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元代之間의 기독교 발전사(907-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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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기독교=김규동 박사] 唐·元代之間의 기독교 발전사(907-1279) »
History of Gyeonggyo Bridge between the Tang and Yuan Dynasties
당말기, 경교가 순식간에 중원에서 소멸된듯 했으나 뜻밖에 북부 닝샤(寧夏)에서 기사회생하여 원대(1279-1368)까지 절정에 맞았다는 사실은 그동안 학계가 궁금했던 부분이다. 후일 닝샤에서의 경교는 중원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경교 주교구 중 하나로 중국 경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닝샤에서 경교의 발전과정은 중국 경교의 흥망성쇠의 축소판일 뿐만 아니라 당·원(唐元) 양대 중앙정부의 대외정책, 민족정책, 종교정책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키워드가 되었다. 본 논고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 닝샤 주요 지역에서의 경교 발전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_김규동 박사
당 말기 황소의 난(黃巢之亂)에 의해 치명적 타격을 받은 경교는 그 후, 원나라 말기까지 근 370여 년간의 종적에 관한 사료가 그다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저자는 원대 말기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경교의 행적에 관해 빈약한 자료를 근거로 당· 원시기 경교의 중간사(907-1279)로 여길 수 있는 기독교 동전사를 서술하려 한다. 관련 연구는 주로 서하사논고(西夏史論稿)에 언급된 고대 이슬람과 티벳불교의 발전역사에서 단초를 발견했기에 가능했다. 일부 학자는 이를 근거하여, 원대 초기부 터 서하 말기까지 서하에 景敎가 유행했다고 주장했다. 이범문(李范文)도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 근거해 서하지역에 “景敎 신도가 존재했다”고 했다. 또한, 저자가 2018년 출간한 “장안의 봄(기독교동전사)” 제16장에 비슷한 내용을 기술한 바 있다.
당대 景教의 거점도시 닝샤(寧夏): 영주(靈州)
唐代 초기, 중앙정부는 타문화에 대한 유화·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 동시에 관대함까지 보여줬다. 시리아에서 유래한 경교는 페르시아를 거쳐 635년 중국 장안에 입성한 후 동방교회 선교사들의 열심과 당나라 통치자의 호의에 의해 급속히 전해 졌다. 고종(650-683) 때 경교는 가장 큰 부흥기를 맞아, “말씀이 전국에 전파되었고 국가는 부유하며 백성은 선미해졌고 예배당이 수많은 성읍에 넘쳐났고, 가가호호 큰 복이 임했다”고 했다.
정관(貞觀) 원년(627) 태종은 전국을 關內、河南、河東、河北、山南、隴右、準南、江南、劍南、嶺南 등 10도(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당시 靈州는 관내(關內)에서 핵심지역에 속할 정도로 실크로드에서는 아주 중요한 도시였다. 경교가 처음 중원에 전래되었을 때, 경교도는 대부분이 페르시아와 소그드 등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출신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안의 페르시아 출신 경교도 이소(李素) 가족과 소그드 출신 경교도 미계분(米繼芬) 가족도 그 무렵 활약했던 인물들이다.
후일, 중앙정부가 실크로드의 호족(胡族)들을 주로 장안의 북쪽으로 이주토록 유도 함에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첫째는 장안으로 밀려드는 호족들의 수적 증가와 민족 간의 충돌을 방지함이다. 둘째는, 북방민족의 잦은 노략을 막아내기 위한 방책으로 그들을 대거 군사에 등용시켰다. 실제로 그들은 무예와 궁술, 말타기에 뛰어났고 추위에도 잘 견뎠다. 셋째로, 그들의 활발한 무역활동으로 북부지역에 인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활동으로 닝샤 곳곳에서 그리스·로마의 금화가 통화로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일종의 수도방위를 위한 전략적 방어막 역할을 맡게 한 것이다.
