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은 하늘과 땅을 잇는 길이 놓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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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이창배 발행인] 이날은 하늘과 땅을 잇는 길이 놓인 날 » 2023년 성탄절 시즌에 »
“어둠을 밝히는 작은 촛불이 되자.”
우리에겐 성탄절로 명명된 이날이 주는 교훈이 있다. 이날은 하늘과 땅을 잇는 길이 놓인 날이다. 이 길을 통해 망망대해와 같은 광야에서 돌베개로 누운 야곱이 보았던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상을 이어주는 사닥다리가 이 땅에 놓인 날이고, 장차 이 길을 통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길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가야 할 길이다. 그러니 더는 세상 풍조를 좇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조용히 무릎을 꿇자. 어둠을 밝히는 작은 촛불이 되자. 눈을 들어 산을 보자. 올해 크리스마스는 내게 이렇게 다가섰다.
세계적으로 그 권위를 가장 인정받고 있는 사전은 Encyclopedia Britannica이다. 이 대영백과사전이 초판 당시에 한 질 값이 백만 원 정도였다고 하는 데, 당시 가치로 5백만 원이면 웬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비싼 책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당시에는 세일즈맨 가운데 최고의 세일즈맨이 바로 이 대영백과사전을 파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대영백과사전이 예수님을 설명하는데, 2만 단어나 사용하고 있다.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한 기술보다 훨씬 더 많은 기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예언이 약 350회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대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나시고, 어떻게 사시고, 어떻게 죽으실 것에 대한 예언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성취되었다. 다만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이 단 하나 있는데, 바로 ‘오실 것’, 재림에 대한 예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분에 대한 예언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 것을 감안한다면, 마지막 남은 단, 하나 ‘오실 것’에 대한 예언도 이루어질 것을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정말로 ‘오실 것’에 대한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오실 것이 분명한데 오실 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참말로 아이러니가 되는 것이다.
마틴 루터가 수도사 생활을 시작한 독일의 에르푸르트에 위치한 대성당의 입구에는 오른쪽과 왼쪽 벽면에, 청동판에 새겨진 기름 등불 준비한 열 처녀 조각이 있다. 그런데 오른쪽 등불을 켠 다섯 처녀의 부조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마다 만지고 지나가니 반들반들 빛을 발하고 있는데, 그 왼쪽의 기름 떨어져 불을 켜지 못한 채 서 있는 다섯 처녀의 부조에는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아서인지 시퍼렇게 녹슨 그 자체로 오랜세월을 어두컴컴 하게 서 있다.
이 부조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안다. 그 부조가 의미하는 바를… 이마도 이 부조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이 조각상에 담겨있는 그 의미를 잊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 부조가 서 있는 에르푸르트 대성당을 찾는 이들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징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거나 멀리 떨어져 그곳을 쉽사리 찾아갈 수 없는 이들이라면 상황이 또 다르다. 그런 경우라면 누군가를 통해서이든 아니면 자신이든지 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를 듣거나, 읽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기억에 둘 수 있겠다. 그러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라고, 말씀한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부르리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4-15). 아멘. 아멘. 아멘.
필자가 이제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항상 마음에 둔 속담 하나가 있다면, “나무를 보면서 숲을 보지 못한다”라는 말이다. 고사성어로는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이라 해서, “축록자(逐鹿者) 곧, 사슴을 쫓는 사람은, 불견산(不見山) 곧,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즉, “실리를 탐하느라 큰 것, 즉 대의를 망각하는 어리석은 행위”에 빗대어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을 왜 끄집어내는가 하면, ‘영적 지도자’ 또는 ‘교회의 리더로써 목사, 교사와 같은 자’라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위하여 택함을 또는 부르심을 입었다고 자기의 정체성을 가진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이다.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이란 말에 빗대어, “지금 눈앞에 두고 있는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가”, “거기에 시선을 뺏겨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가?” 그런 자기성찰과 반성의 갈림길에 서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러 변명과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건 자명하다. 당연히 멀리 있는 산을 볼 여유가 없을지 모른다. 삶이 팍팍하고, 눈앞이 다급하고, 지금이 시급한데, 멀리 있는 산을 볼 틈이 어디 있을까 싶다. 아니 항상 생각이나 이상보다 먼저인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게 현실이고 보면 머리에 둔 지성은 뒤편이고 앞서는 것은 감성일 수 있겠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리더라면 다르고, 분명 달라야 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풍조를 보면 더더욱 마음이 안쓰럽다. 교회의 영적 리더십이 형편없이 무너진 모습을 웬만큼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다 안다. 그만큼 교회적으로는 영적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보라. 세상이 어디 성탄이 안중에 있는가 싶다. 아니 이 말을 직접 화법으로 바꿔보자면,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렇게 무관심 속에 오늘도 저물어 가는 12월, 곧 성탄을 앞둔 시점을 보내고 있음이다.
