주님의 은혜, 사람들의 헌신을 이번 비전트립을 통해 경험하게 하신 주님과 한 팀으로 서로 섬겨준 팀원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임미해 (KIM) 메시아닉 싱어
아~ 아우슈비츠(오쉬비엥침)를 방문하는 것은 가기 전부터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일이었다. 그곳을 방문한다는 것은 너무나 비참하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학살당해야 했던 그 현장을 모르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언가 양심에 걸려 가보기는 가봐야 하는데 너무나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구석에 있었다. 그러나 마치 긴 시간 동안 해야 할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출발했다.
떠나기 전부터 무거운 마음이었는데 폴란드 쉰들러 박물관에서 독일인 쉰들러가 살려낸 많은 유대인의 사진을 보며, 박물관 안내인이 자랑스럽게 쉰들러가 살려낸 사람 중 아이작 펄만(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과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이름을 말하면서 자기가 쉰들러인 양 기뻐하며 자부심이 넘치는 모습에 ‘나도 쉰들러가 될 수 있다면’ 속으로 작은 희망을 품게 되었다.
다음날 방문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는 삼백만 명이 2차 대전 기간 안에 학살당했고 폴란드에서만 6개의 이런 수용소가 있으며 모두 육백만 명이 학살되었는데 그들의 학살 방법은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여 글에 올리고 싶지 않은 정도이며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사람이 아니라 모두 악마의 탈을 쓰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잔혹한 현장을 매일 보며 끔찍한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폴란드 가이드가 안쓰러워 보이며 참 쉽지 않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우리는 기도의 집과 눈물의 샘 조각 전시관을 방문했다. 나는 계속 답답한 마음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다행히 아우슈비츠 옆에 영국인이 세운 기도의 집에서는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이 있었고, 눈물의 샘 조각 전시관은 홀로코스트의 시간에 하나님은 왜 유대인들을 내버려 두셨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있었다.
결코 그들은 홀로 있지 않았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이 그들의 고통과 함께하셨고 결국 예수님은 유대인과 함께 모든 고난의 잔을 다 마셔버린 모습의 조각이 마지막 작품이었다. 작가의 조각 설명을 통해 마음의 무거운 짐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들이 가진 짐을 그분께 올려 드리기만 한다면 정말 자유로울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나는 그곳을 나오긴 전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Now I know it all!”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우리는 그 아우슈비츠 현장을 떠날 수 있었다.
다음 여정인 체코 프라하에서 유대인의 흔적을 찾고자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발견하지 못하고 로마 가톨릭과 루터교의 형식적인 틀을 벗고 성령님의 뜻대로 예배하고자 했던 얀 후스의 흔적을 찾아갔다. 그는 루터교에서 조차도 가톨릭 정통 미사 모습을 비교적 따랐던 것에서 벗어나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였으나 결국 화형을 당하였다.
얀 후스를 따르던 모라비안 후예들은 핍박을 피하여 진젠도르프 백작에게로 삶의 터전을 옮겼는데 지금의 독일 헤른후트 지역이었다.
우리는 헤른후트에 있는 예수스 하우스에서 머물며 모라비안 성도들의 무덤들이 있던 매장지를 돌아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선교에 열정적이었는지를 듣게 되었다. 그들은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전 세계로 흩어져 선교하였으며 더욱 놀랐던 것은 그들이 그린란드까지 복음을 전파하러 갔다니 거의 땅끝까지 간 것이다. 그 옛날 교통수단도 만만치 않았을 때 그 추운 곳에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지 그 고통을 누가 알았을까 오직 하나님만이 알았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진젠도르프도 그곳의 영주였지만 10여 년에서 쫓겨나서도 신앙의 열심을 가지며 모라비안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시들어진 것 같아 마음이 안타까워 그 땅을 위해 진심으로 중보기도를 하고 모라비안 형제 교회를 방문하였다. 그 교회도 핍박으로 건물이 반으로 나뉘어서 예배를 마당에서 드리던 사진도 있었다. 그 교회에는 현재 100여 명의 성도가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마을이 작아서 꽤 많은 성도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특이했던 것은 그 작은 마을에 각 나라 선교사가 요즘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선교사들이 다시 복음의 원 고장인 그곳에서 다시 예배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수스 하우스에는 놀랍게도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위한 기도와 예배가 끊이지 않고 특히 북한을 위해 대표가 잠시 한국으로 가셨다고 하니 유대인 선교와 북한선교는 맞물려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동독과 서독을 갈라놓았던 장벽과 동독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탈출하다가 죽은 모습의 사진들과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히틀러를 따라 유대인들을 죽게 내버려 둔 독일도 공산혁명으로 인해 아픔의 세월을 겪게 되었다. 이제는 통일이 되어 어둡고 힘들었던 시간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특히 독일이나 체코에는 홀로코스트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살던 곳에는 바닥에 네모난 구리 형태로 그 이름들을 새겨둔 것들이 있었는데 이 표시는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반성도 하고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유대인들이 얼마나 깊은 고통에 있었으며 여전히 그들을 이 세상에서 말살하려는 사탄의 세력은 존재하고 있고 사탄은 유대인들을 말살해야 이 세상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에 히틀러 이상의 전 민족을 동원해 이제 안티세미티즘을 더욱 확장해 나갈 것이다.
유대인이 살아야 우리가 살 수 있다. 원가지인 그들이 사라진다면 곁가지인 우리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유대인을 위한 중보와 보호가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