낙양에서 출토된 대진경교선원지본(大秦景教宣元至本) 및 당기(幢記) 석당의 기록을 보면 낙양의 경교 신도들은 주로 미국(米國)·강국(康國)·안국(安國) 등지에서 온 소그드 이민자들로 주를 이루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靈州와 인접한 原州에도 소그드인 집단 주거지가 있었고, 영주도독부(靈州都督府) 산하 육호주(六胡州)에도 수많은 소그드인이 정착했기에, 지금도 그곳에서는 당시 경교도들이 주로 사용했던 전형적인 페르시아 양식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뒤이어 당고종 때 전국 각지에서 경교의 활발한 포교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중국 경교의 주교구가 靈州에 세워지기도 했다. 숙종(肅宗) 때 이르러 영무(靈武) 등 5군(五郡)에 경사(景寺)를 중건토록 허락되기도 하였다.
경교교칙에 의해 靈州에 새로 건립된 경교사(景敎寺)의 첫 주교는 알로펜(Alopen) 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주교당은 1~2명의 사제가 주령(主領)하였고, 목사 밑에 집사 등 조력자가 있었다. 무주(武周) 성력(聖歷, 698-699) 연간과 예종(睿宗) 선천 (先天, 713) 말년, 경교는 불교와 도교의 공격을 받아 두 차례의 반경교 정세 속에 일부 교회가 폐쇄되기도 하였다. 靈州의 예배당도 함께 포함되기도 했다.
현종(玄宗)은 천보(天寶) 원년(742) 靈州를 영무군(靈武郡)으로 지명을 바꾸었다. 안사의 난(安史之亂)이 일어나자 숙종은 영무(靈武)에 즉위하여 안서진(安西鎭)에 군사를 징집하여 반란을 평정하고, “또 서역 각국에 징병 조서를 내려 응하는 자에게 그 댓가로 큰 상을 약속했으며 안서의 병사들을 따라 함께 지원군에 참여토록 하였다.”
장씽량(張星烺)의 고증에 따르면, 영무 경교교당 재건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경교 사제인 이사(伊斯)는 당시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징집 작전 중, 소그드 출신으로 이루어진 자갈군(柘羯軍)을 따라 입화(入華)했다고 한다.
얼마 후, 이사는 숙종의 명에 의해 삭방(朔方) 군영으로 가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전쟁에 참여하였다. 경교비에서 언급하기를 “곽자의(郭子儀) 장군은 처음부터 북쪽 삭방에서 군사를 이끌었고, 이어서 숙종이 ‘이사’를 부사로 임명해 곽자의를 따르도 록 했다. 이에 이사는 한가로이 잠들어 지내지 않았다”고 전해질 정도로 이사의 충성심이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서역전《新唐書・西域傳》에서 이르기를 “건원(乾元: 758-760) 초, 숙종은 반란군을 토벌하려고 서역의 아홉 나라와 함께 병력을 차출토록 숙종이 조서를 내려 토화라(吐火羅)를 삭방의 행영(行營)에 예속시키게 했다”고 한다. 책부원귀《冊府元龜》卷973《外臣部·助國討伐》에서도 말하기를:“건원 원년에 토화라의 엽호 (葉護)와 아홉 나라 수령이 찾아봐서 반란군의 토벌에서 나라를 도와줬고 이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삭방의 행영에 예속시켰다. 이를 통해 삭방 군영에는 토화라 출신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사는 첩보업무 외에도 통역 일을 겸했다. 숙종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 이사와 그 경교 사제단의 뛰어난 공로를 인정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삭방절도부사 (朔方節度副使), 시전중감(試殿中監) 등 높은 관직에 이사를 임명하고, 또한, 자색가사(紫袈裟)를 하사하여, 불교의 공격으로 폐교된 경교 예배당을 영무에 재건토록 명 했다.
