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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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강석진 목사]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5 »
알렌 선교사의 큰 한국교회사 기여, ‘민영익을 외과 수술로 살려냄’…
알렌의 이같은 조선의 근대문명화와 외교에 미친 영향은 조선이 그 당시에 필요로 한 시대적 요청에 충실함으로 그 결실을 조선인들은 누리게 되었다. 알렌 선교사의 빼어 놓을 수 없는 한국교회사의 기여는 그가 갑신정변 시기에 고종과 민비에 오른팔 역할을 해온 민영익을 외과 수술로 살려냄으로 그에 대한 신뢰는 공적 관계에서 사적인 친밀한 관계로 이어져 사실상 고종의 자문관이 되었으며, 그의 영향력은 공의 이상이었다. 즉 그의 제언이면 거의 무엇이든 수용되었으며 그로 인해 제중원이 세워진 후 여기에 필요한 선교사들과 그 외에 교육과 의료 등에 헌실할 선교사들의 입국과 저들의 사역에 협조했으며, 심지어는 법으로 금기시했던 선교 활동까지도 묵인해 줌으로 선교사들은 전도 사역과 교회(정동교회, 새문안교회 등)를 곳곳에 세울 수 있었다. …
19세기에 접어든 동양은 서양문명의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인하여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던 중화주의가 영국과의 두 차례의 아편전쟁(1841, 1856)으로 무참히 참패하여 홍콩과 남경 등의 연안 지역을 내주면서 봉건의 청나라는 퇴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시대적 위기를 근대화의 기회로 만들었다. 일본은 미국의 군함 흑선의 위협에 1854년에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1858년에 5개의 항을 내주면서 서서히 에도의 무신 막부정권(幕府政權,1603~1868))은 무너지고 명치의 유신정책으로 서구 문명화로 급진전되었다. 이런 근대문명화에 큰 기여를 한 무리들이 선교사들이었다. 1859년 11월에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인 베르벡(Verbeck), 부라운(Brown), 시몬(Simon) 등 6명이 최초로 입국하여 이들이 종사한 사역이 바로 서구 문명화 교육이었다. 초기에는 제한된 개항 도시에서 거주하면서 하급 사무라이들과 접촉했다.
그 당시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사무라이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자, 저들은 급변된 상황에 자구책으로 새로운 서양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선교사들의 집에 몰려들었다. 이들은 손에 칼을 내려놓고 책을 잡고 서양의 지식으로 무장함으로 지식의 무사들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변혁 중에 베르벡 선교사 등은 막부정권을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이토히로부미, 사이고 다카모리, 가쓰 가이스,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수십 명의 근대문명을 일으키는 지식인들을 배출해 내었다. 이들이 일본의 근대문명화의 주역이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조선도 1871년 미국과의 무력 충돌인 신미양요라는 군사적 격변을 겪었지만 오히려 조선은 더욱 쇄국정책의 문을 더욱 견고히 잠가버렸다. 그러나 그후 11년 후에 청의 리홍장의 중계로 미국과 평화로운 수순을 밝아 조미수교를 1882년 5월 22일에 맺음으로 여명의 개방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에 대한 첫 결실이 1883년 9월에 미국에 도착한 조선의 보빙사절단과 첫 대화를 한 미국의 볼티모아 학장인 가우쳐 박사가 이들과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도록 미 감리교 선교회를 설득하였다.
이에 일본에서 사역 중에 있는 맥클레이를 통해 조선에 사역을 할 수 있는 지를 알아보게 함으로 그가 1884년 6월에 조선을 방문하여 김옥균을 만나 조선에 근대식 학교와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협조를 구하여 마침내 고종이 이를 윤허함으로 학교와 병원을 세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에 첫 번째로 파송된 인물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로서 조선에 첫 발을 내딛어 배제학당과 경신학당(연세학당)을 세우게 되었고 수개월 후에 스크렌턴 모자가 입경하여 모친은 이화여학당과 아들은 병원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경하여 조선의 근대문명화의 첫 개척자가 된 인물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보다 약 7개월 앞선 1884년 9월 미국의 공사관에 공의로 들어 온 호레이스 뉴톤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04~1932.12.11)이었다.
그는 조선 최초의 서양 의료인이자, 의료선교사였고, 그후 주미공사의 외교관이었으며 그후 조선주재 대리공사로 그 당시 격변의 조선에 의료와 사회와 외교와 교육과 근대 문물화에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조선 근대사의 효시이자 설계자였고 기획 연출자로서 20여 년 동안(1884~1905) 자신의 모든 역량을 조선을 위해 쏟아부었다. 이는 조선의 근대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의 조선을 위한 근대문명화 사역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884.9.20 : 중국 상해를 출발하여 제물포에 입국한 최초의 선교사로 주미공사관의 공의로 시작하여 한성 주재 영국, 중국, 일본의 공관의로 사역함.
-1884.12.4 : 조선 최초의 우정국 낙성식 때에 정변을 일으킨 세력에 의해 테러를 당한 민영익을 최초의 서양 의료 수술을 통해 2개월 만에 살려냄.
-1885.2.15 : 민영익을 살려낸 것에 대해 고종이 알렌에게 10만냥을 하사함.
-1885.4.10 : 10만냥 하사금으로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여 최초의 서양식 병원을 개원하여 모든 계층을 치료함.
-1885.4.5 : 언더우드 선교사가 광혜원의 의료원 교사로 입경하여 사역을 함.
-1885.8 : 최초 여성병원을 위한 여성 의료인(기녀) 선발과 교육.
-1887.6 : 고종은 알렌을 주미조선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임명함.
-1890.9 : 공석중인 주한미공사관 총영사 및 대리공사 담당.
-1892: 조선최초의 <코리안 레포지토리> 잡지 간행.
-1897.5 : 경인철도 건설 제안과 개통(1899.9.10.).
-1898.2 : 알렌이 주한 임시대리 공사로 고종에 건의하여 전기사업과 전차 부설을 실행하게 함. 한성전기회가 설립과 개통(1898.2)
-1898.2.15 : 알렌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미국 콜브란,보스트윜사가 근대식 상수도국(뚝섬) 개원으로 조선인 보건 위생 사업에 기여함.
-1907.11 : 미국과 일본과의 ‘가쓰라테프밀약’에 대해 미정부에 반대하다가 강제 송환됨.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
<다음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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