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인격 최고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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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좋은 인격 최고 행복 -김형석 교수 책 발췌 »
좋은 인격 최고 행복 – 누구나 행복을 구한다. 그래서 행복이 목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일을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이 먼 훗날에 있는 것은 아니다. 행복이 미래에만 있다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행복이 과거에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과거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과거의 행복도 있을 곳이 없다.
그러면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행복이 머무르는 곳은 언제나 현재다. 지금 여기에 있는 행복이 행복이다. 그런데 현재라는 시간은 하나의 과정이며 흐름이다.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가는 것이 시간이라고 해도 현재는 지나가는 과정이며, 시간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간다고 해도 현재는 지나가는 순간순간이다.
행복이 있다면 이러한 순간으로서의 현재에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는 본래 행복에의 기대와 욕망이 있다. 그 행복에의 기대와 욕망을 미래로 예측했을 때만이 행복을 우리 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공허하게 만들 수는 없으며, 과거 때문에 현재를 잃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행복이 현재에만 머물 수 있고, 현재는 지나가는 시간의 과정이라면, 행복은 과정으로서의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까다로운 이론을 떠나 우리의 현실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50년쯤 전의 일이다. 서울대학교에 있는 친구 교수가 전화를 걸어 왔다. 재작년부터 신청해두었던 전화가 가설되었기 때문에 전화를 걸어보고 싶어 다이얼을 돌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쁘지 않으면 몇 분 동안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친구의 말투가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자기가 전화를 끝낸 뒤에는 부인이 걸어볼 작정이며, 큰딸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까지 해주었다.
내 친구만 그런 것이 아니다. 55년 전에 내가 처음 전화를 놓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전화를 신청했을 당시에는 신청자가 많아 전화국에서 제비를 뽑았다.
20대 1이나 되는 경쟁에서 뽑혔기 때문에 며칠을 두고 그 얘기를 계속했다. 스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추첨 장소에서 새어나오는 마이크 소리를 여러 사람 속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 됐지?” “끝내는 거야?” “뭐 한 사람 더 남았어?” “똑똑히 봐.” “그럼 마지막으로 한 사람만 더 뽑는 거야” 하더니 “이번!” 하고 불렀다. 그렇게 뽑힌 것이 바로 우리 집 전화였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전화를 놓았던 터라 온 가족의 즐거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화를 어디에 놓는가도 화젯거리였고, 혹시 흠이라도 생길까 곱게 다루느라 마음 쓰면서 지냈다. 내 친구도 가족과 더불어 그런 작은 행복감에 젖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요사이 잘사는 가정에 태어난 어린이들은 그런 즐거움과 행복감을 모른 채 자란다. 태어날 때부터 집에 전화가 있었기 때문에 고마움도 모르고 행복감도 없다. 누가 전화를 가지고 행복해 한다면 고작 그런 걸 가지고 법석인가 하고 웃어 버리고 만다.
또 많은 가정들이 자가용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 차를 샀을 때는 들뜬 마음에 밤에도 밖에 나와 차를 닦으며 지극 정성이었다. 내가 아는 친구는 차를 산 날 밤에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그의 아내도 살다 보니 이렇게 좋은 세상이 왔다며 좋아했다고 했다.
그러나 내 친구의 아들딸들에게는 그런 행복이 없었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차가 있었으니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인생을 시작할 테니 말이다.
집도 그렇다. 처음에는 셋방에서 살다가 전셋집으로 옮겨가는 즐거움이 있고, 도시 변두리의 작은 집을 샀다가 아파트로 옮겨가는 기쁨이 있다. 그런 성장의 과정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부자 부모를 둔 덕분에 처음부터 큰 집을 얻어서 분가하는 젊은이들은 부모가 겪은 아기자기한 행복과 만족감을 맛보지 못한다.