숙종이 경교 예배당을 재건한 것은 이사 등 경교도들의 공적을 치하하고 그 들의 충성심에 보답하기 위해 본보기를 보여 서역인을 독려하는 등 여러 방면의 역량을 집중하여 신속하게 반란을 평정케 하는 한편, 이에 이사와 곽자의의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면서 이사 등을 앞세워 곽자의 장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돕도록 했다. 삭방군은 靈州에 본부를 두고, 곽자의는 숙종 즉위 후 하북에서 반란을 평정한 삭방군의 주력을 이끌고 영무근왕(靈武勤王)에 귀사했기 때문에 이사가 직접 영무로 달려와 곽자의 휘하에 봉직했다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다.
그러나 장씽량은 고증 끝에 이사가 숙종이 봉상(鳳翔)에 이를 때 안서(安西), 서역 군을 따라 “먼저 궁정에 몸을 담은 후, 전쟁터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곽자의를 따라 삭방 군영에 가서 힘을 보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사는 영무에 가지 않고 행군 도중 닝샤 남쪽을 거쳐 갔다. 후일 이사는 곽자의를 따라 장안에 정착한 뒤 장안의 준주교가 돼 “매해 오순절 기간마다 네 군데 교당의 사제들과 신도들을 초청하여 극진히 섬겼다.”
당 무종(武宗) 회창(會昌) 3년(843)의 멸불운동으로 경교가 중국 본토에서의 선교활동이 중단되고 교회가 훼파되고 성직자는 추방되었다. 영주지역의 경교 조직도 화를 면치 못했지만 경교는 “방기화(方伎化)”를 통해 경교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은밀 하게 간직하고 비밀리에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북송 초만해도 영주에 경교도가 눈에 띄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당시 경교도들의 도피생활에 도움을 준 이들은 다름아닌 도교인들이었다. 도교는 당대 경교도들을 통해 서양의학을 접목시키는 등 둘 사이에 민간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돈황유서(敦煌遺書) P.4071 성명서(星命書)에는 ‘개보(開寶) 7년 12월 11일 영주도독부(靈州都督府) 백의술사(白衣術士) 캉쥔(康遵)’이라는 서명이 있다.
강백근(姜伯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영주의 소그드인 康遵은 페르시아의 점성술을 전해주러 왔다. 이 내용만 보더라도 닝샤 일대는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 중국 교구의 초대 주교였던 알로펜은 페르시아에서부터 먼길을 왔다. 또한, 경교도들 중에는 대체적으로 천문학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주로 의학과 더불어 다양한 학문에 정통했다. 페르시아의 경교도인 이소(李素)는 사천태(司天臺)에 오랫 동안 근무한 페르시아 천문학자다.
돈황유서(敦煌遺書) P.4071의 康遵을 ‘백의술사’로 지목하기도 했다. 백의(白衣)는 경교의 전통 복식으로, 투루판에서 출토된 시리아의 글에서 유래한 경교 소그드어 문헌인 《洗禮與聖餐儀式評註》에서 “흰옷은 천국의 영광의 증표”라고 밝히고 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살았던 시리아 동방교회의 조오지(George) 주교는 일찍이 “이들이 수세 후 입은 흰옷은 그들이 천국의 광명의 아들이 되었음을 말해준다”고 시사한 바 있다.
따라서, 경교비에는 이사를 칭송하는 ‘오늘 청빈함과 절제하는 경교도 백의경사(白衣景士), 그 사람을 만났다’는 찬사가 실려 있다. 康遵은 영주대도독부(靈州大都督府)에 근무했었던 만큼 일반적인 의미에서 흰옷을 입은 일반적인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라 ‘백의술사(白衣術士)’의 ‘백의(白衣)’는 그 복색을 가리키므로 경교도의 후예 일 것이다. 마니교도 역시 백의 풍습이 있어 이들 중에도 천문학에 능통한 사람도 많았지만, 마니교가 닝샤에 전파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지금까지 닝샤 경내에서 마니교 관련 사료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康遵은 경교도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말했다.