이리도 어두컴컴해진 세상을 지나 보내면서 문득 감사한 일이 하나 있다. 문득 지금의 상황이 마치 예수님 탄생 당시의 베들레헴 시가지를 보는 듯 성경 구절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 문전성시를 이룬 베들레헴이 그랬다. 누구 한 사람, 곧,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탄생에 관심을 둔 사람이 없었단 점이다. 만삭의 몸으로 머물 숙소를 구하지 못한 요셉 부부는 동굴 속 가축을 가둬둔 우리에 겨우 몸을 두었지 않은가? 그리고 산파조차 구하지 못한 채 마리아는 출산하고, 아기로 탄생하신 구세주 예수님은 구유에 누이셨다.
필자가 다녀온 베들레헴은 돌과 굴혈이 많은 지형이다. 경사가 심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산지로 이곳이 번화한 성시를 이루는 일은 그다지 흔치 않을 일이지만 당시로 헤롯의 호적 조사로 인해 이스라엘의 각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 중에는 성경에 박식한 이들, 신실한 신앙인도 있었을 테고, 오래전부터 메시아 탄생이 예고된 떡집이라는 베들레헴의 유서 깊은 역사를 알고 있었을 법한데, 조금 더 관심을 쏟았더라면 성경에 이른 징조를 알아챘을 텐데, 대부분 성경과는 무관한 채 자신의 생업에 바빴던 탓에 불현듯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는 영광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이 영광스러운 자리의 주인공은 비천한 신분의 목동들뿐이었다.
이때를 돌아보면, 그 풍조가 눈 안에 든 먹잇감인 사슴만 바라보며 쫓았던 세상의 모습이 다를 바 없다. 그 일에 급급하다 보니 사슴을 따라서 산속 깊숙이 들어선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한 표현은 다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더는 길도 볼 수 없는 지경에 빠져서야 앞서서 산을 보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랴,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생각해 보라. 나만 길을 잃는 것은 괜찮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 뒤를 무작정 앞선 사람만 바라보며 뒤를 따라오는 수많은 무리는 또 어떻게 할까?
그러니 당신이 지도자라면, 영적인 리더십의 소명을 가졌다 한다면, 설령 사슴을 놓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사슴이라는 실익보다 산을 살펴 길을 잃지 않으려는 더 큰 사명에 눈을 돌렸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 누군가를 위해 길을 내야 한다는 책임을 망각했던 점이다. 이것이 바로 대의와 명분도 모두 잃어버리게 된 비참한 결말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이 길을 만들기 위해 이 땅에 비천한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시다. 이 길은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이며,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길이다. 그래야 아버지께로 올 길이 만들어진다.
그렇다. 우리에겐 성탄절로 명명된 이날이 주는 교훈이 있다. 이날은 하늘과 땅을 잇는 길이 놓인 날이다. 이 길을 통해 망망대해와 같은 광야에서 돌베개로 누운 야곱이 보았던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상을 이어주는 사닥다리가 이 땅에 놓인 날이고, 장차 이 길을 통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길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가야 할 길이다. 그러니 더는 세상 풍조를 좇은 어리석음을 버리고, 조용히 무릎을 꿇자. 어둠을 밝히는 작은 촛불이 되자. 눈을 들어 산을 보자. 올해 크리스마스는 내게 이렇게 다가섰다.
글 이창배 목사/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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