그래서 서양 가정에서는 자녀가 성인이 되면 자력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삶의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반대로 한꺼번에 삶의 목표에 도달해 버리고 만다면 마지막 행복밖에 누리지 못한다. 등산의 즐거움은 산 아래에서부터 높은 정상까지 올라가는 도중에 누리는 것이다. 아무런 수고도 없이 꼭대기까지 헬리콥터를 타고 올라가고 만다면 등산의 희열은 맛볼 수 없다.
인생의 층층대를 걸어 올라가는 사람은 그 계단 하나하나에 인생의 뜻을 둔다. 그때그때의 의미와 감사를 모른다면 결국 마지막 계단에 오른 즐거움밖에 남는 것이 없지 않겠는가.
한편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등산을 끝낸 사람은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상에 오른 등산객은 더 올라갈 곳이 없으니 내려오는 일이 괴롭거나 불행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생의 과정은 그렇지 않다. 올라갈 때는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지만, 내려올 때는 언제나 슬픔과 불행을 동반한다.
쓴 것이 끝나면 단 것이 온다는 의미의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그것을 거꾸로 놓으면 단 것이 다한 뒤에는 쓴 것이 온다는 뜻이다. 더 올라갈 인생의 과정이 없는 사람은 불행을 겪어야 한다. 인생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부를 물려받지 못한 농사꾼의 아들은 올라갈 일만 남아 있어도, 부모의 은혜 덕분에 일찌감치 높이 올라가 있는 장관의 아들은 내려오는 과정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이치가 성립된다.
부유한 사회의 청소년들보다 가난한 국가의 젊은이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올라가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으나 퇴락하는 과정에서는 불행과 고통을 겪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행복만을 향해 나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생을 사는 동안 계속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행복을 찾아 누려야 한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옳은 일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예수는 가르쳤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같은 여건에서도 감사와 자족을 누릴 수 있으며, 의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은 그 수고가 성장과 발전의 과정이기 때문에 남이 모르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면 부를 차지한 사람은 앞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난한 사람보다 불행하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높아질 가능성이 있는 낮은 지위의 사람보다 불행한가. 그럴 수 있다. 10억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 7억으로 재산이 줄어들 때는 불행을 느낀다. 그러나 2억을 가진 사람이 5억의 재산을 차지할 때는 행복을 누린다. 예편을 앞둔 대장은 행복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준장으로 올라가는 대령은 큰 희망과 행복을 더 많이 누리는 법이다.
이처럼 뜨는 태양은 행복을 상징하지만, 지는 태양은 비참을 뜻하는 결과가 된다면, 누구나 같은 운명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반드시 그와 같은 자연의 질서에 따르지는 않는다. 인간은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으며, 우리 각자의 삶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면 판단은 달라진다.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즐긴 사람이 사회봉사나 문화예술 분야에서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행복이 존재한다.
정치나 경제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개인의 재산보다 사회적 업적을 통해 더 큰 행복을 얻는다. 문화나 정신적 영역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은 재산이나 소유물에서 얻는 것 이상의 행복과 가치를 누릴 수 있다. 가난 속에서 무상의 행복을 누린 종교 지도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무엇을 소유하는가보다는 어떻게 가치 있는 삶을 누리는가가 행복의 조건이 된다. 그리고 무엇을 얻는가도 중요하지만 이웃과 사회에 무엇을 주는가가 더 높은 가치의 행복을 약속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결론은 마찬가지다. 행복은 참되고 값진 하루하루의 삶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욕망이나 환상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욕심은 행복을 놓치게 만들어도 값진 봉사는 불행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에서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사람, 꾸준히 성장해가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러한 삶의 과정에는 언제나 깊은 행복이 솟아오른다.
좋은 인격은 최고의 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인격은 계속해서 성장하며, 다른 인격체인 이웃을 위해 사귐과 섬김을 베풀도록 되어있다. 만일 그러한 인격을 가진 사람의 삶이라면, 그는 그 인격적 삶에서 오는 행복을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격은 행복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행복을 창조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필자 김형석 발췌
<출처>
인생의 열매들, 김형석, 김태길, 안병욱
비전과리더십, 2019, 25-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