또, 돈황에서 발견된 이 내용은 실크로드 상의 영주가 상당히 번영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회창멸불 이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주(沙州)의 경교도들은 영주 경교도들과 상당한 연관성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西夏의 경교 신앙
서하의 불교는 닝샤의 주류 종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닝샤 경내에는 경교 조직이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사료와 고고학 자료를 보면 서하 경내에 경교도가 소규모로 활동했었다고 언급했다. 심지어 서하에 점성술이 유행됨은 헬라의 천문학적인 요소까지 전래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영주 소그드인 康遵의 점성술은 헬라 천문학에서 유래한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으로 추정된다. 경교는 페르시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시리아에서 처음 유래했기 때문에 헬라-비잔틴 문화에서 의학, 건축학, 천문학 예술 등에 관한 지식을 계승하여 선교에 적극 활용하였다.
1995년 닝샤와 인접한 오르도스(Ordos) 남동부의 한 서하 고분에서 청동장식이 출토되었는데 일종의 나비모양의 특별한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일찍이 러시아의 표트르 코즐로프(Pyotr Kuzmich Kozlov)가 이끄는 탐험대는 흑수성에서 시리아 서체의 경교 필사 잔본 3점을 발굴한 바 있다. 독일 종교학자 한스 요아킴 클림카이트(H-J. Klimkeit)는 이에 따라 기독교가 동·서양으로 전파되면서 돈황과 그 주변에 기독교 전통이 뿌리내리게 된 것으로 탕구트인들이 이 시기쯤 기독교 신앙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돈황과 그 주변에 기독교 전통이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뒤늦게 중국에서는 이러한 필사본을 원대의 유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1983~1984년 내몽골 고고학자가 또다시 흑수성 유적에서 시리아문 경교사본을 발굴했다. 러시아의 테렌티예프 카탄스키(Terentiev-Katansky)도 니나 피굴레브스카야 (N.Pigulevskaya)의 《흑수성과 투루판에서 출토된 시리아 투르크 잔편》를 통해 서하에 경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또, 서하문의 ‘鬼’를 ‘서양의 무당, 혹은 마법사’들을 가르키는 말로 이는 주로 서양에서 건너온 경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학자 로퍼(B. Laufer)는 서하문 ‘polo'(무, 蘿蔔)가 서하에 정착한 경교도들에 의해 퍼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루스 뒤넬(Ruth Dunnell)도 흑수성과 중국 북방의 다른 유적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문헌이 불교적이긴 하지만 12세기와 13세기(심지어 그보다 앞서)의 사료들은 이 지역에 경교와 다른 종교단체들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준 다고 말했다. 1278년경 바르 사우마 마르코스(Bar Sauma Markos)는 유럽으로 가는 도중 닝샤에서 경교도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몇 개의 서양의 기록 외에 중국 측의 역사자료에도 이러한 기록이 있는가? 웅구트(Ougut)와 위구르 경교도의 중심부와 인접한 흑수성(黑水城)에서도 경교도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서하 문헌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종교활동과 조직 형태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위구르가 고창으로 이전한 후, 경교를 신봉하는 위구르인들이 적지 않았다. 서하와 고창(高昌)간의 무역이 성행하자 닝샤를 지나 요(遼)·북송(北宋)·금(金)을 오가는 위구르 상인들도 여전히 줄지 않았다. 서하 흥경부(興慶府)에도 위구르의 사절들과 상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로 인해 조정은 서하 중앙에 회이무(回夷務)를 두어 전문적으로 위구르인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史集(Jami al Tawarikh)에 의하면, 서하 천성(天盛) 5년(1153) “서하 5월, 위구르 사절단이 와서 조정에 헌상했다. 위구르인들은 이주(伊州) 밖에 거주하면서 닝샤의 발전을 보고 방물을 바치기도 했다. 이들 사절과 상인 중에는 경교도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진회우(陳懷宇)도 9~10세기에 시리아문 및 시리아·돌궐어 필사본 이 흑수성에서 발견됨은 5대(五代)와 송대 사이 서하에 경교도들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고창 위구르인 경교도들의 발판이 되었을 거라 주장했다.
