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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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한미수교 140년사의 근대문명 리뷰-11 » 강석진 목사 »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태동이 된 ‘필라델피아 대한인총대표회’
1905년 미국과 일본간의 ‘가쓰라테프트 밀약’은 사실상 미국과 대한제국과의 외교 단절을 가져왔다. 그로인해 서울의 미공사관을 비롯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공사관을 철수시킴으로 이들 나라들과의 공식적 외교 관계도 모두 정리되었다. 이어진 1910년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은 국가로서 멸절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의 한인들의 여러 활동은 그들만의 행사나 개인의 사회 활동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주미 한인들과 일부 지도자들은 대한민국 건국의 태동과 독립을 위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그 역량을 키워나갔다.
1919년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는 3.1 만세운동이 국내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이에 고무된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해에서 그해 4월 13일에 김구를 중심으로 국민 대표가 정치를 이끄는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태동시켰다. 한편 거의 같은 시기인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미국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도 이승만(1875~1965)과 서재필(1864~1951)을 중심으로 ‘대한인총대표회’가 열려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유의미한 선포식이 미주 지역에서 일어났다.
미국에서 이같이 한인 독립운동의 지지와 대한민국 건국의 구상에 큰 영향과 격려를 해준 인물이 허버트 밀러(Herbert Miller) 교수로서 이를 제안해 줌으로 성사될 수 있었다. 이날 밀러 교수는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이승만을 돕기 위해 ‘한국친우회’와 ‘구미한국위원회’의 위원을 자청해 주어, 훗날에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 회에는 이승만을 비롯하여 해방후 남한에서 정부 수립 시에 중요한 역할과 기여를 한 서재필, 정한경, 임병직, 종병욱, 장택상, 유일한, 장기영 등이 참석하였다. 이 당시 미주 한인들은 약 1천여 명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120명의 동포와 미국계의 거물급 명사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미주리주 출신인 셀던 스펜서(Selden P. Spencer) 상원위원이 축사를 하였다. 또 네브라스카주 출신의 조지 노리스(George W. Norris) 상원의원이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였다. 두 상원의원의 연설문은 그후 미국 국회 의사록에 수록되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외국인 중에 특히 주목을 끈 인물은 두 명으로 허버트 밀러 교수와 마사리크 교수로서 ‘중부유럽연합’을 창시하였다. 이날 한인 대회를 마친 참석자들은 토마스 스미스 필라델피아 시장의 양해를 얻어 회의장에서 2킬러 정도 떨어진 인디펜더스홀(독립기념관)까지 비를 맞으며 행진했다. 그 시장도 한인 대표들과 같이 시가 행진을 했고, 독립기념관 홀에 도착하여 미국 독립의 상징인 ‘자유의 종’을 울렸다. 이승만은 서울의 3.1만세운동에서 선언된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낭독함으로 한인들의 독립 의지를 미주 지역에 선포하였다.
의장직을 맡은 서재필은 회의 도중에 이승만을 한국인 가운데 가장 유능하고 준비가 된 지도자라고 칭찬하였다. 그 홀에 도착해서는 그 시장이 이승만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도록 배려해 주었다. 또 회의 종료 때는 이승만에게 만세삼창을 선창하도록 하는 등, 이승만을 3.1운동 후에 건립된 새 정부의 최고 지도자로 대우해 주었다.
한편 중국 상해와 러시아 연해주와 서울에서 임시정부가 결성된 사실을 모르는 상황에서 열린 미국에서의 제1차 한인회는 회의 둘째 날인 4월 15일에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은 당시 필라델피아 한인대회에서 서재필과 함께 ‘新大韓’의 비젼을 구상하고 제시했는데, 이것이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신대한의 건국 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국가를 건설한다. -미국식 공화제 정부를 수립한다.
-중앙정부는 입법부와 행정부로 구성된다. -국회는 국민을 대표해 헌법과 국법을 제정한다.
