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 사무엘 이야기 그리고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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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칼럼=Dr. Elijah Kim] 내 아들 사무엘 이야기 그리고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
부부란, 행복도 함께 하고, 사랑도 함께 하지만,고난과 짐도 함께 지는 것…
2009년 긴 겨울이 지나가고 생동하는 봄이 다가오던 3월 중순 어느 날 고 조용기 목사님과 저희 부부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약속 날짜 하루 먼저 보스톤에서 한국에 도착한 저는 필리핀에서 온 아내와 만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인천 공항에서 합정동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도착해 보니 그곳은 말로만 듣던 홀트 아동 복지회였습니다…
필리핀에 고아원 세우는 것이 미래 사역의 매주 중요한 것이었기에 미리 견학을 하고자 했는데 아내는 홀트 아동복지회 센터에서 우연히 한 젊은 엄마가 울면서 아이를 맡기고 나가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저희 부부는 그날 홀트의 입양 상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조용기 목사님을 뵈었습니다. 조목사님은 대화 말미에 “앞으로 김종필 목사의 사역 시대가 되었다”라고 하시면 깊게 그리고 길게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저희 부부는 홀트 아동복지회를 다시 찾았습니다. 당시에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직 예수”라는 CTS 전국 방송을 하곤 있던 저는 저를 잘 알고 있는 홀트 아동복지회 전체 관계자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입양이 급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사역 때문에 바로 보스톤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천사로 다가온 그 아이는 울면서 젊은 엄마가 맡긴 그 아이였습니다.
저희 부부는 이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어떤 모습으로 클지?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의 나이가 50이었습니다. 나이 50에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아내는 필리핀에 있고 저는 보스톤에 있는데 제가 아빠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필리핀에 갈 때마다 한 번도 지루해 본적이 없습니다. 보통 두 번 또는 세번 경유해서 가는데 보스톤에서 떠난 시각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3일이 걸립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를 보는 설레임은 그 어떤 것과도 비견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딸을 키운 이후 20여년 만에 느끼는 사람의 행복 감정 중에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무엘은 너무나 사랑스럽게, 이쁘게 그리고 지혜롭게 잘 커주었습니다. 저희 딸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4세가 넘어 5세 가까이 되어 필리핀에 왔기에 한국말을 참 잘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선교지에 있으니 전부가 다 필리피노 말을 하였고 아내는 늘 필리피노를 했기에 한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자연스럽게 아내하고는 필리피노인 따갈로그를, 저는 가급적이면 영어로 대화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무엘은 한국어를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기대 이상으로 사무엘은 지혜롭고 똑똑했습니다. 공부도 탑을 달렸습니다. 이곳 보스톤을 방문하기에 수업을 빠지지 않았다면 전교 1등을 했을 것이라고 학교 전체가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는 사무엘은 정말 목회자입니다. 어려서부터 남을 돕고 나누고 늘 섬기는 모습만을 보아와서 그런지 이 아이는 모든 성도들을 다 섬깁니다. 사무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복도에서 아이가 넘어지는 모습이 보이면 어디선가 달려와서 그 아이를 보호하곤 했습니다.
보스톤에 와서 지도자 대회를 참 많이 했습니다. 미국인들도 New England 최대교회인 Bishop Thompson 앞에서는 말도 더듬고 참 어려워합니다. 그분은 그토록 기품이 있고,얼굴과 전체 풍체에서 풍기는 권위와 온유 그리고 후광이 있습니다. 이런 분을 사무엘은 어깨 동무하면서 금방 친구로 만들어 둘도 없는 사이가 됩니다. 어떤 미국 사람을 만나도 친화력이 뛰어나고 그들을 잘 섬깁니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지 모릅니다.
그런 사무엘이 어느새 15세가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사무엘의 문제로 걱정이 많았습니다. 이 아이가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데 한국의 군대에 가면 언어와 문화 문제로 적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저의 딸이 영국을 거쳐 보스톤으로 와서 자연스럽게 18세가 되던 해에 미국 시민이 된 것이 기억났습니다. 엄마 손에서 큰 사무엘이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와 뛰어난 지도자가 되어야 하기에 이제는 아빠와 지내기로 가족 간에 깊은 대화가 되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정 가운데 아내와 사무엘이 4박 5일로 보스톤을 방문했습니다. 사무엘이 미국 학교에 다니게 되면 그 때 한국 국적인 사무엘이 미국 시민권을 받도록 곧장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미국 공립학교에 다니는 서류 중 학교에 다시는 서류가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올 8월말에 미국으로 와서 공부하기 위해 먼저 제가 사는 타운의 교육청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를 방문하는 날 학교 로비에 크게 걸려있는 LGBTQ를 지지하는 무지개 깃발이 걸려 있었습니다. 한 눈에 학교를 파악한 사무엘은 “자신이 학교를 다니는 내내, 내 신앙은 동성연애를 반대한다는 소수의 의견을 낸다 해도 이 학교의 전체 분위기가 gender equality(성평등)를 이유로 자신의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매우 심각해졌습니다. 사무엘은 나이에 맞지 않게 신앙의 성숙함을 지녔고, 자유주의적 분위기인 미국 학교를 분별하고 판단하는데 매우 예리하고 지혜로웠습니다. 저희 부부는 긴 대화 끝에 보스톤 지역에 꽤 오래된 기독교 학교인 Lexington Christian Academy를 두 번에 걸쳐서 방문했습니다. 학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학교 곳곳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특히 예배당을 들러 보고 찬양팀으로 섬기면 좋겠다고 적극적으로 표명했습니다.