위구르 통치 시기(1036-1067) 사주에는 일부 위구르 가정이 경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막고굴(莫高窟) 북구 석굴에서도 송대 유행했던 청동십자가 착용이 확인되었다. 서하가 11세기 70년간 사주의 지배를 공고히 한 뒤에도 현지 위구르 경교도들은 한동안 그들의 신앙을 유지했다. 후일, 마르코 폴로가 13세기 사주를 지날 때 경교도의 거처를 언급하기도 했다.
닝샤 경내에도 위구르인들이 다수 거주했다. 북송 단공(端拱) 2년(989) 때 이곳 위구르 도독(都督) 석인정(石仁政)·머루왕자(麼囉王子)·막봉왕자(邈拏王子)·월황수주순 검(黜黃水州巡檢) 등 네 부족이 나란히 하란산(賀蘭山) 아래에 거주했다. 천성율령 (天盛律令)에는 서하의 수도에 “관리는 내궁·창고 및 기타 곳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위구르사군(回鶻使軍)이 지킬 수 있게 규정돼 있다. 닝샤 경내 위구르인 중에도 경교도가 존재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서하 북부의 몽골 부족 가운데 케레이트(Keraits), 메르키테스(Merkites) 등이 경교를 신봉했으며, 안태산(按台山)에서 야아(也兒)에 이르는 석하(石河) 지역에 있는 나이만(Naiman)도 경교를 믿었다. 요·금은 서하 동부 국경과 가까운 타타르족(Tatar) 밀집 지역에 각장(榷場)을 개설한 바 있으며, 서하는 케레이트와 교역했다.
케레이트의 수령인 옹칸(Ong Khan) 토고릴(Togoril)의 동생 자카감부(Jakha Gambu)의 딸이 서하 황제와 결혼하였다. 그에게는 딸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장녀 이바카(亦必合别吉)는 테무진에게, 차녀 차우르(必克秃忒迷失旭眞)는 주치(Juchi)에게, 다른 한 명은 툴루이(Tului)에게 시집을 갔는데 독실한 景敎徒였던 그녀가 바로 그 유명한 소르칵타니(Sorkaktani)로 네 명의 칸을 낳은 여인이다. 그리고 또 한명은 서하 황제와 결혼하였다. 史集에는 경교도인 서하 황제의 케레이트의 비자(妃子) 에 대해 말하기를 “이 딸은 매우 아름다웠고 단정했다. 칭기즈칸이 탕구트를 점령 했을 시에 국왕을 죽이고 나서 그 딸을 수소문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흑수성에서 출토된 서하문의 『宮廷詩集』의 제15수 「聖威平夷歌」에도 자카감부의 딸이 서하 황실로 시집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케레이트의 수령은 옹칸(王罕)의 숙부인 구르칸(Gur Khan)과 옹칸의 아들 생쿰(Sengüm) 등이 서하로 망명했다. 이들 역시도 경교도들이다.
페르시아 역사학자 라쉬드 알딘(Rashid al-Din)의 史集에 의하면, “어린 시절 탕구트에 사로잡혀 오래도록 그 나라에 살았고, 탕구트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마침내 자카감부(札阿紺孛)의 칭호를 받았다.” 페르시아의 라슈트(Rasht)는 “‘자카(札阿)는 지역(wilayat)이란 뜻이며, ‘감부(紺孛)’는 대이밀(大異密)이란 뜻으로, 즉 ‘일지역의 대이밀’을 뜻한다.” 천칭잉(陳慶英)은 이 이름을 티벳어인 ‘spyant-snga-rgan-po’라는 뜻의 “늘 눈앞 에 있는 노인을 뜻한다.”라고 불렀다.