-국회의원은 도의회에서 선출한다. -대통령, 부통령, 내각 각료로 구성되는 행정부는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따라 행정을 한다.
-국민의 교육 수준이 저급하고 그들의 자치 경험이 부족한 점을 고려하여 정부 수립후 10년간 중앙집권적 통치를 시행한다.
-정부 수립후 10년간 정부는 국민교육에 주력함으로 국민이 미국식 공화제 정부를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든다.
-국민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그들의 민주주의적 자치 경험이 축적되면 이에 맞추어 그들의 참정권을 확대한다.
-국민이 자치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도,군 등 지방의회 의원 선거권을 부여한다.
이렇게 구상된 문헌이 그 당시에는 헌법은 아니었지만 준헌법적 중요성을 지닌 문건으로 장차 대한민국 정부가 제헌의회를 소집해 본격적으로 헌법을 제정할 때에 참고하게 될 중요한 문건이라고 참석자들은 판단했다.
당시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들이 또 있다. 조선 말기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일제 시기에 추방당한 호머 헐버트(Hommer Herbert/1863~1949)와 벡(S.A. Beck) 선교사이다. 이들은 구미위원부의 선전원으로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한국의 독립을 주제로 강연과 미 언론에 기고 활동을 하였으며 제2의 한국인으로 미주의 독립 인사들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이처럼 미국인 정치인들과 학계의 교수들과 일제로부터 조선에서 추방된 선교사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같이 헌신해 줌으로 미주 한인들에게 큰 힘과 격려가 되어 미주 지역은 독립운동의 후방 역할을 해주었다. 그로인하여 미주 한인 애국 단체는 상해 임시정부와 협력 관계가 구축되어 미국 정부와는 외교적 공식 관계가 없었지만 민간 차원에서 큰 역할을 해 주었다.
한편 이승만은 1919년 6월 14일이 되어서야 지난 4월 23일 수립된 한성임시정부가 자신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은 한성(서울)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집정관 총재라는 직함을 대통령으로, 국호는 ‘대한공화국’으로 번역하여 사용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19년 8월 25일에는 워싱턴의 한국위원회를 ‘구미위원부’로 개칭하고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 후 미국으로 온 김규식(1881~1950)을 초대위원장에 임명하였다. 구미위원부가 설치된 후 이승만과 김규식은 공동명의로 ‘한국민독립운동 지속 선포와 요청’이라는 제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문건에서 두 사람은 새로 건국할 신대한의 국가상과 대한민국의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밝히므로 장차 이루어질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을 선포하였다.
-대한민국의 국체는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정체는 대의제이다.
-대한민국은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 -대한민국은 언론의 자유와 소청의 권리를 인정한다.
-귀족의 특권은 폐지한다.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한다.
-국가의 안보와 독립 그리고 주권을 보전할 목적으로 상비군 대신 민병대를 유지한 다.
-소수민족들의 권리를 보호한다.
-독립된 사법부를 설치한다. -교육을 특별히 장려한다.
-사회 풍속을 정화한다.
이승만과 김규식은 새로 탄생하게 될 대한민국을 삼권분립 원칙에 입각한 대의제 공화국으로, 국민의 평등과 신앙 및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로 구상하였다. 이러한 헌법 구상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될 때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처럼 미주 지역에서 서재필, 이승만, 김규식 등 여러 인사들이 자유민주주의 요체를 구축할 수 있었던 점은 이들이 미국에서 대학 이상의 교육을 받고 미국 사회에 살면서 미국의 정체성과 민주 사상을 배웠다. 미국은 건국할 당시에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봉건적 왕정이 아닌 대통령 중심제와 삼권분립이라는 세계 최초의 민주 국가를 건국함으로 이 영향을 받은 미주의 애국 인사들에게는 장차 이루어질 대한민국은 미국과 같은 민주 국가가 되어야 함을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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