문제는 이 학교가 이미 2월에 등록을 마쳐서 더 이상 인원을 받지 않으며, 지금은 한국 국적인 사무엘은 더더욱 국제 학생이기에 인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미국 시민권자가 되고 나서 받는다 해도 워낙 비싼 등록금에 대한 장학금 지원이 다 나가서 내년에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매우 긴 프로세스가 걸렸고 저희 가족은 이 문제로 다시금 깊게 대화하고 성평등과 기독교인이 극히 소수인 공립학교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시민권을 얻고는 다시금 필리핀으로 갈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을지는 그때 가서 결론을 내기로 했습니다.
저는 39년 목회 그리고 33년의 선교 사역 가운데 가장 몰두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지도자 훈련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등뒤에서 칼을 꽂고 배반하는 것은 물론이고 눈을 뜨고 있는데도 배반하고 대 놓고 세상으로 나간 제자(?)도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제자를 키웠고. 그 중에 훌륭한 제자도 나왔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국제인으로, 3-4개 언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고, 하버드, 콜롬비아 등 여러 대학을 거쳐 지금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의학박사를 마치는 과정에 있는 딸은 정말 존경받을만한 사람입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세계 최고의 대학을 다 거쳐서 가 아니라 그가 가진 학문적 편린이나 국제적 감각에 있어서, 특히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머무는 기간 만에 해도 교수들이 받아야 할 상을 영국, 유럽 그리고 세계에서 주는 5-6개의 상을 휩쓸었습니다. 저희 딸은 36세인데 곧 37세가 됩니다. 사실 너무나 교육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오직 책을 통해 세상을 보았던 저이지만 딸은 Northeastern University, Harvard University, Columbia University, MGH Institute, 그리고 Cambridge University를 거치면서 제가 책으로 본 세상을 실제로 접하고 성장하고 성숙의 과정을 거쳐 또 하나의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15년 전 입양했던 사무엘은 저희 딸과는 많이 다른 과정으로 저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마음 특히 목자의 마음, 선교사의 섬김, 성도의 봉사, 성숙한 영성, 지혜로움과 분별력 등 많은 영역에서 뛰어납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대하지 않고 저희 부부는 사무엘이 “사랑을 듬뿍 받고 행복하게만 자라다오!”라고 했는데 이제는 이 아이를 보며 없던 기대가 생겼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생각이 성숙하면 존경이 절로 납니다. 사무엘이 그렇습니다. 저는 아들이지만 이 아이를 존경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아이가 이런 성숙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저에게 감당할 수 없이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자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필리핀으로 갑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사무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필리핀이 재정적으로 어려운데 송금해 줄 수 있게느냐?는 것입니다. 엄마와 자신이 7일 금식 중이라는 것입니다. 순간 먹먹해 졌습니다. 계좌에 1달러라도 보내 돈이 있어야 보내는 데 그렇지 못합니다. 30여 년 사역 가운데 이렇게 빈손으로 필리핀을 가는 것도 아마도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없어도 적어도 몇 백 불은 가지고 갔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토록 어린 사무엘이 지난번에 7일 금식을 하더니 이번에도 필리핀 도착하자 마자 해결할 없는 수많은 재정 문제로 엄마와 함께 금식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뻐하기 보다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물론 이 고통의 시간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저는 어제 미국 최대 기독교 라디오 방송국인 Salem Media Group과 앞으로 진행될 저의 방송 설교 그리고 연계된 웹사이트등을 개설하는 일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재정이 없어서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방송 관계자들이 재정이 없다 해도 방송을 통해 조금이라도 후원이 들어 올 수 있으니 진행하고 돈은 나누어서 지불하면 된다고 합니다. 지금 필리핀이나 미국이나 믿음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미국 사람들을 보면 평생 열심히 일하고 노후에 연금을 받으면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 꿈입니다. 하지만 연금도 직장에서 버는 급여로 내는 세금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세금도 미국 기준으로는 극빈자에 속합니다. 다시 말하면 제가 낼 소득이 없다는 애깁니다. 미국 사역 20여년 가운데 어떤 경우이든 헌금이 들어오면 무조건 전액을 다 필리핀으로 송금했습니다. 그러나 필요가 많은 필리핀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손가락만 빨고 있을 그곳 사정을 알기에 이곳에 있는 저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고 달려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금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합니다. 가장 절박한 상황에서도, 큰 위기에서도,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오직 주님을 신뢰함으로 다시금 금식과 기도 가운데 나아가고자 합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보스톤에서 김종필 목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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