케레이트 부족의 내전에서도 칭기즈칸의 아버지 걸안부(乞顏部) 수령 예수가이 (yisügei)는 “자신의 병사들이 구르칸(Gur Khan)을 서하로 쫓아낸 후 빼앗긴 부족을 되찾아 옹칸에게 되돌려보냈다. 그러나 남은 20~30만명이 하서로 도망쳐 돌아오지 않았다. 하서가 곧 서하인 것을 보니, 구르칸이 만년을 서하에서 보낸 것 같다. 옹칸은 구르칸을 꺾은 뒤 동생 예리가하치(也力可哈刺)와 함께 나이만(Naiman) 연합 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하서, 위구르, 회회(回回) 삼국을 거쳐 거란(契丹)으로 피신 했다. 이때 닝샤 숭종(崇宗) 인효(仁孝)는 “군량미를 보태주어 위구르에서 거란으로 떠날 수 있게 하였다.
서하 건우(乾祐) 5년(1174) “겨울 10월, 케레이트 옹칸은 거란(契丹)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하서로 가서 크게 약탈했다.” 그리고, 인효의 파견병에 의해 격추되었다. 몽골황금사(蒙古黃金史)에도 나중에 구르칸과 사이가 나빠져 위구르 지방을 거쳐 탕구트인의 성으로 피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하들이 모반을 꾀하며 떠나려 하자 옹칸은 부하들을 꾸짖으며 “내 일생동안 서하에 살며 궁핍한 중에도 서로 간에 맹세한 말을 잊었느냐?”고 말했다. 옹칸이 칭기즈칸에게 패해 죽어 나이만으로 가게 되자, 그 아들은 “哈刺 역시 서하로 갔지만, 자신의 가진 모든걸 빼앗겼다”고 말했다.
刺哈가 바로 생쿰이다. 그는 일찍이 서하 건우(乾祐) 5년 동안 서하의 경계선을 침범했다가 서하군에게 격퇴당했다. 서하가 멸망하기 직전, 하 헌종(獻宗) 덕왕(德旺) 은 나이만 수령 굴율칸(屈律罕)의 아들 적랍갈상곤(赤臘喝翔昆)을 받아들였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德旺이 그 원수를 받아줌으로 양식더미가 더해졌다.” 이것이 훗날 칭기즈칸이 서하를 멸망시키는 큰 정치적 빌미를 제공했다.
원대 寧夏府路 경교의 흥왕
원나라 정부가 닝샤 북부에 설치한 행정구역 중흥로(中興路)는, 이후 닝샤로(寧夏路)로 바뀌어 닝샤로 총괄부(지금의 銀川)가 치리했다. 원나라의 통일로 동·서무역이 더욱 원활해지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경교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대거 유입 되면서 닝샤의 경교 선교조직은 다시 회복되었고 경교는 닝샤에서 큰 번영을 누렸다. 13세기 중엽 경교 주교 분포도에서 탕구트는 모두 주교 분포지역 중 하나였다. 실제로 경교는 칸발리크(Kan Balik, 大都)와 탕구트에 각각 대주교구를 두고 있었으며, 1281년 마르 예수사브란(Mar Jesusabran)이 탕구트 대주교로 부임하였다.
경교 교계제도에 따르면 대주교구(Metropolitan) 아래 6~12명의 주교가 있어야 하며, 주교 아래에는 향촌 주교, 순시사(巡視使, 순회주교), 집사장, 사제, 부집사, 양례원(襄禮員) 등이 있었다. 경교교회에서 숭고한 지위를 인정받은 탕구트 대주교는 1281년 2월 24일 경교 총대주교(Patriarch)인 마르 덴하(Mar Denha)가 죽자 바그다드에서 후임 대주교가 선출되고 탕구트 대주교가 선거에 참여해 2위를 차지했다. 탕구트 대주교는 페르시아의 아르니(Ani) 주교와 함께 웅구트 출신의 총주교 마르 야흐발라하 3세(Mar Yahbh-AllahaⅢ)와 그의 스승 순회감독(Visitor-General) 랍반 사우마(Rabban Ṣawma)를 무너뜨릴 음모를 세우기도 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일칸국(Il khanate) 지배층의 내전에서 “마르 야르발라하 3세 총주교는 그의 적수인 탕구트 대주교 등에 의해 혐의를 받고 있다”며 “마르 야르발라하의 아들 아르군 칸(Arghun)의 요구를 지지하고 쿠빌라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흐마드 파나카티(Ahmad Fanākatī)를 책망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계산림은 ” 웅구트의 서쪽 이웃인 탕구트와 위구르의 경교도들은 경교의 내용·성격이 서로 달라 동아시아(중국의 화북·화동·화남) 계통의 경교와 대립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경교의 조직적 완전성과 교리의 통일성 때문에 그런 대립은 없었던 것 같고 다만 정치적 입장 차이로 인함이지 않았을까 본다.
원대 닝샤의 경교도들은 직접 교회를 세웠었고,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Ariqaya(額里哈牙, 銀川)을 지날 때 “우상을 섬기는 주민들이 대부분인데 그곳에 네스토리안의 기독교 교회당이 세 곳이나 있었다고 했다. 외국 귀족들도 닝샤 경교 예배당에 대해 말하기를, 아르메니아 왕의 친서 중에, ”탕구트인들 대부분이 기독교를 많이 믿었다“고 하며 친히 예배당을 방문하여 정황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닝샤 경교도들은 교회를 에워싸고 자신들의 종교 단체를 형성해 획일적으로 행동했 다고 한다.
경교교사 랍반 사우마(Rabban Sawma)와 랍반 마르코(Markus)가 1275년경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날 때 中興(銀川)을 지나며 닝샤 경교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 성읍 백성들은 사우마와 마르코가 그곳을 지날 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을 배웅하러 갔다고 들었고, 생각건대 탕구트 사람들은 열정적인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순수하였다. 이들은 두 순례자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었고 두 사 람의 축복을 받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은 그들을 멀리까지 배웅하며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여 세웠으니 너희는 그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섬기라’며 흐느꼈다. 하나님 께서 너희와 함께하시리! 아멘.”
원나라 정부는 경교도들을 ‘에르케운'(Arkagun)이라고 불렀다. 닝샤의 중흥로(中興路)의 장교사(掌教司)는 경교도를 관리했으나, 후일 각 구역의 장교사가 파직되자, 전국에 분포한 경교도들은 숭복사(崇福司)에 의해 관리되었다. 닝샤 경교도들은 전국의 다른 각지의 경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조세 면책특권을 누렸지만, 관청의 엄격한 관리도 받았다.
《元史·世祖紀》에는 “지원(至元) 19년 10월부터, 하서의 불교, 도교, 에르케운교도 중에 아내와 집이 있는 자는 일반인과 동일하게 세금을 내도록 명한다.”라고 쓰여 있다. 《大元馬政記》에는 대덕(大德) 3년(1299) 2월, 추밀원(樞密院)이 “하서에는 말을 관리할 곳이 없어, 스님·도사·에르케운·이슬람의 말은 모두 단속하여, 관례에 따라 값을 매겼다.”고 아뢰었다.
원대 닝샤 경교도의 절대다수는 소수민족으로 주로 위구르인, 케레이트인, 웅구트인, 그리고 일부 서역에서부터 동진해 온 경교를 신봉하는 민족이다. 밍가나(A. Mingana)는 탕구트 교민 내에 상당수의 투르크인과 몽골인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고 기록했다.
클림 케이트(H.-J. Llimkeit)도 언급하기를 “원대에 탕구트인과 투르크의 웅구트인들 사이에 경교도인이 많았다.” 칭기즈칸의 서하 공멸전투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참전 했던 고창의 위구르에도 경교도들이 상당히 있었다. 원나라가 전국을 통일하자 수많은 위구르인들이 하서의 경계인 닝샤 둔전(屯田)으로 모여들었다.” 케레이트는 서하와의 전쟁에 참여했고, 케레이트의 槊直腯魯華(Jöchin Darughachi)는 “그 부하 200명을 태조로부터 징발하여 나이만과 서하에서 공을 세웠다.”고 했다.
웅구트의 수령 不顏昔班은 일찍이 군대를 이끌고 서하를 정복했음을 당차게 말했다고 했다. 원나라로 온 이후 닝샤 경내에 백타타르(白達達)와 수많은 둔전인이 있었다. 또한, 그들 가운데 킵챠크(Kipchak)·강리(康里) 사람들 등은 대부분 경교를 신봉했다.
《元史·本紀第二十七》에서 이르기를: “닝샤 흠찰 불교관련 내용에 이르기를 사찰 수리비용에 212만원을 들였다.” 《元史·文宗本紀》에는 “또 에르케운에 소르칵타니 황후의 기념 전당을 세우도록” 했다. 이 두 곳의 ‘불사(佛事)’는 모두 경교 기도처로 이해하면 된다. 원초에는 개성로(開城路, 지금의 固原고원)에 안서왕부(安西王府)를 지었는데, 안서왕이 관할하는 군대 즉 킵챠크인(Kipchak)이 영토를 통솔했다. 《元朝名臣事略》卷3《樞密句容武毅王傳》에서 말하기를 : “흠찰의 각지에 거주하는 제왕의 부하들에게, 공통으로 명을 내렸다.”
또, 임매촌(林梅村)의 고증에 따르면 원대 닝샤의 경교도 중에는 투르크계의 후예도 있었다고 한다. 원말-명초 닝샤는 홍건군(紅巾軍)과 원군(元軍), 명군(明軍)과 원군전(元軍廛)의 싸움터가 되었고, 명나라 정부는 영무(靈武)·명사(鳴沙)·영하로 등의 백성들을 관중(關中)으로 이동시켜 영하 북부에 무인지대를 설치하였다. 홍무(洪武) 9년(1376), 명정(明廷)은 또 ‘徙五方之人實之’로 전국 각지의 인구를 닝샤로 이주시켰다. 인구 이동과 대대적인 쇄신과 함께 닝샤에서의 경교 전파는 다시 중단되고 쇠망하게 되었다.
결론
당대 지금의 닝샤 북쪽 영주와 장안·낙양이 경교 중국 주교구의 3대 선교기지로 꼽힐 정도로 위상이 각별했다. 서하시기, 닝샤에서 경교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더뎠으 나, 닝샤 지역 경교도들의 개별 활동은 원대 탕구트 대주교구 형성의 안정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원대에 들어 닝샤를 중심으로 한 서북의 선교구는 일약 탕구트 대주교구가 되었고, 대도(大都)가 위치한 한팔리(汗八里) 대주교구와 안정적인 체계를 이루었다. 닝샤에서의 경교의 발전과정을 종합하면, 닝샤에서의 지속적인 전파와 발전으로 닝샤는 중원문화에서 비잔틴의 헬라문화, 페르시아 문화와의 중요한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고, 문화 수용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당·원 양대의 중앙집권적 정치국면과 신앙의 자유를 주창하는 종교정책은 경교가 닝샤에 전파될 수 있는 좋은 정치적 환경을 제공하였다. 닝샤는 역대 다민족이 모여 사는 사회적 분위기는 경교의 지역 생존과 발전에 적합하였다. 경교의 닝샤에서의 쇠망은 경교가 원나라 지배층에만 의존해 주로 색목인(色目人) 신도가 많음으로 인해, 원나라 통치자의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후일 명나라 통치자의 입장에서 경교는 종교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강력한 사회 세력으로, 북으로 퇴각한 북원 (北元)에 의해 복위될 가능성이 크고 잠재적 위험의 소지가 있어 통치에 불리하며, 또한 명나라 통치자의 이학(理學)을 핵심으로 하는 가치관과 맞지 않아 일지감치 이를 단속하였다. 자체적으로는 원대 경교는 토착화 추세를 보이지 않았고, 다만 현존하는 원대 경교문헌은 시리아어와 투르크어, 세례를 받은 대부분이 색목인들이었다.
원대의 이슬람교는 닝샤의 발전에 많은 색목인들이 결집하여 원말과 명초에 이르러 점차 회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 닝샤 경교는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약하여 명초 정부의 동화정책으로 경교도들이 한족에 많이 융화되면서 점차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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